비탈진 음지 - 조정래 장편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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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해 본다. 지금의 아이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얼만큼이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밥투정하는 아이에게 아빠 어렸을적에는 없어서 못먹었다고 말하니 수퍼에 가면 먹을게 많은데 왜 굶느냐고 했다는 우스개소리가 가끔씩은 가슴 한켠에 서늘한 바람을 남겨놓기도 하는 세상이다. 이 책이 쓰여졌을 1973년이면 나는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나이다. 하지만 소설속의 배경은 그 이전의 세상이니 내게도 멀고 먼 이야기일 것이다. 소설속 복천영감의 삶을 그 후로도 오랜동안 살아냈을 우리의 부모님 세대 이야기가 정말 까마득한 옛날,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은 짧은 시간속에서 너무나도 급하게 변해버린 세상탓일게다. 그야말로 낀세대라고 불리워지는 우리세대라면 가슴 뜨겁게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정말 오랫만에 그 비탈진 음지에 서 보았다. 눈내린 겨울이면 집집마다 쌓아놓았던 연탄재를 하나씩 들고나와 깨뜨리고 부수며 미끄러지지 않게 밟고 갔었던 그 비탈길, 비좁은 골목길에서도 우리는 다방구를 하고 술래잡기를 하고 망까기를 했었다. 유행가 가사처럼 밥먹으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해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놀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기억속에는 기쁨과 즐거움보다는 삶의 아픔이 훨씬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너나 할 것없이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 혹은 자식만큼은 손에 흙 안묻히고 살게 해 주겠다고, 못배운 한을 자식을 통해 풀어보겠다고 서울로 서울로 등짐 짊어지고 올라온 부모님 세대가 있었기에 어쩌면 그 변화가 급물살을 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의 한맺힌 서울살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소설속의 세상은 정말 씁쓸하다. 서울냄새... 그다지 향기롭지 못한 그 서울냄새가 싫었던 복천영감의 여린 감성조차도 결국엔 동화될 수 밖에 없는 삶의 고통이 서글프게 다가온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꿈에 그리며 아귀같이 살아내야 했던 복천영감의 서울살이는 그야말로 처절했다. 당시에는 누군들 그렇게 안살았을까?  책 속에서 말하던 부잣집 담벼락의 모습은 내 기억속에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높은 벽돌담위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쇠창살과 그것도 모자라 깨진 병조각들을 뿌리듯이 박아놓았던 그 담벼락.. 분명하게 갈라진 빈부의 차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서울냄새가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 때나 지금이나 서울냄새가 향기롭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명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카알 가아씨요~~~를 외치던 복천영감의 직업은 칼갈이다. 칼갈이 뿐일까? 커다란 가위로 박자를 맞춰가며 리어카를 끌고 다니던 엿장수도 있었다. 고무신 한짝만 가져가도, 병 한두개만 가져가도 엿이나 강냉이로 바꿔먹을 수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엄청 귀한 것이라 그저 엿장수 리어카만 졸졸 따라다녀야 했다. 양철통 두개를 지게의 끝에 매달아 어깨에 짊어지고 물이 아니라 똥을 퍼나르던 똥퍼아저씨, 제 몸보다 훨씬 커다란 바구니를 어깨에 걸치고 돈이 될만한 것이라면 뭐든지 주워담던 넝마주이도 있었다. 또 있다. 머리카락 팔아요~~ 골목마다 퍼지던 낭낭한 목소리, 버스를 탕탕쳐대며 오라이~를 외쳐대던 버스차장의 목소리,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대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당시에는 공동수도뿐만 아니라 공동변소도 꽤나 많았다. 지금도 문방구에 가면 나 어릴적에 먹었던 군것질거리들을 볼 수가 있다. 부모님 세대의 추억이라고 뽑기가 유행했던 적도 있었다. 뽑기나 달고나의 추억만큼 달콤한 것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못살았던 시절이라 복천영감을 이끌어주었던 떡장수 아줌마네 가족처럼 한순간에 연탄가스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던 사람도 엄청 많던 시절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낯선 타향에서, 그것도 눈뜨고도 코 베인다는 도시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건 조금만 더 고생하면 나아지겠지하는 그런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힘겨운 삶을 이끌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사람냄새가 그립고 정이 그립다고 말하는 요즘이지만 어느 누구도 먼저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어떻게 나눠야 하는건지를 몰라서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왜곡된 교육의 골이 너무 깊이 패인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말은 하면서도 가난이 죄가 되는 지금의 세상. 가난한 사람들을 벼랑으로 내모는 시대의 비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라는 말이 안고 있는 의미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무작정 상경'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세대의 비극과 시대의 아픔 끝난 것일까?  오래전에 읽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떠올린다.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 어쩌면 그 비극과 아픔이 현재진행형일거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아이비생각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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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은 왜! 사라지는가 - 배부른 세계의 종말, 그리고 식량의 미래
빌프리트 봄머트 지음, 전은경 옮김 / 알마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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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쭈욱~ 진행될 것이다. 과거의 전쟁이 영토를 넓히기 위함이었다면 현재와 미래에 치러질 전쟁은 그야말로 살기 위한 전쟁일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식량과 물을 확보하기 위해 세계의 여러나라들은 이미 전쟁의 서막을 알리고 있다. 어찌보면 그 식량과 물을 얻을 수 있는 토지를 찾아 헤매는 것이니 또다른 영토전쟁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전쟁을 어느정도는 예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이익집단이 이끄는 세계의 흐름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멸의 길을 걷고 있는 인류의 방향을 보게 된다. 누군가는 말했다. 지구 최대의 적은 인간이라고. 진화라는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이라고. 수많은 영상매체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메세지는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럴싸한 말로 둘러대며 비껴가기만을 반복할 뿐이다. 

우리에게 과연 핑크빛 미래는 올 수 있을까? 핑크빛 미래라는 말은 도대체 어떤 것을 두고 하는 말인지 다시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종말론이 판치는 세상속에서 어쩔 수 없는 인류의 멸망을 다시 논하게 된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은 사람이 점점 늘어만 가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는 취해지지 않는다. 아니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더 심한 배고픔을 선사하고 말았다.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정치적 이해관계와 경제적 이득이 기아와 도덕에 우선하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목소리를 높인다. 자연의 재앙이라고까지 말하는 기후의 변화는 심각하다. 그 원인을 파헤쳐보니 그 역시 답은 간단했다. 환경을 보호하지 않았다는 말은 지극히 미세한 일부였을 뿐이다. 결국 산업화로 인한 개발이 문제였던 것이다. 많은 경로를 통해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워지는 곳까지 개발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산업화라는 게, 문명이라는 게, 진화라는 게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좋아지는 것일까? 분명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쉽게, 너무 많은 것을 얻어내고자 하는 욕심이 앞선 까닭이다. 옛날 방식대로, 그야말로 자연의 흐름에 맡겨두는 농업 방식은 빠른 시일내에 더 많은 이익을 원하는 집단에게는 방해꾼일 뿐이다. 책을 통해 말만 번지르르했던 녹색혁명이나 유전공학의 폐해를 보게 된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부아가 치민다. 그들만의 잔치에 노예처럼 먹을 걸 대주는 집단이 바로 개발도상국이었던 것이다. 철저한 실험대상이 되어 결국엔 남는게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다. 예전 농업, 다시 말해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전의 농업이 수행하던 다양한 기능을 다시 부활시켜야 한다(-272쪽) 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기아와 빈곤에서 벗어났음은 물론 그 주변환경이나 토양까지 되살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잘먹고 잘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는데 식량은 왜 사라지는 것일까? 이 책은 자멸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인류를 향한 경고장이다. 하긴 이 책말고도 수도없이 경고장은 날아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를 이끌어 가고 있는 정치는 그것을 외면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식량이 사라지고 있는 그 아픈 속내를 들여다보게 된다. 이미 진행된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온난화라는 현상이 생겨났다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쪽에서는 비가 너무 오지않아 사막화되어 가고 있는데 저쪽에서는 비가 너무 많이 내려 홍수가 난다. 그럼으로 인해 인류를 먹여살려야 할 비옥한 땅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비옥한 땅이 사라진다는 것은 식량 생산면적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이미 한계에 도달한 나라도 있다. 거기다가 물전쟁도 예고되었다. 사막화되어가는 토지를 살리기 위해 끝없이 지하수를 퍼올렸다. 물 비축량이 현저하게 줄어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이 없는 곳에서 작물은 자라지 않는다. 인구는 늘어나는데 먹을 식량은 점점 적게 생산되는 것이다. 인공관개시설을 갖추고 좀 더 생산력을 높이려 애를 쓰지만 오히려 작물의 품종만 줄어 들었을 뿐이었다. 세계를 부양하는 식물의 종이 겨우 15가지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것마져도 자세히 살펴보면 세계 식량의 절반을 책임지는 게 쌀과 밀뿐이라고 한다. 쌀이 26%, 밀이 23%다. 거기에 겨우 9%라는 작은 비율로 옥수수와 감자가 돕고 있을 뿐이다. 미국의 에너지정책에 의해 그 옥수수마져도 식량으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육식위주로 변해가고 있는 식습관도 한몫 거든다. 1Kg의 고기를 얻기 위해 9Kg의 곡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고기를 포기하고 빵으로 대체한다면 엄청난 양의 식량이 될 수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또한번 부아가 치민다. 우리는 왜 우리의 좋은 식습관을 버리고 서양식의 구조를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  그 안에 숨겨진 것은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따라가기에만 급급한 우리의 모습... 마치도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듯이 흉내내기에 바쁘다. 콘크리트나 시멘트에 깔려 흙이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무더운 여름이면 열대야에 시달리는 건 둘째치고, 아동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성인병의 증세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다시한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하고 있을테지만... 육식으로 인해 세계의 기아율은 높아만 간다. 그리고 세계의 곡물 시장을 텅비게 한다. 힘들게 농사지어 생겨난 곡물을 돼지나 소, 닭에게 퍼먹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육식의 욕구를 채우지 못해 단순히 고기만을 얻기 위한 가축을 비정상적으로 사육하게 되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렇게 해서 인류가 얻은 것은 광우병과 같은 가축병이었다. 인류가 먹을 수 없는 소의 부분들이 다시 소를 먹이기 위한 사료가 되고, 양어장에서는 생선가루로 만든 사료를 먹이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가 소를 먹고, 물고기가 물고기를 먹는 형국이다. 어디 가축뿐일까? 유전공학이라는 포장으로 다시 태어나 재배되어지는 식물조차도 탄저병과 같은 병으로 모두 시들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인구는 12년마다 10억명씩 증가한다. 매일 22만명의 신생아가 세상의 빛을 본다. 1년이면 약 8,000만 명이다. (-148쪽)  우리나라의 인구수보다 두 배 가까이되는 사람들이 1년마다 태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1초가 지날때마다 세계가 먹여 살려야 할 인구가 세 명씩 늘어난다는 말은 두렵기까지 하다. 중국과 인도 다음으로 먹여 살려야 할 입이 세번째로 많은 나라가 미국이다. 그 많은 사람이 무엇을 먹으며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걱정하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니 인류에게 무슨 핑크빛 미래가 있겠는가 말이다.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국제기구를 설립한다한들 소수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한 그것은 탁상공론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해결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흙 한줌에는 미세한 단세포동물에서 지렁이에 이르기까지 약 50억의 생물이 삽니다. 거의 지구전체에 사는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생물이 사는 셈이지요. 바로 이들이 하는 일이 식량생산에 기초가 됩니다." (-81쪽) 개발만이 능사는 아닌 것이다. 산업화만이 인류가 살 수 있는 길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외면하는 진실은 너무나도 많다. 지치지않고 발표되는 저들만의 시나리오에 의해 정책의 희생물이 되는 것은 너무나도 많다. '정치때문에'라고 말한다는 것이 참으로 서글픈 느낌을 준다. 세계의 식량 위기는 21세기의 정치문제이자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도전이다. 또한 이는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시간은 우리에게 불리하게 흐르고 있다.(-351쪽) 이 마지막 말이 많은 사람에게 경각심을 일으킬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아이비생각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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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에서 빈둥거리다 길을 찾다 - 명문가 고택 편 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 시리즈 3
이용재.이화영 지음 / 도미노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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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겠다. 저런 곳을 맘껏 다닐 수 있어서.. 그런데 마냥 가서 보니 좋겠다는 말은 아니다. 알고 보니 좋겠다는 말이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나같은 초보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아니 볼 수 없는 많은 것을 글쓴이는 볼 수 있어 좋겠다는 말이다. 뭐, 가서 보고 느껴지는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말도 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만큼의 관심과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또한 글쓴이처럼 건축을 공부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부러울 뿐이다. 글쓴이의 책을 처음 본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보면 기분 나쁠수도 있는 반토막 말투가 재미있다. 필요없는 사족을 붙이지 않아 내게는 더 깔끔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한껏 부풀린 위엄과 격식이 보이지 않아 오히려 더 정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책은 어려워야 맛이 날까? 그렇지는 않다. 특히나 이렇게 골치아픈(?)  문화를 찾아다니다보면 우선 재미있게 풀이해주는 해설사의 말이 더 귀에 잘 들어온다. 그래서 재미있다. 어쩌면 그렇게 풀이를 잘 해주는지 눈물날 만큼(?) 고맙기까지 하다.

예를 들자면 이런거다. 7량가구 곱은자 집... 이 말, 나는 여기서 처음 들었다. (처음 듣는 말이 이 말뿐일까마는..) 그런데 글쓴이도 낯설다고 의뭉스럽게 말한다. 낯선 말이라고 하면서도 자상하게 풀이해주는 그 대목에 문화재 사랑이나 독자 사랑을 숨겨놓은 듯 하다.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대들보가 7개라는 거다. 천장의 높이는 마치 대웅전을 보는 듯 아득하고. 엄청난 규모의 한옥이라고 보면 된다. 곱은자집은 ㄴ자 집 말하는 거고. (-216쪽)  답사를 다니면서 가장 불만스러웠던 점이기도 하다. 도통 알 수 없는 전문용어만 빼곡하니 읽다보면 은근 화가 날 때도 있다. 이렇게 쉽게 풀이해 알려주면 좀 좋아?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세종께서 한글을 만드실 때 최만리가 반대했던 이유중의 하나, 백성이 글을 알고 깨우치게 되면 부리기만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그런 모양이다. 아직도 관료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억지인가?

사실 고택이나 종택을 찾아가봐야 보통 사람들이 제대로 그 뜻을 알기는 쉽지 않다. 공포가 어떻고 도리가 어떻고 반자가 어떻고 해봐야 머리만 아프니 가장 기본적으로 집의 구조나 살펴볼 뿐이다. 음, ㅁ자형 주택이군! 여기가 안채, 여기가 사랑채, 여기가 행랑채, 그리고 집 뒤로 돌아가 음, 여기는 사당이군! 한다. 물론 많이 아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씩 배우기도 하지만. 그러니 그런 곳을 찾아갈 요량이면 그 집에 살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던 사람인지, 가족이나 주변인물로는 누가 있는지 대충이라도 알고 가는게 많은 도움이 된다. 나만 하더라도 집을 지은 형식에 대해서 백날 봐봐야 머리만 아프니 그 집을 통해 그냥 역사의 흐름을 배우고 온다. 가능하다면 문화해설사와 동행하는 게 좋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알고 가면 문화해설사와 대화도 나눌 수 있어 꽉찬 시간으로 만들수 있다는 말이다. 뻘쭘하게 덜렁 집 한채만 보고 오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재미있다. 글쓴이같은 해설사를 만난다면 그날의 답사는 대박이다. (그게 어렵다면 그냥 이 책 한 권 들고가도 괜찮을만큼 글쓴이의 해설이 좋다는 말도 될 듯...)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그런 집들은 대부분 볼 수 있는 영역과 볼 수 없는 영역이 정해져 있다. 현재도 후손이 살고 있는 살림채쪽은 들여다보지 않는게 예의라는 말이다. 글쓴이와 같이 공식적(?)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곁들인 사진이 재미있다. 글 반, 사진 반인데 굳이 작은 것까지 찾아다니며 들여다 보지는 않는다. 주인공과 발을 맞추려하지 않고 주변을 맴돈다. 보여주는 사진을 통해 또한번의 해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글쓴이의 해설이 더 깊이 각인되는 듯 하다. 그저 사진기만 들이댄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야말로 바라보기다. 문화재 바라보기가 아니라 그 안에서 흐르고 있는 시간을 보라고 말하는 듯 하다. 마치도 글쓴이가 그 안에서 탐방객을 맞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독특하다. 그런데 그런 독특함에 거부감이 생기지 않는 이유가 뭘까? 이 방에서 저 방을 보고, 대청마루에서 마당을 내려다 본다. 가끔씩은 훔쳐보기도 한다. 멀리보기가 관건이다. 마치 먼 곳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가까이 보아도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긴 눈앞으로 가까이 끌어당겨봐야 덜렁 서 있는 집 한 채뿐이니 멀리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까이보는 건 글쓴이처럼 건축을 전공한 사람들의 몫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찾아간 곳과 연관되는 사진들이 많이 보인다.

역시 많은 걸 다시 배우고 새롭게 알게 된다. 아하, 이제 알았다! 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 많다. 언젠가 보았던 굴뚝위의 뒤집어진 항아리가 연가였다는 걸 알게 된다. 둥주리 양자라는 말이 새의 둥지처럼 처자식을 포함한 일가족 전체를 통째로 들여왔다는 뜻이라는 걸( 세상에나, 이렇게 들이는 양자도 있었구나!), 전주 학인당 편에서 창을 낸 합각을 처음 보았고, 전주 한옥마을이 국제 슬로시티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기가 막히게도 문화재청 1년 예산이 4천억인데 부자동네 강남구의 1년 예산도 4천억이란다.  명재고택 안마당의 장독이 800개였다고? 그래서 엄청 났었군! 나같은 아줌마가 엄청 좋아할 명재선생의 유언이 끝내준다. "제사상에 떡을 올려 낭비하지 말 것이며, 일거리가 많은 음식과 기름이 들어가는 전도 올리지 마라".. 근데 정말 그렇게 했을까?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을까? 문화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고 하긴 했었다. 나도 저 집안 며느리나 될 팔자였다면, 싶다. 글쓴이가 상주 우복종가를 통해 말해주던 '진양三姓'중의 하나니까 ^_____^*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는 진주姜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었다. 선비집안이라고. 어렸을 적에 진주河씨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많이 들었는데 진주鄭씨에 대해서는 많이 못들어 본 듯 하다. 글쓴이에게 감사!

고택기행을 마무리하며,를 읽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했던건지 그제사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 우리의 뿌리를 찾음으로써 길을 찾는다- 는 말을 보면서 몇 해전에 아들과 친정엄마를 모시고 찾았던 시흥 관곡지가 떠올랐다. 姜씨집으로 시집을 와 팔자에 없는 종가집 며느리가 되어버린 엄마는 그곳을 관리한다는 후손의 집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거기서 만난 할머니와 姜씨네 얘기를 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셨던 거다. 그런데 뿌리를 찾는다는 거, 그거 다음 세대에서도 통할까? 그걸 가르쳐주고 알려주는 게 우리 세대가 할 일이라면 조상이 얼마나 높은 관직에 올랐었는가, 몇 명을 배출했는가를 따지는 허울좋은 겉치레보다 그 정신만큼은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책 속에서도 말하고 있는 현실이 그다지 서글픈 일은 아니다. "학봉 종손이면 회사 생활때 대접해 주지요?" (-그래야 하는거야? 그래야 한다면 왜 그래야 하는거지?) "사람들이 학봉이 누군지도 모름"... 당연하다. 자기 씨는 서얼이라고 홀대하면서 자기 씨도 아닌 아이를 내세워 대를 잇게 했다는 말같지도 않은 양자제도만 보아도 예라는 게 얼마나 허울좋은 이름이었는지를 따져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대표 예학자였다는 사계, 그가 말했던 '예'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왜곡된 것들이 너무 많은 까닭이다. 거기 서린 기의 움직임을 보고자 한다면 우선 알아야 한다. 글쓴이의 말처럼 보고나서 아는 것보다는 알고 난 뒤에 보아야 더 큰 느낌이 온다고 나는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 고매한 '깨달음'은 차치하고라도.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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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역습 - 오만한 지식 사용이 초래하는 재앙에 대한 경고
웬델 베리 지음, 안진이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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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지식 사용이 초래하는 재앙에 대한 경고... 오만한 지식 사용이라는 소제목이 무섭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건 정보를 말하는 것일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이렇다 할 정보가 너무나도 많이 흘러다닌다. 정체된 정보가 아니라 이곳저곳으로 마구 흘러다닌다는 말이다. 너무나도 확연하게 드러나는 인터넷의 그림자에 밟혀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없어져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다. 만들어진 것들이나 만들어낸 것들에 의해 우리조차 만들어지고 있는 세상이 바로 지금의 세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주 오래전 빅브라더를 예고했던 책이 있었다. 빅브라더의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어디를 가도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를 다시한번 살펴보라. 틀린 말은 아니다. 일전에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었었는데 그 책도 인터넷이 우리의 뇌구조를 바꾸고 있다는 소제목을 달고 있었다. 디지털 기기에 종속되어가는 우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책이었다. 또한 종속되기를 희망하며 자신을 놓아버리는 우를 범하게 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가슴 아픈 질문을 남겨놓기도 했던 내용이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섬뜩할 정도로 공감할 수 밖에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책이 또한번 나를 섬뜩하게 한다.

'이 글은 우리 모두 겸손해지자는 호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마주쳤던 한 문장이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현재 그의 직업은 농부다. 지금까지 40년째 전통적인 농법을 고집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 소통보다 대화를 더 좋아한다는 그의 말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중심에서 그 주변으로만 일방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소통보다 양방향으로 이루어지는 대화를 더 좋아한다는 그의 말에 백퍼센트 공감하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우리는 그 소통만을 외쳐대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화로부터 오는 예견할 수 없는 결과라거나 서로의 말을 통해 오고갈 수 있는 감정의 변화를 참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정해진 원칙에 끼워맞추기를 하거나 끼워넣기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일수도 있을 게다.  '정보'라는 말의 참뜻은 저버리고 무작위로 축적된 사실들을 가리킬 때만 쓴다는 글쓴이의 말처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어떤 것들에만 지나치게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틀림'과 '다름'의 의미에 대해 다시한번 되새겨보게 된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대화의 근본적인 속성이 아닐까 하는... 글쓴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도 소중하게 다가온다.

바쁜 세상에서 조금은 여유롭게 살기, 복잡한 세상에서 단순하게 혹은 단순한 것을 복잡한 것으로, 채우기보다는 비우는 삶을 위하여, 자꾸만 쌓기보다는 오히려 조금씩 내려놓기 등등은 지금의 세상을 거꾸로 살아보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외치는 짧은 구호다. 유행가도 있다. 전화도 없고 텔레비젼도 없고 컴퓨터도 없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이토록 바쁜 세상에서, 이토록이나 복잡하거나 혹은 단순한 세상에서 왜 거꾸로 가자고 외치는 것일까?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공통적으로 따라오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자연'이다. 자연주의자만이 자연을 외칠 수 있는 건 아니다. 뜻있는 사람들은 이미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살며 자신만의 풍요로움을 만끽하기도 한다. 그들은 결코 자연을 만들며 살아가지 않는다. 자연이 주는 말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앞에 자신을 내려놓았을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있는 그대로의 흐름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순응하며 살아가는 지역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글쓴이의 말을 경청해야만 한다. 자꾸만 소외되어가는 그들의 존재가치를 인정할 때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풍요가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꿰어맞추는 퍼즐과도 같은게 우리가 지금 만들어가고 있는 세상이 아닐까?

'돌봄'.. 이 말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산업화 시대를 살아가면서 아파트 한쪽에 삐죽 심어놓은 나무 한그루가 우리에게 위안을 가져다 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철담장 아래에서 이름조차 불리워지지 못하는 키작은 꽃들의 존재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그냥 있던 자리에서 살고 싶다고 소리낼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끌려온 그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줄 수 있는가도 한번 물어봐야 한다. 글쓴이가 말하는 '돌봄'의 대상은 흙이고, 풀이고, 나무다. 우리가 그들을 외면하면 할수록 우리의 모습도 파괴되어질 거라는 경고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힘없고 작은 존재의 가치에 대해, 또한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말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가슴 깊숙히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왜곡된 정보를 내세운 채 일방적인 소통만을 외쳐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들어주고', '인정해주는' 그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다. 뻔한 이야기일거라고 편협된 생각을 하며 펼쳐들었던 책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실재적으로 자신의 삶에서 그 '돌봄'을 실천하기 위해 힘과 마음을 아끼지 않는 글쓴이의 애타는 마음을 보게 되었던 시간이었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 소중하게 다가왔다.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안하는 것이 더 많은 세상이다. 그러나 개인의 이익보다는 모두를 위하는 길에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이비생각

만약 우리가 파괴를 계속하기로 결심한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는 아닐 것이다. 현재 진행되는 파괴는 꼭 필요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순응을 통해 그것을 꼭 필요한 일로 만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193쪽)

문제 : 우리는 타협하지 말아야 할, 아니 타협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타협하는 습관에 젖어 있다. 정치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자연을 파괴하는 경제를 자유와 이윤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하는 반대파 정치인들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의 일부분만 파괴하거나 파괴의 정도를 조금씩 줄이는 안에 동의하는 식으로 타협한다. 말하자면 돼지를 너무 사랑해서 한 번에 다 잡아먹지 못하고 세 발 달린 돼지로 남겨놓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타협에는 명확한 논리가 있으며, 그 논리는 매우 치명적이다. 자연의 일부를 파괴하는 경제 운영을 지속한다면 언젠가 우리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해결책 : 첫째,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장소를 존중하자. 시골을 식민지처럼 생각하지 말자. 우리는 자연보호와 훌륭한 노동의 경제적 가치에 다시금 눈을 돌려야 한다. 둘째, '산업을 유치해서' 경제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자. 정부는 하나같이 세금 감면 같은 방법으로 주민의 세금을 쏟아부어 외부의 대기업을 유치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지역 생산물의 가치를 높이고, 외부 시장을 찾기 전에 지역에서 판매하는 방식으로 지역과 공동체의 정제를 활성화해야 한다. 셋째, 규모의 문제에 정직하게 대처하자. 뭐든지 규모가 크면 매력적이고 극적인 성격을 띤다. 그러나 규모가 클수록 탐욕과 무관심과 위험도 커지기 마련이다. 큰 규모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토지를 구석구석 돌보는 일에 절대적인 우선순위를 부여하자. 토지가 파괴된다거나 대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파괴될 때는 절대 타협하지 말자. (- 199쪽~201쪽)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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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히스토리아 1 - 불멸의 소년과 떠나는 역사 시간여행 피터 히스토리아
교육공동체 나다 지음, 송동근 그림 / 북인더갭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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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역사가 무엇일까? 흔한 말로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를 역사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지나간 것은 모두 역사가 되는 것일까?  이 책속에서 명쾌하게 답을 내려준다. 바로 내가 역사라고. 요즘 아이들 교과서를 펴보면 역사에 대한 의미가 가장 먼저 나온다.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로 나뉘는데 단순히 과거에 벌어진 일을 사실로서의 역사로 보며, 역사가에 의해 기록되어진 사실을 기록으로서의 역사라고 구분지어놓았다. 그런데 어느쪽이 진정한 역사일까? 전자는 객관적이지만 후자는 주관적인 의미를 보인다. 물론 두가지를 떼어내서 역사를 논할 수는 없겠지만 이미 주관적인 의미가 포함되어진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왠지 한걸음 물러서서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갖는 힘은 너무나도 크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라는 의미도 아마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책을 살펴보다가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하게 된다. 서양과 동양이 각기 다르게 역사의 의미를 말하고 있다는 것.. '찾아서 안다'라는 그리스어에서 연유했다는 'history'라는 서양의 의미보다는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정확히 기록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린 동양의 의미가 선뜻 다가온다. 

만화로 보는 세계사라는 말에 너무 쉽게 생각했다. 처음 책장을 넘기면서 이건 뭐지? 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늙지않는 소년 피터와 함께 떠나는 역사여행은 재미있다기보다는 흥미로웠다. 피터를 따라 들어갔던 역사의 매순간속에 너무나도 많은 것이 녹아 있었던 거다. 그저 그냥 세계사의 한페이지려니 생각하고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순간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각 장마다  '피터의 세계사 비밀수첩'이라는 설명글을 실어놓았는데 그게 또 만만치가 않았다. 어느정도의 미끼를 만화로 던졌다면 진짜 역사 여행은 바로 거기 '피터의 세계사 비밀수첩'이라는 설명글속에 있었다는 말이다. 앞서 보여주었던 만화는 한가지의 예에 불과했을 뿐이다. 거기서 이 책이 나오게 된 동기를 가늠해보게 된다. 생각거리를 던져 줄 수 있다는 것, 물론 중요하다. 한가지의 사실을 앞에 두고 우리가 유추하거나 생각해 낼 수 있는 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어느정도 역사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 아니라면 약간은 딱딱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생각에 답변이라도 하듯이  만화를 통해 들려주었던 "대답을 찾는 건 머리가 아니야. 그건 내 온몸에 새겨지는 거야." 라는 한마디가 큰 울림을 전해준다. 역사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를 다시한번 돌아보게 해주는 말일테다.

파란 하늘을 보며 새로운 세상을 동경하던 소년 페테루가 어느날 자유를 잃게 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어진다. 그리고 굵직굵직한 세계사의 순간들이 등장한다. 그 한순간으로 인해 변해갈 수 밖에 없었던 인류역사의 흐름속에서 우리는 왜 그렇게 살아야만 했는가를 되묻고 있다.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찾아오는 불합리한 것들과 빈곤, 시대별로 나타나는 남녀간의 불평등이라거나 인종차별에 관한 아픔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책의 전개방식을 보면서 나는 문득 요즘 아이들 머리 쥐나게 한다는 논술을 떠올렸다. 이 책 역시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거였나? 그런 의도였다면 아이들에게 꽤나 도움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이 안고가는 한가지 주제는 인권인 듯 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최소한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평가, 해석하는 일부의 모습을 바라보는 분노어린 시선을 보게 된다. 역사는 승리하는 자의 몫이라는 말에 강하게 거부하는 몸짓을 보게 된다. 영웅들만, 힘있는 사람들만 역사를 만드는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history'를 남자들만의 이야기라고 거부하는 여학생에게 'herstory'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장면이 재치있다.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다는 산업혁명의 폐해라는 말이 가슴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다. 많은 '발전'이 과연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무엇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온세상이 전쟁터인 것만은 분명하다. 자연과 함께 살아왔던 것들이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발전'에 의해 사라져가고 있다. 남겨두고 기억해야 할 것들도 '개발'이라는 이름아래 무참히 짓밟히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미 우리는 그런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평화와 평등이라는 말은 어쩌면 벌써 우리 곁에서 떠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게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는 현실이 나중에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한다는 사실이다. 미디어의 발전이 모든 인간을 전쟁에 끌어들였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국가와 민족을 지킨다는 명목을 앞세워 아무리 숨기려해도 전쟁의 속성이 이익다툼이라는 것을 알 사람은 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복되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부정할 수가 없다. 교과서적 주제를 벗어나 영웅과 패권이 아닌 평화와 평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책의 소개글을 보게 된다. 우리의 선대가 만든 역사의 근본적인 문제점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욕심을 보인다. 하지만 시대에 맞춰 변하는 것이 인류의 모습이었다는 건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이비생각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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