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아랑전
조선희 지음, 아이완 그림 / 노블마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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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읽었던 전래동화는 재미있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건 어른이 되어 읽어도 재미있다는 거다. 그 내용의 황당함에 코웃음을 치고 말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상황들을 보면서도 그다지 싫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실 전래동화는 권선징악의 구도다. 모진 풍파를 헤쳐가며 살아가야하는 어른들의 세계는 그 단순한 구도가 먹히지 않는다. 착하게 살면 나중에 복을 받는다? 그런 결말을 보장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오죽했으면 어린시절에 나쁜 역할을 맡았던 놀부와 팥쥐같은 캐릭터가 오히려 삶을 살아가는데는 더 긍정적이었다는 말이 나올까? 같은 이야기라해도 순수하게 받아 들였던 어린 날의 마음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처절한(?) 어른의 세계도 저렇게 권선징악의 구도로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숨겨두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그래서일것이다. 여전히 고전에 이끌리는 이유는.

 

모던보이나 모던걸과 같은 수식어처럼 새롭게 옷을 갈아입은 전래동화의 모습은 이채로웠다. 그냥 뒤집기정도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단순하게 어떤 반전만을 기대했다는 것이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하나의 동기가 되어준 우리의 고전은 옛맛과 현대의 맛이 어울려 묘한 느낌을 내게 전해주었다. 아하,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는거였구나 싶었다. 여기에 인용된 전래동화는 금도끼 은도끼, 심청전, 할미꽃전설, 토끼전, 북두칠성, 아랑전이다. 제목만 들어도 다 알 수 있는 어린시절의 향수다. 그런데 작가는 그 향수속으로 빠져들게 하지 않는다. 이것이 네 도끼냐? 하고 묻는 연못속의 신령님 물음에 제 도끼는 쇠도끼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건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하지만 그 도끼를 통해 우리가 한번 더 생각해야 할 메세지는 분명히 달랐다.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있는 이 싯점에서 인간의 수명조차 태어날 때 유효기간이 정해진다는 설정이 오싹하게(?) 느껴졌던 북두칠성은 오래전에 보았던 어떤 영화를 떠올리게 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의 복제품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시설을 탈출하는 그 영화는 보는 내내 껄끄러웠었다. 인간의 오만이 어쩌면 저런 세상을 만들어낼지도 모르겠구나 싶어서. 하지만 우리의 전래동화가 어떤 것인가? 단순히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별을 노래하고 함께 나눈 정을 그리워하는 마지막 설정은 못내 안타까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동화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슬프다. 그 슬픔을 '아름답다'는 틀에 가두어 그것을 '바보같다'고 느낄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전혀 아름답지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찾는 동화는 여전히 아름답다. 한때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림 형제의 동화는 원작과 다르다는 말과 함께 무서운 동화, 잔혹동화라는 말이 떠돌았던 적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교육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만들어진 것'에만 촛점을 맞춘 탓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동화도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다. 옛날이야기라는 것이 굳이 윤리적이고 교육적이어야만 한다는 규칙은 없는 까닭이다. 옛날 옛날에~~~ 라는 말 뒤에는 어떤 내용이 따라붙어도 괜찮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은 온전히 듣는 사람의 몫이다. 행복하고 즐거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무섭고 잔인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기대하시라, 짜자잔~~ 하고 나타날 그 어떤 것에 대한 설레임은 누구도 만들어낼 수 없는 나만의 것이기에.

 

한마디로 말해 <모던 아랑전>은 은근히 오싹하다. 군데군데 이야기의 느낌을 강하게 전해주는 공포스런 분위기의 그림도 단단히 제 몫을 한다. 하도 강한 것들이 많이 나오는 세상이다보니 그 그림을 보고 겨우 이런걸 보고? 라고 말할런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새로웠다. 작가의 전작이라는 <모던 팥쥐전>도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다. 어떻게 그렸을지 궁금하다. 아울러 그림형제의 잔혹동화 역시 그 본모습이 궁금해진다. 편협된 나의 개념에 한방 먹인 책이다. 아우를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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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테이키 作庭記 - 일본 정원의 미학
다치바나노 도시쓰나 지음, 김승윤 옮김, 다케이 지로 주해 / 연암서가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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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天圓地方의 원리를 잘 따르고 있다는 우리의 전통정원양식속에는 陰陽의 조화도 숨겨져 있어 가만히 살펴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방향까지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나무 한그루 심는 것조차도 많은 것을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의 전통정원을 살펴보면 가장 중요한 게 자연과의 어울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과 동화되어 그 안에서 살기를 바랐던 선조들의 지혜는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버리고 없지만 그 뜻만큼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원을 뽑으라하면 단연 창덕궁 후원일터다. ( 비원이라는 말을 굳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해도 왠만하면 후원으로 불러주자..) 그 창덕궁 후원이 바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았다는 최대의 장점을 제대로 살렸다는 것인데 한번 가보면 왜 그런 수식어가 붙었는지 대충은 짐작하게 된다. 일부러 만들지 않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자신의 정원인양 그렇게 품어안은 모습이 보기에도 흐뭇해진다. 그런 반면 슬그머니 옛사람들은 참 욕심이 많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렇다하게 울타리를 치지 않았으면서도 나만의 정원이라고 뒷산을 품어 안았으니 말이다. 거기에서 피고지는 온갖 꽃과 나무를 제 것인양 보고 즐겼으니 그만한 호사가 따로 없다.

 

답사를 다니다보면 왕년에 한가락 했다는 상류층의 옛집에서 어김없이 꾸며진 정원을 만나게 된다. 어떤 정원이 제대로 된 정원인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들어섰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곳이 있다. 풍류를 제대로 즐길 줄 알았다던 옛사람들의 취향이 그대로 들어나는 정원도 있다. 오래전 외암리 민속마을을 찾았을 때 송화댁과 건재고택의 색다른 느낌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마을자체도 그랬지만 집집마다 연결되어진 물길이 이채로웠다. 송화댁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그 솔향기에 흠뻑 취했을 때 집안의 마당을 가로지르는 작은 시내를 보고 얼마나 신기해했는지.... 우리의 전통정원 양식인 天圓地方의 원리를 따르고 있지 않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 듯 하지만 건재고택의 정원은 일단은 그 꾸밈이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어떤 형태를 취했는지도 나중에야 알았다. 하지만 어떠랴 싶었다. 그저 좋았으니까. 그만큼 정원이라는 의미는 우리에게 편안함과 포근함을 함께 느끼게 해주는 곳이 아닌가 싶다.

 

이 책 <사쿠테이키>는 바로 그런 정원을 만드는 방법을 기록해 둔 책이다. 作庭記さく헤이안시대의 일부 귀족층을 위해 만들어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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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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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고 싶다는 딸때문에 속앓이를 하던 친구가 있었다. 남들 놀 때 놀고 남들 일할 때 일하는 그런 직장에 다니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종목이 써비스업이긴 하지만 외국계 회사로 내가 볼 때는 괜찮은 회사였는데 단지 그 이유때문이라고 하니 친구가 속앓이를 할 만했다. 게다가 회사에서 인정받는 직원중의 하나라는데... 도움을 요청하기에 만나서 한참을 설득아닌 설득을 했었다. 정 그렇다면 사직서는 내지 말고 새벽에 학원을 다니면서 자신을 한번 시험해보는 건 어떻겠느냐는 나의 말에 그러면 일단 그렇게 해보겠노라는 확답을 받아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그녀석 지금은 그 회사에서 잘나간다. 승진도 했고 어느정도는 시간도 자신에게 맞출 수 있을만큼의 여유도 생겼다. 지금은 모녀가 그 때 말려줘서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한다. 그만큼 이 세상을 헤쳐나간다는 게 그리 녹녹치 않다는 말일게다.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판단과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내 몫이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누구나에게 존재한다. 내가 그 때 저 길로 갔더라면... 내가 그 때 저것을 선택했더라면... 그게 사람일테다.없는 선택과 후회가 충돌하며 시간을 꾸며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TV에서 자주 보이는 광고카피가 생각난다. 더럽고 치사하다고 사표내야겠다는 직장인과 취직을 해야 사표를 쓰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냐고 말하는 백수, 뒹굴거리는 백수를 보며 좋겠다고 부러워하는 군인, 그 군인들을 바라보며 저 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직장인. 거기다 하나 더 보탠다면 커가는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을 그린 광고가 그렇다. 누구나 그 상황에 닥쳐보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단지 그럴 것이다,라는 추측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동안 알 수없는 울림이 내게 전해져왔다. 어느날 갑자기 백수가 되어버린 남자의 시간은 오롯한 아픔이다. 그 아픔이 주인공 영수만 느낄 수 있는 아픔이 아니라 지금 이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모두의 아픔일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무슨 상을 수상했는지, 어디에 응모되어 당선된 작품인지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당선되었다는 그 자체는 이미 그만큼의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뜻도 될테니까. 그래서 보기좋은(?) 앞의 수식어는 떼어내 버리고 그냥 내용에만 관심이 간다고 하면 삐딱한 시선일까? <굿바이 동물원>은 정말 기대이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견뎌내고 있는 아픔을, 이미 곪아버린 상처를 숨기지 않는다. 비켜가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느닷없이 백수가 되어버린 남편으로 인해 마트 계산원이 되어 출근하던 아내는 말한다. 그렇게 놀거야? 마늘이라도 까지? 그 날 이후로 우리의 주인공은 마늘까기, 곰인형눈알 붙이기, 바비인형 속눈썹 붙이기의 달인이 되어간다. 그런데 묘하다. 곰인형눈알을 본드로 붙여한다는 그 설정이. 본드 흡입으로 인한 환상의 세계는 그에게 색다른 세상을 보게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서 무너진다면 우리의 주인공이 아니다. 2대 1의 경쟁(?)을 뚫고 다시 얻게 된 직장. 그 직장이 또 묘하다. 단순히 동물원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진짜같은 가짜가 되는 일이 그에게는 버겁다. 동물의 탈을 쓰고 동물원의 우리속에서 동물처럼 행동하며 관람객이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는다. 그 동물원이라는 배경이 나를 아프게 한다. 그 동물원에 동물로 취직된 사람들 또한 바라볼수록 아프다. 세상이 나를 구경하는 것인지, 내가 세상을 구경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책을 읽다가 잠시 책표지의 남자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쓸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저 표정속에서 내가 눈치챌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울고 싶으나 차마 울지 못하는 고릴라 탈속의 저 남자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의욕이 앞서 바나나를 너무 먹어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것도, 못된 관람객에게 쿡쿡 찔림을 당해도, 동물앞이라고 부끄럼없이 끈적한 장면을 연출하는 남녀를 바라보는 것도 그에게는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렸다. 철장 안에서나 철장 밖에서나 모두가 관람객의 입장일 뿐이라는 게 어쩌면 우리의 현실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모두가 바라보는 입장으로만 살아가니 제 아픔을 모르고 살아가는 거라고....

 

책을 다 읽었는데도 책장을 덮고 싶지 않았다. 책장을 덮으면 책표지의 남자와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게 왠지 껄끄러웠다. 다시 마주치면 나도 그 동물원의 철장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 할 것만 같았다. 같이 느낄 수 없는 그 아픔에 공연스레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괜찮다고 한줄기 빛처럼 나를 찾아왔던 건 마지막 장면이었다. 임신한 아내에게 다가가 철장 밖으로 손을 내밀어 고릴라를 만져보고 싶다는 아내의 평생소원을 들어주었다는 것, 그리하여 아내가 자신의 손을 잡으면서 활짝 웃었다는 것. 희망의 빛이라는 건 순간일지라도 설렘을 안겨준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필요한 것일까?  어설픈 첫인사와 함께 영수에게 찾아왔던 새로운 인연들. 그 관계속에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정이 있었다. 저마다의 아픈 사연을 안고 동물의 탈을 쓰게 되었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꿈을 놓지않는 그들만의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격려와 다독임이 있어 좋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마음의 소통이 거기에 있었다는 말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람답게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그럼 동물처럼 사냐? 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한다면 과연 몇이나 될까?  괜찮았다. 오랜만에 멋진 소설을 읽었다. 다 읽고도 자꾸만 바라보게 된다. 누군가에게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진다. 어설픈 위로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다.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진실한 마음 나누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행복한 인생 통장' 까지도 깨면서 서로의 마음을 믿어준 영수와 그 아내처럼. 그런데 내내 궁금한 존재가 하나 있다. 그 돼지엄마는 누구였을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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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향기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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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통더위라는 말이 실감나는 여름이다. 이런 여름엔 뭔가 시원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게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서운 이야기에 빠져들기도 하고, 무서운 영화를 찾아 보기도 한다. 가끔은 더위를 잊을 수 있을만큼의 집중력과 재미, 스릴을 느끼게 해주는 추리소설에 빠져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시원함이 묻어 있다. 수박향기... 에쿠니 가오리라는 낯설지 않은 이름과 함께 찾아 온 이 책, 사실 단편집이라는 것 때문에 잠시 망설이기도 했지만 작가의 이름이 오랜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선택하는데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흔히들 감성적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문장속에 나의 이 무더운 여름을 녹여낼 수 있을까? 욕심을 부려보기로 했다는 말도 되겠다.

 

한여름 방학때면 내려갔던 시골 할머니 집에서 저녁을 먹고 밤이면 모깃불을 피워놓은 채 툇마루에 모여 앉아 수박을 먹으며 할머니께 옛날이야기 해달라고 조르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러면 할머니는 할 듯 안할 듯 망설이다가 은근 분위기를 잡으며 말씀을 시작하신다. 흠흠, 옛날에 말이다, 들판에 커다란 이층집이 있었는데 거기에 엄마와 딸이 살았단다. 어느날 엄마가 빨래를 널고 있었는데 아장 아장 걸어다니던 아이가 그만 베란다 난간에 올라가 떨어질 것 같았대. 깜짝 놀란 엄마가 냉큼 뛰어가서는 아이를 잡으려고 했는데 그만 아이가 떨어져 죽고 말았지.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이들은 수박 먹는 것도 잊은 채 그 다음이 어떻게 되는지 귀를 쫑긋 세운다. 그리고 삼년 뒤에 두번째 아이가 베란다에 올라가 놀다가 또다시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만거야. 엄마는 예전 생각이 나서 얼른 뛰어가 아이를 잡았는데.... 잡았는데?  잡았는데.... 어떻게 되었나요? 눈을 동그랗게 뜬 아이들에게 할머니는 아주 느리게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이가 엄마를 보면서 그랬다는구나... 이쯤에서 침넘어가는 소리, 꿀꺽!  왠지 으스스한 할머니의 목소리.. 엄마, 그 때 왜 나를 밀었어?  한동안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무서운 이야기인지 재미있는 이야기인지 잠시 어리둥절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는 말이다. 열 한가지의 짧은 이야기들이 모두 비밀이야기다. 그런데 그렇게 특별한 비밀은 아닌 것 같다. 그저 누구나에게 한번쯤은 있었으나 굳이 말하지 않았던 그런 소소한 비밀이라면 딱 맞겠다. 첫번째 이야기 '수박향기'를 읽으면서 문득 떠올랐던 게 앞에서 말한 옛날 이야기다. 그때의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비밀이라는 것도 따지고보면 마음 깊은곳에 묻어둔 작은 상처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주 오래된 상처 하나쯤 끄집어내어 보듬어 줄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괜찮을 것 같다.

 

작가의 이름만으로 책에 대한 흥미도가 높아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낚인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그런 순간말이다. 그런데 대체로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작가의 경우가 거기에 해당된다. 그렇게 낚이는(?) 경우 책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그 작가에 대한 실망도 함께 따라온다. 상업적인 발상이 그런 결과를 낳는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이 책 또한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오해는 하지 마시라, 이건 오로지 나만의 생각일 뿐이다. 나와는 다르게 느끼는 사람도 있을테니까. 비밀을 공유하기 위해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읽는다, 는 소개글이 있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나의 비밀도 말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냥 들어주기만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괜찮다. 오랜만에 만나는 에쿠니 가오리라는 이름앞에 그녀와 비밀 이야기를 공유할 사람은 많을테니.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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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을 그리다 - 문학과 회화의 경계
위안싱페이 지음, 김수연 옮김 / 태학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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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水滿四澤 夏雲多奇峯 秋月揚明輝 冬嶺秀孤松... 이란 시가 있다. 제목은 <四時>. 창경궁 함인정으로 가면 만날 수 있다. 함인정 내부 천장쪽으로 사방 벽에 걸린 현판이다. 東西南北 방향으로 春夏秋冬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풀이하자면 이렇다. ' 봄 물은 사방 연못에 가득하고,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도 많도다. 가을 달은 밝은 빛을 드날리고, 겨울 산마루엔 한그루 소나무가 빼어나도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하면 각 계절마다의 그림이 머리속에 그려지기도 한다. 자연을 노래했다는 글은 왠지 모르게 정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사실적이고 그만큼 마음을 담아야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詩는 도연명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에 연구하시는 분들에 의해 유명한 중국화가 고개지의 작품으로 정정되었다는 말도 들린다. 도연명... 우리가 자주 듣는 이름임에는 분명한데 그 이름에 대해 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찾아보니 두보나 이태백과 같이 중국을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말이 보인다. 내친김에 한번 더 찾아보았다. 이 세사람의 공통점이 보인다. 세상과 뜻이 맞지않아 오랜동안을 떠돌아 다녀야 했다는 것인데, 그리하여 그들은 세상의 어떤 틀에도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았던 듯 하다. 그러니 당연히 자연주의적인 글이 많았을 터다. 자연을 담아낸 글도 많았을테고, 그들이 느꼈던 자연의 이치가 또 그 안에 담겼음은 당연지사다. 중국에서도 한때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도가사상이 열풍을 일으켰던 시기가 있었다. 신선과 같은 삶을 살고 싶어했던. 그러나 그것은 현실과는 맞지않는 하나의 이상세계였으며, 그 환상은 오래도록 후대를 잇는 이상세계로 남은 것 같다. 이 세상은 끝도없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소멸되는 틀에 맞춰야만 살아낼 수 있으니 그것에 환멸을 느끼거나 반항심이라도 생겼다면 누구나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건 기정 사실이다. 저 세사람의 이름이 후대에까지 추앙받을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보통사람들이 꿈꾸어오는 자연인으로써의 삶을 살아낸 까닭일 것이다.

 

그런 도연명을 그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도연명을 그리다>라는 제목에서 나는 '그림을 그린다'라는 느낌보다는 그사람의 일생을 쫓는 하나의 일정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속에서 만난 건 도연명을 그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림을 통해 도연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했던 것 같은데, 그사람을 그린 사람들의 화풍이 시대별로 변해가고 있는 회화사에 더 많은 중점을 두었다. 도연명이 관직을 사임했을 때 노래했다던 <귀거래사(歸去來辭)> 가 이 책의 중심축으로 등장한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그 자체에 너무나도 많은 의미를 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렵지 않게 詩를 쓰면서도 그 안에 자신만의 철학을 담고 있어 호평을 받고 있다는 작품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전원생활을 주제로 한다. 문득 일전에 읽었던 책에서 끄적거렸던 말이 생각났다.  '시대와 더불어 사물은 변하고 사물의 변화에 따라 그에 대처하는 방법도 달라진다.' 는 말인데, 그리고자 했던 사람이 살았던 시대에 맞춰 도연명을 그리는 방법 또한 변했던 모양이다. 그리는 방법은 달라졌을지언정 도연명이라는 이름이 안고 있는 깊은 철학만은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영향을 받아 태어난 작품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안견이 그렸다는 <몽유도원도>다. 그런데 어찌 생각해보면 그렇게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었던 도연명에 대한 부러움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대별로 잘 정리되어진 중국의 화화사... 하지만 내게는 조금 어려운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문화를 공부하면서도 회화부분에서만큼은 왜 그렇게 정리가 안되는지 머리가 아팠던 기억도 있으니 오죽할까...  예술적인 작품을 보는 안목이 없어서 그랬겠지만 자주 접하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히는 것도 또하나의 핑게거리가 될 것 같다. 어찌되었든 전원생활이나 자연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사람은 지금도 많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고 생각만 할 뿐이다. 현실이라는 벽을 뚫고 나간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겠지만 자연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다는 게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는 녹녹치않은 일임엔 분명하다. '힐링 healing '이라는 말이 떠오르고 있는 요즈음, 도연명이나 두보, 이태백과 같은 사람이 아닐지라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동경은 아마도 세대를 거듭할수록 커지지 않을까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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