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고 싶다는 딸때문에 속앓이를 하던 친구가 있었다. 남들 놀 때 놀고 남들 일할 때 일하는 그런 직장에 다니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종목이 써비스업이긴 하지만 외국계 회사로 내가 볼 때는 괜찮은 회사였는데 단지 그 이유때문이라고 하니 친구가 속앓이를 할 만했다. 게다가 회사에서 인정받는 직원중의 하나라는데... 도움을 요청하기에 만나서 한참을 설득아닌 설득을 했었다. 정 그렇다면 사직서는 내지 말고 새벽에 학원을 다니면서 자신을 한번 시험해보는 건 어떻겠느냐는 나의 말에 그러면 일단 그렇게 해보겠노라는 확답을 받아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그녀석 지금은 그 회사에서 잘나간다. 승진도 했고 어느정도는 시간도 자신에게 맞출 수 있을만큼의 여유도 생겼다. 지금은 모녀가 그 때 말려줘서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한다. 그만큼 이 세상을 헤쳐나간다는 게 그리 녹녹치 않다는 말일게다.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판단과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내 몫이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누구나에게 존재한다. 내가 그 때 저 길로 갔더라면... 내가 그 때 저것을 선택했더라면... 그게 사람일테다.없는 선택과 후회가 충돌하며 시간을 꾸며가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TV에서 자주 보이는 광고카피가 생각난다. 더럽고 치사하다고 사표내야겠다는 직장인과 취직을 해야 사표를 쓰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냐고 말하는 백수, 뒹굴거리는 백수를 보며 좋겠다고 부러워하는 군인, 그 군인들을 바라보며 저 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직장인. 거기다 하나 더 보탠다면 커가는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을 그린 광고가 그렇다. 누구나 그 상황에 닥쳐보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단지 그럴 것이다,라는 추측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동안 알 수없는 울림이 내게 전해져왔다. 어느날 갑자기 백수가 되어버린 남자의 시간은 오롯한 아픔이다. 그 아픔이 주인공 영수만 느낄 수 있는 아픔이 아니라 지금 이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모두의 아픔일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무슨 상을 수상했는지, 어디에 응모되어 당선된 작품인지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당선되었다는 그 자체는 이미 그만큼의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뜻도 될테니까. 그래서 보기좋은(?) 앞의 수식어는 떼어내 버리고 그냥 내용에만 관심이 간다고 하면 삐딱한 시선일까? <굿바이 동물원>은 정말 기대이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견뎌내고 있는 아픔을, 이미 곪아버린 상처를 숨기지 않는다. 비켜가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느닷없이 백수가 되어버린 남편으로 인해 마트 계산원이 되어 출근하던 아내는 말한다. 그렇게 놀거야? 마늘이라도 까지? 그 날 이후로 우리의 주인공은 마늘까기, 곰인형눈알 붙이기, 바비인형 속눈썹 붙이기의 달인이 되어간다. 그런데 묘하다. 곰인형눈알을 본드로 붙여한다는 그 설정이. 본드 흡입으로 인한 환상의 세계는 그에게 색다른 세상을 보게 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서 무너진다면 우리의 주인공이 아니다. 2대 1의 경쟁(?)을 뚫고 다시 얻게 된 직장. 그 직장이 또 묘하다. 단순히 동물원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진짜같은 가짜가 되는 일이 그에게는 버겁다. 동물의 탈을 쓰고 동물원의 우리속에서 동물처럼 행동하며 관람객이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는다. 그 동물원이라는 배경이 나를 아프게 한다. 그 동물원에 동물로 취직된 사람들 또한 바라볼수록 아프다. 세상이 나를 구경하는 것인지, 내가 세상을 구경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책을 읽다가 잠시 책표지의 남자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쓸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저 표정속에서 내가 눈치챌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울고 싶으나 차마 울지 못하는 고릴라 탈속의 저 남자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의욕이 앞서 바나나를 너무 먹어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것도, 못된 관람객에게 쿡쿡 찔림을 당해도, 동물앞이라고 부끄럼없이 끈적한 장면을 연출하는 남녀를 바라보는 것도 그에게는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렸다. 철장 안에서나 철장 밖에서나 모두가 관람객의 입장일 뿐이라는 게 어쩌면 우리의 현실일런지도 모를 일이다. 모두가 바라보는 입장으로만 살아가니 제 아픔을 모르고 살아가는 거라고....

 

책을 다 읽었는데도 책장을 덮고 싶지 않았다. 책장을 덮으면 책표지의 남자와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게 왠지 껄끄러웠다. 다시 마주치면 나도 그 동물원의 철장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 할 것만 같았다. 같이 느낄 수 없는 그 아픔에 공연스레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괜찮다고 한줄기 빛처럼 나를 찾아왔던 건 마지막 장면이었다. 임신한 아내에게 다가가 철장 밖으로 손을 내밀어 고릴라를 만져보고 싶다는 아내의 평생소원을 들어주었다는 것, 그리하여 아내가 자신의 손을 잡으면서 활짝 웃었다는 것. 희망의 빛이라는 건 순간일지라도 설렘을 안겨준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필요한 것일까?  어설픈 첫인사와 함께 영수에게 찾아왔던 새로운 인연들. 그 관계속에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정이 있었다. 저마다의 아픈 사연을 안고 동물의 탈을 쓰게 되었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꿈을 놓지않는 그들만의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격려와 다독임이 있어 좋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마음의 소통이 거기에 있었다는 말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람답게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그럼 동물처럼 사냐? 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한다면 과연 몇이나 될까?  괜찮았다. 오랜만에 멋진 소설을 읽었다. 다 읽고도 자꾸만 바라보게 된다. 누군가에게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진다. 어설픈 위로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다.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설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진실한 마음 나누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행복한 인생 통장' 까지도 깨면서 서로의 마음을 믿어준 영수와 그 아내처럼. 그런데 내내 궁금한 존재가 하나 있다. 그 돼지엄마는 누구였을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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