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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라도에서 생긴 일
이제하 지음 / 세계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만약'이라는 말에는 정말이지 많은 뜻이 포함될 수 있다. 있을지도 모를, 혹은 우리가 마음속으로만 간절하게 원하는 그 무엇들이 '만약'이란 말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까닭이다. 처음 능라도에서 생긴 일이란 제목을 보았을 때 얼핏 스쳐가던 느낌은 스릴러 혹은 추리극이 아닐까 하는거였다. 우습게도 나는 편견의 관습에 잡혀 있었던것 같다. 책을 받자마자 책날개속에 숨겨져 있던 작가의 이력을 만난다. 이력보다는 저서를 나열해 놓았다. 왠지 부드럽게 느껴지지 않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가상의 세계속에 존재한다는 능라도에서는 무슨 일이 생겼을까? 어느정도의 기대감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한다.
이 책속에는 아홉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나타날 때마다 저마다의 등뒤로 무언가를 숨긴채.. 혹은 너무나 무거워 차마 내려놓지 못하는 등짐을 진채로.. 딱딱하게 전해져 오는 문체들앞에서 사실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직설적인 화법으로 보여주는 작가의 특성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일단은 내가 매일처럼 접하고 있는 인터넷이란 가상공간에서 시작되어지고 있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닉네임을 서로 부르며 온라인상에서만 만나던 그들이 어느날 문득 '우리 얼굴 좀 봐요' 하며 만남을 제안하는 글에 선뜻 응해올 때 드디어 그들에게 어떤 사건이 벌어지려는거군 했다. 내가 처음 인터넷 세상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가 생각났다. 그저 우연히 들어왔던 곳이었지만 그 첫인상은 그리 곱지 않았었다는 기억이 났다. 진실된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가식적인 자기 자신을 앞세우는 가상공간이 내게는 왠지 껄끄럽기만 했었다. 친구의 손에 이끌려 끌려가다시피 했던 오프모임의 인상 역시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그야말로 그냥 그런 시간을 죽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열리지 않아 엄청 힘들었던 기억이 났다.
로르카.. 그에게 처음으로 그것이 소포로 배달되어져 왔다. '만약' 그것이 내게로 전해져 왔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한참을 고민했을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축인 로르카는 실버호텔의 담장 아래에 그것을 묻어두기로 한다. 그리고는 암호를 정하지. 앨리펀트라고. 그리고 그 코끼리의 움직임을 보고하라고.. 맨처음 그 코끼리를 움직인 것은 알렉산드리아였다. 이혼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그녀에게 전남편의 집착은 너무도 힘에 겨웠을 것이다. 차마 떨쳐낼 수 없었던 기억앞에서 다시 만난 그 기억의 꼭지점을 보면서 모든것을 놓아버리는 여자. 그 일을 계기로 코끼리의 움직임은 활발해진다. 무슨 일이든 그렇다. 누군가 하나가 시작을 해주면 그 다음부터는 순서가 정해진 것처럼 착착 진행되어지게 마련이다. 풍란에게로 옮겨갔다가 다시 배터리의 마음속에 잠시 머물렀던 코끼리는 그 무거운 몸을 아직은 어린 은박지에게 기댄다. 암호명 코끼리...그것의 정체는 총이었다. 한자루의 권총. 내게 그 총이 어느날 배달되어져 왔다면, 그래서 너의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면 나는 아마도 그 누구를 향해서도 총구를 들이밀진 않았을 것이다. 혹시나.. 나를 향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 보기도 하지만... 아니, 이건 정말 혹시나해서 하는 말이다.
그들은 모두가 외로웠다. 그들은 모두가 아팠고 혼자만이 안고 살아가야 할 상처를 하나씩 갖고 있었다. 그리고 저마다 저의 상처가 가장 크다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저멀리에 존재하는 총부리를 자신에게 상처를 안겨주었다고 생각되어지는 사람에게 이미 겨누고 있음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니고 내 탓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느냐고.. 닉네임과 본명을 적절하게 섞어가면서 진행되어지던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다. 알렉산드리아와 풍란을 통해 보여지는 여자들의 삶. 유교적인 관습이라든가 종교라는 허울을 빌어 너무나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삶의 모습. 결혼과 가족의 의미,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사랑이란 의미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할 수 있는 빌미를 던져주기도 한다. 배터리와 무한공간을 통해 보여지던 사회의 한단면을 보니 씁쓸했다.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죽음조차도 내 편한쪽에 맞추고 싶어하는 사회의 통념앞에서 그런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아니 만들어가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어떻게 보면 우리 회원들 막다른 곳에 이른 사람들 같지 않아요? 무슨 강박증 때문에 사이트를 찾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속들을 털어놓고 오랜동안 얘기를 하다 보니 제 고독이 아니라 남의 고독부터 이해하고 최선을 다하는 게 정말로 고독을 안다는 소리라는 걸 깨닫게 된 거겠죠..
남을 이해하려면 가슴속의 응어리부터 풀어버려야지 그거 지닌 채 어떻게 남에게 다가가요...
95쪽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참으로 가슴아픈 말이 아닐수가 없다. 여기 모인 그들의 직업은 참으로 다양하다. 시인, 사진작가, 건축가, 주부, 영화조감독, 인테리어하는 사람, 운동가였던 사람... 그런 그들이 안고 있는 아픔 또한 다양하고 그 응어리진 모습 또한 다양하다. 모든 것의 문제와 답은 자신이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구에게 총부리를 겨누는가? 알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능라도라는 사이트를 개설하고 그 회원에게 총을 보내주었던 사람이 드디어 밝혀지던 순간. 그의 환상속 세상이 이해가 되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반전이라는 것일까? 아니 내가 보기엔 그것도 아닌것 같은데... 뭐지? 그리고 그의 자살. 결국 그가 원했던 것은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거였나 보다. 그 엄청난 무게를 견뎌내지 못한 채 누군가를 그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던가 보다. 그런데 마지막 여운이 왠지 길다. 단순히 한 개인의 자살이 아니라 뭔가 번잡스러운 우리의 생활하나가 무너져 내린 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마침표를 찍으면서 작품해설로 넘어가니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의도를 아주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 이 작품에서 권총은, 잠재적 폭발력을 지닌 현실적 대상일 뿐만 아니라 유구한 역사성까지를 드러내면서 더욱 문제적인 위상을 확보한다...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넘어와 버린 총의 의미가 왠지 무서웠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마치도 가상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인양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책의 뒷표지에 이런 말이 써 있었다. 작품을 읽어본 독자들은 인정하겠지만, 그는 오늘날 우리들의 현실을 대체할 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현실화된 가상 현실의 세계, 인터넷 세상의 삶의 본질로까지 그의 문제의식을 확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왠지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몇번을 반복적으로 읽으면서도 몇번을 끄덕거리게 되고 몇번씩이나 인정하게 된다. 왜그럴까? 그 인정이 두려워진다..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