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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광인 - 상 - 백탑파白塔派, 그 세 번째 이야기 ㅣ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후기 문학에 관권이 개입됨으로 인하여 모처럼 싹트려 하던 문학의 발전을 저해했다던 문체반정..
훗날에 소설 발달의 모태가 되었다던 패관문학.. 민간인들의 생활속에서 수집한 이야기에 창의성을 더한 산문 문학을 패관문학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왕께서는 그런 문학을 못하게 하셨을까? 굳이 옛날의 의식이나 법을 따라야만 했던 까닭이 있었던 것일까? 문득 한글창제를 반대했다던 양반님들이 떠올랐다. 백성이 알면 알수록 부리기가 힘겨워지기때문이라고 했던가? 우리의 옛선인들께서는 왜 민초들의 삶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백탑파 서생들과 정조대왕의 이야기..
여기서 백탑파는 영정조 시대에 탑골 백탑 아래에 모여 시문을 공부하고 경세를 논한 대표적인 지식인 그룸을 말한다. 박지원,홍대용,박제가,이덕무,유득공,백동수등을 핵심으로 했다. 대부분이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당상관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정조의 정치 개혁과 문화 혁신을 충실히 보필하였다고 한다. 선진적인 문명의식을 지녔고 북학사상을 지녔다.(-책표지 뒷면 참조) 이 책속에서는 그들의 선진적 문명사상을 논한다기 보다는 그들과 씨줄 날줄처럼 엮여져 있는 암투를 좀 더 많이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참으로 힘겨웠던 책이었다. 문어체로 되어 있어던 까닭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책을 읽으며 힘겨운 단어마다 뜻풀이를 함께 읽어주어야 한다는 심리적인 부담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책장을 열면 백탑파 서생들을 탄압하는 왕의 모습부터 만나게 된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결과부터 보여지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책장을 넘겨가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책속 세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연쇄살인을 쫓아가는 나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고, 단지 '열하광인' 이었기에 연쇄살인범의 누명을 쓴채 사건을 쫓아다니던 의금부 도사 이명방의 호흡을 함께 느끼고 있었던 거다. 왕의 종친이면서 의금부 도사인 이명방의 고뇌.. 그야말로 충신일 수 밖에 없었던 이명방의 올곧은 충성심.. 내쳐 달려가던 이명방의 안타까운 사랑앞에서 나는 못내 안타까워 종종 걸음을 쳤다.
가족과도 같았던 '열하광인'들이 하나씩 죽어가고 그 사건을 따라 흘러가던 문체반정의 내막은 참으로 놀라웠다. 어쩌면 왕은 모든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곁에 두어 제 사람을 만들었으나 온전히 마음을 다 줄수 없었던, 외로우나 외로울 수 없었던 왕의 허황한 마음이 보여지는 것 같았다. 좀 더 강한 도구로 연마하기 위하여 그랬었다던 왕의 마지막 대사가 왠지 서글프게 들려왔다. 사건을 해결해 나가던 화광 김진의 일목요연한 움직임은 또한번의 놀라움을 선사해주었다. 뒤늦게 나타나 사건의 실마리를 틀어쥐며 아귀를 짜맞추던 김진의 모습에 공연한 안도감이 스며들었던 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왕에 대한 충심.. 적어도 왕만큼은 자신을 버리지 않았을거라던 맹목적인 믿음앞에서 잔잔하게 부서져 나가던 이명방의 사랑이 안타까웠다. '열하광인'들이 모두 다 죽고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만이 남았을때 그 하나뿐인 사랑을 의심해야했던 이명방의 아픔.. 오직 자신만의 안위를 걱정하던 사랑앞에서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의심의 고통을 미안하다는 말로 어찌 다 지울수 있을까? 이 책속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대쪽같은 의리가 살아 숨쉬고 깨질 것 같지 않은 믿음이 버티고 있다. 그 믿음과 의리를 감싸고 도는 강같은 사랑과 상대를 배려해주는 마음은 이 책속에서 산소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서얼의 자식은 또다시 서얼일수 밖에 없음으로 혼인할 수 없다던 명은주의 말은 시대적인 배경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 서얼들이 바로 왕의 코밑에서 일을 했던 곳이 규장각이기도 했다. 탕탕평평.. 인재를 고루 살펴 썼다던 정조대왕.. 그 왕을 위해 헌신하던 백탑파 서생들의 믿음을 왕은 끝내 저버린 것일까? 지금까지 써왔던 패관소품체를 대표하던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금서로 꼽으며 백탑파의 서생들에게 자송문을 지어바치라던 왕은 너희들을 버린게 아니라 좀 더 지켜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지만 그 말을 믿어야 한다고 절규하던 이명방에게 화광 김진은 이렇게 말했었지.. 군왕은 군왕의 도리를 다 할 뿐이라고.. 누구나 다 자신의 도리를 다할 뿐이라고..
그렇다면 살인범은 누구였을까?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감 떨어지듯이 툭 튀어나온 살인범의 살해동기가 처음엔 너무도 믿기지 않았었다. 책을 읽으며 간직해오던 느낌들을 고스란히 빼앗겨버린 듯했다. 글짓기를 사랑하였던 살인범의 아버지는 백탑파 서생들과의 만남을 꿈꾸었지만 그들의 혹독한 글평가로 인하여 지독한 속앓이를 하게 된다. 그 참담함을 이겨내지 못해 끝내는 죽음을... 그 모습을 바라보았을 아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지만 그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백탑파 서생들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동기를 듣고 있노라면 참으로 가슴이 서늘해져 온다. 왕이 찾아내지 못한 바램이, 백탑파의 서생들이 찾아내지 못한 바램이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사람위에 사람없다고 했던가? 어느 한쪽으로든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뼈아픔이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문체반정이란 말은 사실 역사책이나 사전에서 만나 볼 수 있는 말이었다. 한국형 팩션이란 말이 아깝지가 않은 듯 하다. 추리극처럼 보여지던 사건의 흐름을 통해 문체반정이란 의미를 하나씩 되새겨가던 순간들이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졌다. 왜? 라는 물음표를 앞세우며 시작했던 책읽기가 정말 흥미로웠다. 흔하게 보여지는 정치적인 암투보다는 백탑파 서생들과 왕의 심리전을 따라가다보면 가뿐 숨을 몰아쉬곤 한다. 어찌보면 이렇다할 스릴이 없어 딱딱하게 느껴질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그런 점 또한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보여진다. 연쇄살인을 통해 따라가며 하나씩 허울을 벗어던지던 문체반정의 의미들이 나는 참 좋았다. 읽을수록, 책장을 넘겨갈수록, 이야기의 진행상태를 파악해갈수록 책을 놓아선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밤을 세워 아주 천천히 음미하며 읽었던 책이었다. 멋지다.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