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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가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가호, 시즈에,나카노,쇼노스케,세리자와, 쓰쿠이... 두 여자와 그녀들의 일상이 되어주는 남자 네명의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엉켜드는 이야기다.
과거를 껴안고 사는 여자, 가호..
안경점의 직원이다. 느릿 느릿 그러나 쉼없는 그녀의 일상은 늘 일정한 속도와 일정한 높이를 잃지 않는다. 늙은 고양이 후키를 가끔씩 자신의 담요속으로 불러 들이는 여자.. 헤어진지 이미 5년이 되어가는 남자 쓰쿠이를 잊지 못해 자기 자신을 유리컵을 내던지듯이 깨뜨려 조각내버리는 여자. 아니 그와의 기억으로 현실을 지탱해 나가는 여자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녀에게 있어 사랑이란 건 이미 어떤 정의를 상실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늘 같은 아침, 같은 오후, 같은 저녘, 같은 밤만이 그녀에게 존재할 뿐이다. 알 수 없다. 그녀가 왜 이 남자와 자고 저 남자와 또 자는지를.. 그것을 누군가는 복수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몸짓으로 말하고 있다.
안경점의 동료 나카노는 어쩌면 과거로부터 그녀를 탈출시키기 위한 하나의 탈출구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끊임없이 그녀의 주위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 그녀의 모든 것을 껴안고 그녀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녀의 모든 것을 묵묵하게 바라보기만 하던 그 남자도 가호의 옛사랑앞에서는 주춤거렸지.. 아직도 살아 숨쉬는 그녀의 옛사랑을 어쩌지 못한채로.. 아니 그녀의 사랑이 너무 단단해 보여서.. 단지 그녀가 그것으로 인해 버텨내는 세상살이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온전하게 그녀를 사랑하는 걸 보면 사랑은, 그렇게 기다려주는 아름다움이 필요한 것일게다...
현실에 매달려사는 여자, 시즈에..
미술선생님이다. 키가 크고 마른 여자.. 그녀의 일상은 마치도 자로 잰듯하다. 총총히 자신의 길만을 왔다갔다하는 시계바늘처럼 그렇게 늘 제자리를 지켜내려 애쓰면서. 그녀 자신은 불륜이라고 전혀 생각지 못하는 유부남 세리자와와의 사랑. 난 아내도 있고 열다섯살짜리 딸도 하나 있지, 아주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 세리자와라는 사람의 사랑은 그녀에게 있어서 진정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가끔씩 만나 그 사랑에 충실하고 또한 그렇게 충실했던 자신의 시간에 대한 연민이나 미련따위를 갖지 않기 위해 자신을 다독이며 살아가고 있는 여자다. 그것으로 되었다고 늘 생각하면서. 하지만 가끔씩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녀도 그녀의 사랑에 욕심을 부린다. 갖고 싶다고, 늘 곁에 있게하고 싶다고, 헤어지는 순간이 너무도 싫다고.. 그런 걸 보면 사랑은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은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모양이다.
그런 그녀를 지켜주고 싶어하는 남자 쇼노스케는 대학시절의 연인이다. 연인의 감정을 뛰어넘은 우정일까? 차마 연인이 될 수 없었던 우정일까? 도무지 아리송하다. 그녀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도, 그를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도 어찌보면 참으로 이기적이란 생각이 든다. 결혼한 여자친구들은 불러내기가 부담스럽다며 자연스럽게 쇼노스케를 불러내는 그녀의 내면에는 과연 어떤 생각이 잠재해 있는 것일까?
자신이 살아가야할 몫의 시간들을 다 채우고 난 뒤의 여백을 채워주는 두 여자의 이야기는 사실 뭐 이렇다하게 별다른 건 없어 보였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니까,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별다를 게 없어보이는 두 여자의 일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작가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혹시 우리의 기억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아주 작은 것들을 다시한번 돌아보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너무 가까이 있어서 만지지 못하고, 느껴질 수 없어 버려진 조각난 시간들을 퀼트를 하듯이 그렇게 꼼꼼하게도 잘 엮어 놓았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들이 점처럼 그렇게 콕콕 찍혀져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왠지 그 시간들이 참으로 쓸쓸하게 다가왔다. 너무도 오랜동안을 곁에 있어주어서 이제는 도무지 멀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두 여자조차도 사실은 각각의 시간에 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속이 아니라 겉뿐인 것을 두여자를 통해 여실하게 봐버린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남의 이야기는 들어주지 못하면서 그저 자신의 이야기만을 쏟아내고 싶어하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아픔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두 여자의 모습이 마치도 평행선 같다.
다 보여주는 것 같아도, 다 말해주는 것 같아도 사실은 알맹이는 쏙 빼고 이런 거야, 하며 겉껍질만 보여주는 두 여자의 마음을 본 것만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 자기만의 세계의 빗장은 여전히 굳건하게 질러놓고 말이다.
기다림으로 사랑을 얻었을까? 결국 다시 한침대를 쓰며 지내고 있는 나카노와 가호의 사랑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일까? 옛사랑의 상처와 그 시간들을 묶어 보관하던 비스켓 상자를 열었을 때 이미 가호의 새로운 사랑은 집을 짓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오랜동안의 기다림으로 다져진 그들의 사랑이 왠지 잘 그려진 수채화같다는 생각을 한다. 오래되어도 흔적으로 각인되어질 사랑이 아니기를 ... 가호의 일상을 사랑해 줄 수 있었던 나카노의 진실함과 배려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무슨 얘기든 상관없다. 남편 얘기든 투정이든, 어떤 얘기든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푸근해졌다. 사회속에서 비슷한 곤란을 겪고, 하루하루 모색하면서 생활하는 사람들...(60쪽)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질펀하게 흐트러져 있던 책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씩은, 정말이지 아주 가끔씩은 남의 아픔도 들어주어야만 한다. 나의 귀를 빌려줄수도 있어야 한다. 나 혼자만이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므로..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