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맥락을 이해하고 싶다면, 10개의 재앙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면 성서속의 한 맥락을 더듬어보면 된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때의 이야기이다. 모세는 자신이 애굽인이 아닌 히브리인임을 알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히브리인들을 구하라는 명을 받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편하고 안전한 왕자의 신분을 버렸었다. 모세에 대한 이야기는 새삼스럽게 말하지 않아도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러니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자. 하지만 애굽의 왕은 히브리인들을 보내지 않았다. 아니 보내기 싫었다. 하나님을 부정하며 자신들의 신을 섬기던 그에게 히브리인을 보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까닭이다. 또한 같은 왕자로 자란 모세에 대한 일종의 강박관념때문일런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되어 하나님의 재앙이 시작되었던 거다.

나일강을 피로 물들이고 개구리비를 내렸으며 이와 파리가 들끓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가축을 병들어 죽게 하며 전염병을 퍼뜨린다. 하지만 애굽의 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 그보다 더한 재앙이 내려질 것이라고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하나님은 또다시 재앙을 내리는데 인간에게 듣도 보도 못한 질병을 퍼뜨리고 우박을 내렸으며 메뚜기떼를 보내 살아가는 터전을 황폐화시켜 버린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애굽의 왕을 찾아간 모세는 이렇게 말했었다. 어둠이 내리고 이 땅의 장자들이 모두 죽을 것이라고. 그러기 전에 하나님께서 더 진노하시기 전에 우리들을 보내주어야 한다고.
마침내는 온세상이 어둠속에 잠기우고 천둥과 번개가 치며 곳곳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리고 죽음...
결국 자신의 아이를 잃고 난 뒤에야 히브리인들의 출애굽을 명하는 애굽의 왕.

그렇게하여 모세는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출애굽의 길로 들어선다. 그 이야기의 끝에 홍해가 갈라지는 기가막힌 장면도 연출되는 것이다. 성경 출애굽기에 보면 이 모든 것들이 잘 설명이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흔하게 회자되어지는 이야기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이 싯점에서 꼭 한번은 묻고 싶다. 정말 꼭 그렇게 해야만 했느냐고..
자신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끔찍한 재앙을 마다하지 않았던 선하다는 하나님께.
너무도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재앙이 시작된 작은 마을에 우리의 여전사 캐서린이 들어선다.
그를 맞이하던 모든 사람들이 작고 여린 소녀 로렌을 재앙의 원흉으로 지목을 한다.
바로 저 아이가 이 재앙을 몰고 왔어요, 죽여야 해요..
이미 피로 물들어버린 마을의 강가를 보면서도 예전에 가족에게 일어났던 끔찍한 살인사건으로 인하여 신앙 혹은 믿음에 대한 회의를 느끼던 캐서린은 종교적인 측면보다는 과학적인 측면에서 이 사건을 풀어나가고 싶어한다. 절대로 그럴리가 없을거라고 생각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지는 재앙의 모습을 보면서 경악하는 캐서린..
영화속에서 언뜻 언뜻 스쳐가던 스포일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치 못한 반전에 놀라고 말았다. 나 역시 그녀가 천사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었었기에.
하지만 그녀 역시 신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인하여 사탄에게 조종당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정말이지 지독하게 성서적이며 기독교적인 느낌을 안고 있다.
그런 것들을 아주 또렷하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신을 부정하면 너희도 이렇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크게 외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거리의 수많은 목회자들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외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막힘없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던 소재나 줄거리의 엮임 상태는 꽤 좋았다.
요즘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CG부분 역시 멋지게 처리되었다.
그런데 이건 무슨 느낌일까?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이는 것은 역시 너무 일방적인 종교의 냄새때문이 아닐까 싶다.

현실이었을까? 생각하면 환상이었다고 말하는 듯하고,
환상이었을까? 생각하면 현실이었다고 말하는 듯한
반은 현실적이고 반은 환상적인 장면속을 오가는 순간들이 약간은 억지스럽게 보였다.
영화를 보는 이에게 무언가를 생각할 여유와 느낌을 전해받을 수 있는 틈을 주지 않고
무작정 목소리만을 높이던 목청 큰 목사님의 설교를 한바탕 듣고 난 느낌이랄까?
2편을 예고하는 듯한 마지막 앤딩은 차라리 없었으면 더 좋았을 걸 그랬다.
2편에 대한 기대는 아예 접어버린다. 너무도 뻔한 이야기일테니까.
그런데 나는 왜 앤딩장면을 보면서 예전의 영화 <엑소시스트>가 생각난 것일까?
인간의 몸속에 들어가 그 몸의 주인인 인간의 내면과 싸우며 몸을 지배하던 사탄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든 것은 내면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아주 가끔씩은 형식과 겉치레도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진정한 믿음이란 것 역시 내면에서부터 조용히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까닭이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했어. 하지만 신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지.
그래서.. 우리는 신을 버리고 다른 분을 영접했어...
사탄은 천사를 죽일 수 없었기에 당신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사탄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남자는 그렇게 말했었다.
종교 혹은 믿음의 실체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대사가 아니었나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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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차일드 2007-09-19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화마지막에 악마의 씨앗... ㅎㄷㄷ
 


지독하다.. 이 영화는 정말 지독하다. 
강하다.. 이 영화는 너무 강하다.
너무 지독하고 강해서 차마 눈길을 돌릴 수가 없다.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영화다.
배경이 빼어난 것도 아니고, 내용이 뛰어난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빨려드는 느낌이 있다.
주인공의 심리적 변화가 알 수 없는 심연속으로 나를 이끌어 간다.

세상의 모든 냄새는 다 쫓아갈 수 있으면서 정작 자신의 체취는 잃어버린 남자가 있다.
어둠속에서 갇혀지내던 남자의 과거는 어쩌면 절대적인 후각을 위한 단련기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공식은 모릅니다. 하지만 좀 더 좋은 향수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그는 향수를 만들게 되고 끝내는 사람의 향기를 간직하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채
머나먼 길을 떠난다. 아니 어쩌면 세상에 태어나 혼자이길 원했던 시간속에 묻혀진다.
절대 미각, 절대 음감, 절대..... 절대..... 절대.....  최고이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인간의 욕망이다.
하지만 그 최고라는 것은 신이 내리는 것이라는 막연함으로 달려가는 것 또한 인간의 욕망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배경은 너무 어둡고 너무 침울하다.
말보다는 감정표현으로 승부를 걸어야 했을 주인공의 배역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어느날 우연히 거리에서 맡게 되는 냄새를 쫓아 여인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지울 수 없는 그 여자의 냄새때문에 그의 욕망은 불타오르게 된다.
이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람다움의 속내를 까발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사람냄새를 각인시켜 주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을 작은 향수병을 채우기 위해 미모의 여자들이 하나 둘씩 죽어가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만을 기억하는 남자는 그 죽음에 대해 아무런 느낌조차도 갖지 못한다.

여자들의 체취... 모든 것의 시작인 여자들의 냄새...
죽어간 여자들에게서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수치스러움을 잊게 하고 타락의 늪으로 인도해 주던 그 냄새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혹은 잊어버리고 있는 인간의 냄새는 허울과 거죽이 아니었다고..
그 남자가 찾고 싶었던 인간의 냄새는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서는 안되는거였다고..
그 남자의 죽음을 기다리며 광장에 모여들었던 군중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죽음이 아니라 그 남자가 안고 있었던 순수함이 아니었을까?
계산되어질 수 없었던 그 남자의 순진함이 아니었을까?

결국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 온 남자, 태어났으나 버림받았던 곳으로 되돌아 온 남자의 슬픔.
모든 것은 시작되어진 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일까?
죽음을 택한 남자의 선택이 왠지 서글퍼진다.
마지막 한방울의 향수가 떨어져 내리던 소리는 눈물 한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무엇이 다를까?
인간은 어쩌면 그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허울과 타락만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었던가?
내면의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다시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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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뉘앙스 사전 - 유래를 알면 헷갈리지 않는
박영수 지음 / 북로드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자신있게 말을 하면서도 가끔씩 (아니 자주라고 말하는 편이 더 솔직할 것 같다) 단어 고르기에 애를 먹을 때가 있다. 오죽했으면 책꽂이 맨 앞쪽에는 사전을 놓아두었을까? 그때 그때 궁금한 말의 뜻을 찾기 쉽도록 하기 위함이다. 국어사전,옥편,영한사전,한영사전,일어사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하는 말들이 많다는 것을 보면 우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겠다. 이 책을 선택하게 된 동기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였다. 이것 같기도 하고 저것 같기도 한 말들에 대한 유래를 알수 있다면 헷갈려하지 않아도 될테니까 말이다. 

우리가 너무도 흔하게 쓰고 있는 말 사랑, 사랑이란게 무엇일까? 그 낱말속에 숨은 뜻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유행가의 곡조처럼 너무 쉽게 정의내리기에는 뭔가 부족한 듯한 단어가 아닌가 싶었다. '사랑한다'와 '좋아한다'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간간히 회자되어져 오던 글들이 생각난다. 그런데 이 책이 정말 속시원하게 다 밝혀주고 있다. '사랑'의 진짜 의미에 대해서.  '사랑'은 '헤아려 생각하다'라는 뜻이란다.  상대방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느냐의 깊이와 무게가 곧 사랑이라고. 아무 인연없는 사람에게까지 넓혀가는 그런 마음이 사랑이라고.  '자비'라는 단어 또한 넓은 의미의 사랑이라고.  요컨대 사랑이란 다른 사람을 자신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쓰고 있던 'love'에 대해서도 아주 흔쾌하게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love'는 '기뻐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lubere'에서 유래했단다.  서양의 'love'는 에로스, 아가페, 필리아라는 세가지 단어로 표현된다. 물론 각각의 말이 안고 있는 뜻은 모두가 다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양의 'love'는 '대상에 관계없이 마음이 기쁘고 행복한 상태'라는 뜻을 보면서 우리의 고유한(?) 사랑이란 말과는 비교도 안되는 표현이란 생각도 해 보았다. 순전히 나혼자만의 생각이겠지만... 그렇다면 '연애'는 또 무슨 뜻일까?   연애라는 말은 일본인이 처음 만들었다는 말 앞에서 아하! 그렇구나 하면서 무릎을 치고 말았다.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연애라는 말이다.  얼핏 생각하면 그게 그거지 뭐, 하다가도 이렇게 말이 갖고 있는 의미를 알게 되면 섣불리 아무데나 갖다 붙이지 못하게 될 것 같다. 제대로 안다는 건 참 어려운 일임에 분명한 일인듯 싶다. 아는 게 병,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떠오른다.

잘못 알고 있는 말들도 참 많았다. 우리가 흔히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말 중에서 '육계장'은 틀리고 '육개장'이 맞다는 말의 유래와, 함경남도 북서쪽의 삼수군과 갑산군을 통틀어 지칭하는 그야말로 '살기 힘든곳' 의 대명사로 쓰였던 말이 '산수갑산'이 아니라 '삼수갑산'이 맞다는 유래는 새삼스러웠다.  또한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의 속뜻을 알고 나니 마음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속국이 되었던 그해 을사년의 거리 풍경이 더없이 적막하고 쓸쓸해 보여 생긴 말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분통 터지는 말인가!  말의 어원이나 유래가 이토록이나 커다란 뜻을 담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것 뿐인가? 원래의 뜻에서 벗어나 왜곡되어진 말의 뜻들도 참 많았다. 불교의 경전을 공부하거나 교리를 연구하는 스님을 '이판'이라 했고, 절의 산림을 맡아 하는 스님을 '사판'이라고 했었단다. '산림'이란 절의 재산 관리를 뜻하는 말인데 '살림을 잘 꾸린다'는 살림이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읽으면서 눈이 커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오늘날 '이판사판'이란 말의 뜻이 엉뚱하게 쓰여지고 있는 것을 보면 말한마디에도 사회적인 현상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냥 머리속에서 맴도는 몇구절을 다시 끄집어내어 보았지만 그 외에도 아, 그렇구나! 하면서 읽게 되었던 부분들이 참 많았다. 두꺼운 국어사전을 읽고 난 기분이었다. 뭐랄까, 국어사전 해설판이라고나 할까?  비슷비슷한 말의 쓰임새를 알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말속에 숨어 있는 의미나 유래등을 알고 나니 단 한마디의 말이라해도, 단 한자의 낱말이라해도 쉽게 쓰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국어사전 옆에 나란히 두고 참고서 보듯 해야 할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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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고 내게 다가왔던 느낌은 너무도 강렬했다.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이끌기 시작했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눈을 뜬 후의 세상은 어떨까?  아니, 다시 눈을 뜬 그들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궁금했다. 일곱명의 주인공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를 맞아줄까?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던 유혹앞에서 나는 단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눈뜬 자들의 도시>를 펼쳐 들었다. 변화되지 못하는 그들의 삶, 아니 변화되지 못하게 막아서는 거대한 힘의 원천이 알 수 없는 근원지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때가 늘 오기 마련이라는 안개같은 말처럼 우리는 너무 많이 알아서 혹은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까닭에 변화라는 그 말자체만으로도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주인공들에게 다가서지 못했던 변화의 흔적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우익정당 팔 퍼센트, 중도정당 팔 퍼센트, 좌익정당 일 퍼센트, 기권 없음, 무효표 없음, 백지투표 팔십삼 퍼센트...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참관인들은 기다렸다. 그래도 의무를 져버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비는 그쳤지만 몇명의 투표권자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은 투표하러 오지 않았다. 일주일 후 다시 투표를 해야한다는 발표를 하고 다시 온 그날의 풍경...  길게 늘어선 줄..  그러나 결과는 백지투표 팔십삼 퍼센트.. 그들은 기권을 한 것도 아니었고 무효표를 만든 것도 아니었다. 아주 지극히 정당한 국민의 의무를 했을 뿐이었다. 무엇이 그들에게 백지투표를 하게 만들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들조차도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었던 까닭에..

희망은 소금같은 거야, 영양분은 안 들어 있지만, 그래도 빵에 맛을 내주거든..
눈먼 자들의 도시를 탈출하여 다시 눈뜬 자들의 도시속에서 살아가기를 사년.. 하지만 그들은 잊지 못했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도 정당화시켜 줄 수 없었던 정부가 문제였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서로 약속을 했다. 그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자고. 그 문제만큼은 절대로 수면위로 떠올라서는 안되는거라고..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들에게 있어서 그토록 커다란 의미를 지녔던 일의 의미가 왜 아무런 것도 아닌 것으로 둔갑을 해야 했던 것일까?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치부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에게 있어서는 차마 다가갈 수 없고 만질 수 없었던 뜨거운 감자였는지도 모를일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사람들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왜? 무엇때문에 그들이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밀어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아마 말하지 않은 희망 하나쯤 가슴속에 품고 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금같은 희망을,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잊고 싶은 사람은 당신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라고 외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버림받았던 우리들이라고..

우리는 진실을 말할 때도 계속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할 대도 계속 진실을 말한다고요.. 진실을 말하면서도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의 가슴이 먼저 알일이다. 차라리 거짓을 말하면서 그 안에 진실을 숨기고 있는 것이 나을런지도 모르겠다. 눈먼 도시에 살던 그들이 처음 조직이란 것을 이야기했을 때만해도 굳이 조직의 힘에 대한 인정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눈뜬 도시에서는 결국 조직이란 힘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조직의 힘... 두개의 덩어리, 두개의 조직.. 정부와 백지투표를 했던 알 수 없는 힘의 존재. 힘겨운 싸움은 시작되었지만, 그 고통은 고스란히 그들의 몫으로 되돌아 올 테지만 그들 중 아무도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건드려서 아픈 상처는 차라리 곪아 터지는 것이 나은 것일까?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은 가슴도 슬퍼하지 않는 법이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정부는 그들을 떠나기로 한다. 눈이 멀기 시작하면서부터 버림을 받았던 우리의 주인공들이 또한번의 버림을 받는 순간이다. 도망가는 순간까지도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날까 하여 가로등의 불빛을 내리는 거대한 힘의 존재.. 하지만 불은 밝혀진다. 떠나는 그들을 위로라도 하듯이. 그들이 완전하게 떠나갔을 때 다시 꺼지는 불빛과 흐릿해져버린 가로등의 불빛이 하나의 장면이 되어 내게로 오버랩되어져 왔다. 두마음의 밝기처럼 그렇게...  떠나보낸 자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떠나간 자들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변명을... 이렇게 떠나게 된것은 모두가 너희들의 잘못이라고, 너희들이 잘못했다고 용서를 빈다면 다시 돌아갈 수도 있다고... 그리고 그들은 떠나왔던 곳을 향해 화살을 날리기 시작한다. 누구라도 좋으니 그 화살을 맞은 사람은 비명을 질러야 하는 거라고, 이렇게 아프니 다시 돌아와 나를 치료해 달라고 말해야 한다고.. 뜬금없는 욕심을 부린다. 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도무지 생각할 여유를 갖지 못하는 힘의 조직에 대해 나는 연민을 느끼기 시작했다. 누가 그들에게 저토록이나 처절한 옹졸함을 허락했는가 묻고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나는 책을 다 찢어버리고 싶었다. 아주 가루가 되도록.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그들의 태도가 나를 너무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백지투표라는 말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작금의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해.. 언론들은 떠들어대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탄압이라고. 세계 어느나라를 보더라도 이런 경우는 없다고.. 요즘 신문의 정치면을 보자면 늘 싸움이다. 정권과 언론의 싸움질.. 나는 기자들에게 달려가 이렇게 외쳐주고 싶었다. 취재를 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잘난 정치인들의 일상적인 면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하게 보이콧을 해버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들의 입에서 혹은 생활속에서 나오는 것들중에 정말 사소한 것들조차도 응대해주지 말고 우리는 우리끼리만 이야기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울며불며 매달리지 말고 아예 하나부터 열까지를 다 모른척해버리면 되는거 아니냐고.. 그리고는 태연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라고.. 이런 생각을 했었던 내게 이 책은 무서움이란 단어를 들려주었다. 참, 무섭다... 백지투표라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은 생각같아서.. 무관심이란 말처럼 무서운 게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  우리의 주인공 안과 의사 부인.. 모두가 눈이 멀었을 때 홀로 눈뜬 자였기에 그 많은 고통과 혼란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던 우리의 주인공..  그 주인공을 향해 날아오던 돌멩이는 누가 던진 것이란 말인가. 희생양이란 말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기에는 너무도 아팠다.  거대한 힘의 조직속에서 그 힘의 원리대로 살아왔던 한 남자는 우리의 주인공에게 올가미를 씌우려 했지만 결국 잔잔하게 울리던 진실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게 된다. 그건 아니라고.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거라고. 끝까지 우리의 주인공을 향한 마음을 닫지 않았던 그에게 나는 고마움을 느꼈다.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던 우리의 주인공과 그 한남자의 넋을 위로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중에 들려온 또한번의 총성... 눈물을 핥아주던 개도 사라졌다. 그들은 어쩌면 다시 눈이 멀었을 게다. 아니 차라리 눈먼채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쉬운일인지도 모를일이다.

그들은 네라고 하면서 동시에 아니오라고 한다.
그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우리 모두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눈이 멀었던 남자는 백지투표의 의미가 안고 있었던 모든 진실을 왜곡해야 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어쩌면 그의 모습이 우리 모두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사년이라는 긴 공백을 아무것도 아니라는듯이 그렇게 치부해버렸던 거대한 힘의 조직을 이끈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갈데없이 치졸하고 옹졸했던 그들의 모습 또한 우리 모두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눈먼 도시에서 홀로 눈을 뜬채로 아파해야 했던 것은 아마도 우리의 희망이 아니었을까? 소금같은 희망... 우리가 늘 찾아 헤매이던 그 소금과도 같은 희망은 어쩌면 이미 우리 가슴속에 들어와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보고자 하지 않은 것일 뿐, 단지 우리는 그것의 뿌리가 나한사람의 가슴속에서만 돋아나게 해달라고 빌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버리는 자와 버림을 받는 자는 하나일 것이다. 단지 아주 단순한 언어로 구분해 놓았을 뿐. 우리는 지금, 아니 지금의 나는 눈을 뜨고 살아가는 중일까? 눈을 감고 살아가는 중일까? 알 수..... 없다.  알지 못하면 보지 못한다는 말 한마디가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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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연애사건 - 신분을 뛰어넘은 조선 최대의 스캔들
이수광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7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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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리시대적에는 어디 신랑 얼굴이나 제대로 볼 수 있었남? 결혼식 다 끝내고 신방 차리고 나서야 신랑 얼굴을 볼 수 있었지. 사주단자 오가고 어디사는 뉘집 도령이라드라 하는 말만 들었지 언감생심 결혼전에 신랑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 생각도 못할 일이었어." 우리의 할머니들께서 종종 하시는 말씀이다. 결혼을 하는 당사자들은 자신의 신랑 신부가 될 사람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부모님의 말씀대로 혼례를 치루고 첫날밤이 되어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는 말은 여러번을 들어도 어떻게 그럴수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만다. 멀쩡한 남자를 절름발이라고 소문을 냈더니 아가씨가 자기 대신 몸종을 새신부로 꾸며서 시집을 보냈는데 알고보니 맘씨고운 신부를 얻고 싶어 신랑이 꾸며댄 말이었다는 간혹 회자되어지는 이야기처럼 남자의 경우는 여자와 달라 어느정도는 여자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장옷을 쓰고 행여나 남자와 눈길이라도 마주칠까봐 전전긍긍하던 여자들에게는 그야말로 꿈같은 아니 꿈조차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는 건 지금을 사는 여자들에게는 과히 기분좋은 이야기만은 아닌듯 하다.

이 책속에서 만나지는 남녀상열시사는 그야말로 여러방면에서 치고들어갔다. 감히 떠벌릴수조차 없는 왕가의 이야기나 양반네들의 숨겨진 사생활속에서 찾아지는 스캔들등은 보는 나로 하여금 실소를 머금게 만들었다. 그러면 그렇지 사람사는 거야 어디나 똑같다, 하는 생각도 불러온다. 훗날에 세종대왕으로 추앙받는 충녕대군을 위하여 왕위를 양보했다던 양녕대군의 이야기가 사랑이 미쳐 폐세자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차라리 인간적으로 보였다.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끝내는 폐세자가 되어야 했던 양녕대군의 사랑은 권력에 의지한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진정 한남자로써의 사랑이었는지를 되묻게 하지만 말이다. 궁궐속에서 일어나는 동성애이야기야 많이 들었던지라 그리 새삼스러운 것도 없었다. 오직 왕이란 존재 하나만을 바라보는 그 수많은 시선들이 얼키고 설키다보면 어딘가에서부터 엉켜드는 건 당연지사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기생과 사대부의 사랑이야기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였다. 단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사례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고개를 주억거리게 했다. 자신의 노비를 사랑하여 끝내는 부부의 연을 맺었으나 허울좋은 양반네들의 질시로 인하여 끝내는 둘다 목숨을 버려야 했던 가이와 부금의 이야기는 가슴이 아팠다. 유난스럽도록 겉치레만을 따졌던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관습이 너무도 짜증스러웠다. 그런가하면 자신이 직접 남편될 사람을 골라 재가를 한 여인의 이야기는 통쾌하다.

시부모를 섬기지 않으면 내쫓고, 아들을 못 낳으면 내쫓고, 음란하면 내쫓고, 질투하면 내쫓고, 나쁜 병이 있으면 내쫓고, 말이 많으면 내쫓고, 도둑질하면 내쫓을 수 있다던 칠거지악이란 말을 듣다보면 어찌 저럴수가 있나 싶기도 하다. 물론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저런 말이 생겨날 수도 있겠거니 하다가도 여자란 존재가 얼마나 하찮게 여겨졌으면, 하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한다. 하기사 혼인을 하는 당사자의  맘과 당사자의 뜻은 거기에 없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싶기도 하다. 여자는 정말 바보같이 살았다. 그렇게 바보처럼 살았다는 말보다는 차라리 일부종사를 거부한채 자신의 인생길을 자신이 만들어갔다던 여인네들의 이야기나 윤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를 선택했다던 여인네들의 이야기가 듣기에 더 좋은 까닭은 무엇이란 말인가.. 거드름이나 피우며 허세만을 부리던 옛시절의 남자들 모습은 정말이지 상상하기도 싫어진다.

영조시대에 경상도 산음현에서 일곱살 먹은 여자아이가 사내아이를 낳았다는 보고를 하여 조정을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암행어사를 보내고 조사를 해 본 결과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서로 접해있던 안음과 산음이란 두고을의 이름이 안의와 산청으로 고쳐져 지금까지 내려온다는 이야기는 재미있기도 하다. 음란하다는 뜻이 들어있었던것도 아니었는데.. 그런가 하면 삼의당 김씨와 남편 하립의 사랑이야기는 지금 시대에서조차 귀감이 될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신혼첫날밤부터 서로를 향한 사랑의 시를 주고 받았다던 그들에게도 물론 힘겨운 시절이 있었다. 가난하였기에 자신의 머리를 팔아 남편의 과거길에 노자를 만들었다던 삼의당 김씨. 결국 과거에 몇번을 낙방하였지만 그들은 낙향을 하여 새로운 삶을 이어가게 된다. 그야말로 전원생활로 접어들었으니 그들의 시심과 사랑이야 더욱 더 깊어졌을 것이다. 양반이었음에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는 것을 서글퍼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사랑으로 함께 했던 그들의 삶이 참 아름답게 보여진다.

많은 사랑이야기를 읽었다. 원칙적으로 이혼이 허락되지 못했던 조선시대에는 정이 없어도 그냥 살아야 했다.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평생을 살아간다는 건 그야말로 생지옥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런 와중에서도 남자들에게만큼은 어느정도 자유로운 세상이 허락되어져 아내외의 다른 여자들을 첩이라는 이름으로 들여놓기도 하였지만 여자는 죽은듯이 그렇게 살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이 책속에는 천국같은 사랑이야기도 있지만 지옥같은 사랑이야기가 더 많다. 조선이라는 시대에는 왕과 양반네들만 살았던 것이 아니었기에 숨겨진 백성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다던 작가의 말처럼 조선시대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었다. 더더욱이나 여인들을 배경으로 보여졌던 이야기들이었기에 많이 바뀌어진 지금의 세상을 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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