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종교를 믿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라고 위협하는 종교들은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근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위협을 하는 종교나 종파가 한둘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이슬람교 종파는 알라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주장하고, 어떤 기독교 종파는 예수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종교들 중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경우가 무수히 많지요. 그런데 이런 종교나 종파에 따르면 그들의 신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자보다 다른 신이나 우상을 믿는 자를 더 미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의 신은 '질투하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질투하는 신은 아무 신도 믿지 않는 자는 그래도 용서해 줄 가능성이 있는 반면 다른 종교를 믿는 자는 가차 없이 지옥에 보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협하는 신이 여럿인데 그 중 특정 신을 믿을 경우 한편으로는 지옥에 갈 가능성이 줄어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가능성이 오히려 늘어납니다. 운 좋게도 자기가 선택하여 믿은 신이 정말 존재하는 경우 그는 지옥에 가지 않겠지요. 하지만 자기가 믿은 신이 아닌 다른 신이 존재하는 경우 그는 괘씸죄에 걸려 1순위로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위협하는 신들 중 어느 한 신을 믿는 것이 줄서기 모험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특정 신을 믿는 것이 '믿어서 사실이면 좋고 사실이 아니라도 손해 볼 것은 없는' 일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줄은 잘못 서면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따라서 줄서기에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중립을 취하는 것이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을 더 줄이는 방법일 것입니다. <중략>... 자기를 믿지 않는다고 영원한 지옥에 보낼 정도로 불합리하고 비도덕적인 신이라면 그 신이 자기를 믿는 신자라고 해서 지옥에 보내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불합리하므로 믿는다'라는 말이 있지만 철저한 불합리는 모든 인간의 예측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나는 열심히 믿었으니까 천국에 갈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단순하고 소박한 믿음일 뿐이지요.
 

엊그제 읽은 책『 살아있는 날의 선택 』의 95~97쪽에 나와 있는 대목이다.
이 글은 post it이라고 하기엔 좀 그런 면이 없지않아 있는 듯 하다.
하지만 나름대로 나의 견해와 일치되는 면이 있어 슬며시 고소함을 느끼기도 했기에 여기에 적어본다.
단순히 비종교인들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작자는 '질투하는 신'이라고 정의를 내렸지만 나는 '이기적인 신'이라고 늘 말을 했었다.
사랑을 이야기하고 죽음뒤의 평안을 이야기하는 모든 신들에게서 '오직 나하나만' 이라는 컨셉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까닭이기도 하다.
천국에 가면 금방석이 깔려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자주 만나기도 하지만
도대체 그 어떤 것들이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 수 있는가 생각하다가
결국 나는 그 사람이 믿는 신이 너무도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이기적인 신이 아니었는데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여러번 해 보았다. 아마도 후자가 맞을 것 같은데...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한번 물어나보자. 이단이니 사이비니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들 역시 사랑이라고 말할 것이며 죽음뒤의 천국을 말할 게 뻔하다.
거두절미하고 모든 것은 자신의 몫이다. 죽음뒤의 세상을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단순하고 소박한 믿음일지 모르지만 그런 믿음의 가치 역시 자신만의 몫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제각각의 생각과 선택을 가진 채 살아간다.
그러니 그냥 나름대로 살아가게 놔둘일이다.
세상속에는 모두에게 적용되어지는 것도 있지만 하나에게만 적용되어지는 것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나 하나에게만 적용되어지면 그만인 것들을 마치 모두에게 적용되어져야 하는 것처럼 말하지는 말자.
그것 또한 이기적인 것이므로...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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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날의 선택
유호종 지음 / 사피엔스21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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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나는 또하나의 자기계발서일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책을 펴 목차를 살펴보는 동안 놀랍게도 죽음을 준비하기 위한 우리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다. 부록으로 보여지는 WILL-PAPER 속의 유언장이나 의식이 분명할 때의 의료조치에 대한 요청서 등등.. 우리가 평소에는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는 그런 소재였던 것이다. 어떤 내용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well-being 이란 말이 우리의 생활속에 자리잡은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지금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well-being을 꿈꾸며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well-dying 을 말하고 있었다. well-being과 well-dying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 보았다. well-being을 사전을 찾아보면 육체와 정신의 건강이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를 통틀어 일컫는 개념이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well-dying 역시 그런 뜻으로 쓰여진 건 아닐까? 좀 더 행복하고 아름답게 죽기 위한 삶이나 문화를 우리곁에 가까이 두는 것 말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이 비대해진 것만은 사실인 듯 하다. 하지만 그 죽음 뒤의 세계를 향한 맹목적인 것들로 인하여 우리 곁에는 종교라는 허울이 너무 난무하는것 같아 때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언제였는지 남편과 죽음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났다. 나는 물론 죽음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주의였지만 남편은 달랐다. 그도 그럴것이 유교적인 관습속에서 살아온 집안의 장남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야 하는 것이니 절대로 무덤은 쓰지 말고 화장을 해달라고 말했다가 우리집안에 화장은 없다고 큰소리로 맞받아치던 남편의 얼굴이 떠올라 슬며시 또한번 웃음이 났다. 하지만 그렇게 완강하던 남편도 지금은 화장을 인정하고 있다. 이 책속에서도 죽음으로 이르는 혹은 죽음 뒤의 세상이 있다고 믿는 종교적인 관념이 너무 과하지 않느냐는 식의 대목이 보인다. 그런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살아있을 때,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나의 죽음으로 인하여 생겨날 문제들에 대해 좀 더 냉철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위한 대안을 마련해 놓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라고 작자는 말하고 있음이다. 하지만 죽음을 공포스럽고 혐오스러운 이미지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현실이 그런 일들을 밖으로 드러내기 꺼려하니 더욱 더 힘든 과제가 되어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는 작자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죽음.. 사실 나는 죽음이란 의미를 그렇게 두려운 존재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내일 당장 내게 죽음이 온다해도.. 남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를 하지않는 지독히도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남편의 핀잔을 들었던 때도 있었지만 이 책속에서 말하고 있는것처럼 '있음'과 '있었음'의 차이일 뿐이다. 현재형 또한 과거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는지.. 작자의 말처럼 '있었음'을 인정하기만 하면 될 것을.. 언제였는지 TV를 통해 식물인간으로 정말 오랜 세월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의 경우를 본 적이 있다. 그 때 내가 이렇게 말했었다. 혹시라도 내가 저런 경우가 된다면 나를 도와 준다고 생각하고 저렇게는 만들지 말아달라고.. 저것은 환자를 위한 마음이 절대 아니라고.. 단지 가족이란 이름으로 '도리'를 따지는 형식일 뿐이라고.. 사람이 사람으로써의 역할을 하지 못하며 일년을 산들 무엇하고 십년을 산들 무엇하겠느냐고.. 지금 내가 생각해보아도 차가운 말임에는 분명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도리'보다는 '편히 죽을 수 있는 권리'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의학계에서 '안락사'를 인정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 책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호스피스'제도가 우리나라에서도 하루빨리 자리를 잡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죽음에 이르는 순간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내게도 그런 순간이 왔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었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사회관념이 아직까지도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일까?  나는 또다시 유교적인 관념을 탓하고 만다. 작자의 말처럼 나도 죽음에 대해 준비하는 과정을 다시한번 생각해 봐야겠다. 살아있을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다시한번 진지하게 생각하며 부록으로 나와 있는 것들을 채워보는 시간을 한번 가져보리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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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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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자야지... 침대에 누웠는데도 나는 킥킥거린다. 완득이와 선생 똥주 사이에서 양념 역할을 해 주었던 앞집 아저씨의 존재가 생각나서. 그리곤 웃음이 눈물로 변해버린다. 혼자서 훌쩍거렸다. 수급대상자이면서도 마음으로 보살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완득이의 속깊은 서러움이 생각나서.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민층이란 테두리를 둘러쳐 놓은 세상속을 걷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삶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 또한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세상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살아왔던 먼 날의 기억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책을 읽기 전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완득이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 삶의 여정속에서 내 모습을 찾아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했다. 완득이.. 완득이는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대변인이었을거라고 생각한다. 완득이 안에 숨겨놓았을 작가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쩌면 저리도 신랄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서민층의 모습을 그려낼 수가 있는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어했던 작가의 마음이 이해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미 다른 동네로 이사가 버린 하나님한테 똥주 좀 죽여주세요 기도를 하는 완득이..  등에 제 집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달팽이처럼 건드리지만 않으면, 옆구리 찌르지만 않으면 그저 조용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완득이를 세상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난쟁이인 아버지를 숨기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말하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그것조차도 세상은 완득이더러 나쁘다고 한다. 고슴도치처럼 사랑을 가슴에 숨겨놓아야 했을 난쟁이 아버지의 서러움을 누가 알까?  선생 똥주의 접근조차도 완득이에게는 참을수 없는 가벼움이었을 게다. 이해하는 척하는 것과 진실로 이해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완득이는 이미 안다. 어쩌면 그런것들이 싫어서 제 속으로만 숨어들었을 게다. 하지만 진실은 통한다고 했던가? 방법이야 어쨌든 선생 똥주에게 점점 마음을 열게 되는 완득이의 모습을 보면서 그래, 세상은 어차피 혼자 살수는 없는거지.. 한다. 나 역시 완득이처럼 나하고 상관없는 일에는 지독히도 무심하게 살았었다. 완득이처럼 서로 피해 안주고 조용히 살다 죽는게 장땡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었다. 그런데 살면서 보니 딱히 그런것도 아닌 듯 하다. 정말 세상은 남끼리 바글바글 얽혀사는 곳이니까. 5%안에 드는 인생이 아니라면 어차피 그 바글바글한 세상속에서 살아야 하니까.

이 세상에는 똥주처럼 정말 한 대 패주고 싶은 말만하는 족속들도 많다. 어쩌면 그리도 이론에만 빠삭한지, 어쩌면 그리도 말은 잘하는지...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찾아가면서 저 인간 좀 빨리 데려가 주시면 안되나요? 들어줄 기도가 많이 밀렸다면 제 기도를 우선적으로 처리해 주시면 안될까요? 그것도 안된다면 그저 제 앞에서만 없어지게 해 주시면 안될까요?.. 부탁하고 싶은 인간들 정말 많다. 일주일 내내 죄짓고 살다가 오늘 하루만 여기와서 회개하면 되는겁니까?  오지랍도 넓습니다그려.. 기도한 적도 정말 많다. 선생 똥주의 모습을 보면서 오래전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던 위장취업이란 말이 떠올랐다. 완득이처럼 나도 그랬었다. 이미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가진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해서 없는 사람들의 속까지 다 안다고 할 수는 없을테니까.. 상대를 진실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 주지 못하면서 다가가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상처로 남는지 나는 안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정말 완벽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인정하기에 완득이를 바라보는 선생 똥주의 시선이 따스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리라.

제 안에 핵을 품고 있는데, 그거 잘 못 뿜으면 여럿 다치겠다 싶어서, 라던 체육관 관장님의 말씀.. 제 안에 핵 하나씩 품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수도없이 씨불놈을 외쳐대던 앞집 아저씨의 가슴속에도, 잘난 아버지의 처세술이 싫어서 뛰쳐나온 선생 똥주의 가슴속에도, 동네를 접수하겠다고 체육관을 찾은 중학생 녀석의 가슴속에도 저마다의 핵 하나씩은 자리하고 있을테다. 어쩌면 그 핵이 있어 살아가는 이유로 삼을 수도 있을테다. 킥복싱을 통해 화산처럼 분출해냈을 완득이의 가슴속에서 새싹처럼 파릇했을 윤하와의 풋사랑. 물컹물컹한 토마토에 입을 댄 것 같았던 첫 키스에는 달콤함이 없었다.  이쯤에서 나는 슬며시 어깃장을 놓는다. 그저 아름답게만 포장하려고 애쓰는 사랑이란 존재의 가치에 대해 한방 먹여준 작가에게 박수를! 

완득이의 가슴앓이를 정리해주는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후욱~하고 숨을 내쉬었다.  정말 작게만 느껴지던 내 인생의 크기.. 흘려보낸 내 지난날의 시간들이 등짐처럼 나를 휘어지게 했다. 그 휘어짐을 피기까지는 정말 한참이 걸리겠지.. 작은 것들이, 평범한 것들이, 주변에 머무는 것들이 소중하다고 늘 말을 하면서도 나는 그렇지않은 모습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분명히.. 거창하고 대단하지 않아도 평범하지만 단단하고 꽉 찬 하루하루를 꿰어 훗날  근사한 인생 목걸이로 완성할 것이라던 완득이의 다짐을 나도 따라해 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돌아볼 수 있었던 내 성장소설의 단편은 정말 아픔뿐이었던 것일까? 되물었다. 어쩌면 나 스스로가 아픔뿐이었다고 정의내린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되물었다. 마흔 중반을 살아내면서도 끝없이 되물어야만 하는 삶의 아이러니다.

불법체류자의 삶속에 숨어 있던 우리 사회의 모순점들은 너무도 많았다. 장애인들의 삶속에는 우리가 말로만 인정하며 피해갔던 뻔뻔함이 너무도 많았다. 비장애인이면서도 장애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우리의 현실을 뼈아프게 짚어내던 작가의 솔직함이 너무도 고맙게 느껴지던 시간이었다. 또 한가지 정말 빼놓고 싶지 않은 이 대화체..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슴속이 후련해지곤 했었다.

"완득아! 완득아, 새끼야 빨리 문 열어!" 
"야이, 완득인지 만득인지 씨불놈아! 빨리 문 안 열어! 이것들이 밤마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완득이 문 열었잖아, 이 양반아!"
"어떤 씨불놈이 밤만 되면 완득인지 만득인지를 찾고 지랄이야! 야이 씨불놈들아! 니들은 전화도 없냐!"
"완득이네 집에 전화 없다잖아, 이 양반아!"
우리 집에 전화 있다. 하나님, 이번 주 안에 똥주 꼭 죽여주셔야 합니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정말 듣기에 민망한 대화들이다. 하지만 작가는 묘하게도 그 천박스럽고 민망한 느낌을 비껴간다. 오히려 저런 대화속에서 감춰두었던 핵이 하나씩 조용히 터져버리게 만든다. 그렇게 속시원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또한 이 책의 매력이지 싶기도 하다. 책장을 넘길때마다  선명하게 그려지던 밑그림들..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TV문학관 한편을 본 것처럼 생생하다.  가슴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너무 많았던 소설 <완득이>는 정말 재미있다. 정말 솔직하다. 정말 시원하다. 정말 눈물난다. 누구라도 한번쯤은 손잡아주고 싶게 만드는 완득이 화이팅!  완득이를 만들어 낸 작가 화이팅! /아이비생각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이 미친 세상이 왜 자꾸 건드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34쪽)

이 세상이 나만 당당하면 돼, 해서 정말 당당해지는 세상인가? 남이 무슨 상관이냐고? 남이 바글바글한 세상이니까! 호킹 박사처럼 세상에 몇 안되는 모델을 두고 그런 사람도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다.(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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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구급법 Outdoor Books 8
일본산악회 의료위원회 지음, 최종호 옮김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얼마전에 <100명산 수첩>이란 책을 접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산에 대해 알 수 있어서 좋았지만 <등산 구급법>이란 책제목을 보면서 꼭 필요한  등산수칙이 아닐까 싶어 내심 기대를 했다. 자주 산행을 하면서도 솔직하게 말하면 사고시의 구급법에 대해서는 완전 먹통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 한창때 지방 어느산을 갔을 때 한껏 멋을 부린다고 청바지를 입고 왔다가 오도가도 못하던 아가씨의 청바지를 쭈욱 찢어버렸던 기억이 났다. 시뻘겋게 부풀어 올라 있던 피부를 보면서 혀를 찼었는데... 지금이야 멋드러진 기능성 등산복이 많지만 그때만해도 그저 예쁘게 차려입고 나서는 것이 고작이었을 때니 말이다. 책을 받아보고 목차를 살펴보았다. 앗, 이것은 완전히 의학상식이네!  어찌 읽을까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맨 뒷장부터 시작, 거꾸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등산 전의 준비부터 알고 싶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산행을 시작하면서 모임의 대장이 항상 준비운동을 시키곤 하던 생각이 났다. 군말없이 잘 따라하곤 했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등산을 위한 기본적인 트레이닝과 스트레칭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새삼스럽게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트레이닝과 스트레칭은 굳이 등산을 하지 않는다하더라도 우리의 건강에 이로우니 그야말고 일석이조가 아니고 무엇이랴 싶기도 했다. 수분섭취와 보충제를 다루어주었던 대목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곤 했다. 별 거 아닐거라고 생각하며 무시했던 것들이 중요한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책을 읽다가 문득 나는 나의 베낭을 가져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비상 장비 목록중 나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하게 그러나 꼭 챙겨야 할 것들을 빼놓은 채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특히나 해드랜턴의 경우 당일등산에 왜 그런것을 가지고 다니느냐고 빈정도 많이 샀었지만 꼭 필요한 것이라는 말에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다. 하지만 접착 테이프의 경우는 예외였다. 왜 이런게 필요하지? 생각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나의 어리석음을 탓하게 되었다. 역시 꼭 필요한 목록임에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구급상자의 경우 사실 나한테는 없는 목록이지만 다행히도 소독약이나 진통제, 설사약, 반창고등은 베낭속 작은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그래도 빵점은 아니다 싶어 휴~ 숨을 내뱉는다.

지난 겨울에 함께 등산을 했던 언니가 아이젠없이 산을 올랐다가 하산길에 결국 미끄러져 엄청 고생했던 적이 있었다. 나의 아이젠을 한쪽 빌려주었지만 그 덕에 언니와 나는 산을 내려와 이삼일을 꼬박 몸살로 고생을 했었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이 책속에는 산에서 만날 수 있는 악조건들이 모두 제시되어 있다. 뱀을 만났을 때는 이렇게 하고, 벌레에 물렸을 때는 이렇게 하고, 식물에 의해 중독이 되었을 경우에는 이렇게 하고, 실족이나 추락을 했을 경우에는 이렇게 하라, 등등등... 정말 많은 경우의 수를 보여주고 있음이다. 장갑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큰소리치던 동료하나가 바위를 오르다가 손톱이 빠졌던 경우도 있었는데 역시나 이 책속에는 그런 상태에서의 구급법이 소개되어져 있었다. 새 등산화를 신고 갔다가 양쪽 새끼 발톱이 까맣게 죽어버렸다 다시 나온 기억이 새롭다. 등산화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게 아니냐고 업체를 찾아가 콩콩 따져 물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미안하다. 

나는 전문적인 등산가가 아니다. 그러니 이 책속에서 소개하는 설산에서의 눈사태나 설맹, 동상 또는 고산병을 다룬 이야기보다는 봄 산과 여름산에서 햇볕에 그을리는 것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여름 산에서 벼락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계곡등반에서 물에 빠졌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따위의 이야기들이 더 가슴에 와 닿았다. 작은 책을 통하여 많은 것을 보여주고 알려주었지만 역시 사람은 누구나 제게 맞는 옷을 먼저 입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하여 사고대책방법이나 구급법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놓치고 지나칠 수 있었던 것을 챙겨준 부분도 있었으니 내게는 참으로 고마운 책이 아닌가 싶다. 며칠후에는 또 산행예정이 있다. 얼었던 땅이 녹는 봄산행 역시 만만찮다. 함께 가는 동료들에게도 조심, 또 조심을 외쳐야 할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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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가족 세이타로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김소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남의 집에 있을 때 더 사이가 좋아보인다는 아들의 말을 듣고 가족이라는 거에 대해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기, 한마디로는 말 몬하지... 말하자면 짐 비슷한 기라. 여행할 때 짐. 무거버서 영 몬견디겠다 싶을 때도 있재.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엄꼬. 짐이 있어야 여행을 할 수 있으이..."(35쪽) 여행의 짐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책은 이렇게 시작부터 나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이건 어느 특정한 가족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늘 곁에 있으나 느끼지 못하는 가족이란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 그런 책이다,하는 지레짐작으로 이미 내 마음은 무거워지기 시작한거다. 가족이란 말속에는 상반되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듯 하다.  평화롭다는 의미와 자주 어긋나는 의미, 그렇게 다른 의미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상황속에서 가족이란 말은 공존한다. 나는 어느쪽일까? 서로 이해하고 아껴준다는 말은 이론만큼이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개인적인 관념이 먼저 앞서는 탓이기도 하겠지만  우선적으로 나를 앞세우는 이기심이 먼저인 까닭이지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없어서는 안될, 없으면 뭔가 허전하고 빠진 듯한 그 느낌을 부정할 수 없으니 사람이 살아내는 삶속에는 숱한 모순덩이들이 굴러다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다.

책속의 아버지 세이타로는 유랑극단의 배우다. 옛날에는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아버지는 존재의미가 약하다. 그냥 아버지라는 말로써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성벽을 굳건하게 지켜내고 싶어한다. 나는 아버지니까! 늘 이렇게 외쳐대고 있을 뿐이다. 실세가 없는 아버지의 권위는 늘 바닥이다. 더구나 경제력이 없는 아버지, 술고래인 아버지는 더더욱... 삶과 전쟁을 치루듯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아버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머니.. 어머니는 그저 어머니일 뿐이다. 고전적인.. 자신의 존재가치를 따지기 이전에 자식이 있으므로 자신의 자리는 여기라고 여길 뿐이다. 그런 어머니가 어느날 모두에게 편지를 남긴 채 종적을 감추었다. 막내가 열여덟살이 되고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되어지던 그 때에 어머니는 자신의 길로 갔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는 보여주지 않지만 나는 단지 그 어머니의 앞길이 지금까지보다는 가치있는 길이었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자라나 제각각의 길로 간다. 이미 성인이 되어버린 아이들이 새삼스럽게 늘 그자리에 있어주었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존재가치에 대해 되돌아 생각하게 된다고하여 온전히 그 의미를 다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게다. 그렇기에 다이치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리셋하고 싶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서야 할 스테이지로 나아가고 싶었다.(143쪽)
리셋만 한다면, 자신의 일상은 분명 변한다. 다이치는 그렇게 생각했다.(145쪽)

그렇기에 우리는 살면서 수도없이 리셋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현재 처해있는 상황이 나를 붙들고 있는거라고, 그 상황만 벗어날 수 있다면 뭔가 달라진 삶을 살수도 있을거라고... 늘 그렇게 생각하고 거기에 맞는 일탈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왠지 가슴 한쪽이 서늘해온다. 누구나 그런 일탈을 감행한다면 가족이란 의미, 또는 가정이란 의미가 너무 낡아빠진 신발짝 같은 느낌이 들것만 같아서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수는 없을까? 해서 즐거운 일만 하면서 살아갈수는 없는 것일까? 불행하게도 우리의 삶이란 것이 늘 그렇게 좋은 것만 던져주지는 않는 것 같다. 이 책속의 아버지 세이타로의 인생길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할 일이 다르다는 것.. 그것이 삶이 우리에게 던져준 명제다. 하고 싶은 것을 쫒다보니 늘 허울뿐인 현재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고맙게도 작가는 아버지가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즐거운 일을 하게 해준다. 모두가 떠나가 버리고 막내아들만이 곁에 남아 있을 때 어쩌면 아버지는 현실과 타협하는 방법을 배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니는 떠났지만 그 아버지 곁으로 다시 돌아오는 아들과 딸의 모습, 그리고 대중연극을 통하여 그들의 속내를 비춰주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저 아래 어디쯤에서부터인지 울컥하며 올라오는 무엇이 있었다. 가족이란 의미가 그렇게 쉽게 닳아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이치의 생각처럼 모든 것을 리셋하지 않았어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던 딸 모모요의 여정을 보면서 현실직시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포장되어진 자신의 삶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랑했던 모모요의 대담성이 한켠으로는 안스럽기도 하지만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남들은 자신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348쪽)

책의 표지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는 이 책을 유머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웃음을 유도하는 것조차도 더 아프게 다가왔던 세이타로 가족의 긴 여정. 학습부진아인 막내아들 간지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꾸려가고 있었지만 간지의 그 어설픔이 혹은 간지의 그 순수함이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그 무엇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일 뿐인데 우리는 왜 타인의 시선속에 묶어두려 하는지. 내가 살아내야 할 온전한 나의 몫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타인으로 하여금 그것을 평가하게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그저 내 몫의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면 그 뿐인 것을... 늘 가까이에서 머물기에, 늘 바라보면 그자리에 있어주는 존재이기에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안일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가족은 아닐까? 정말 그렇게 살아왔다면 다시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손을 내밀면 만져질 수 있을만큼의 거리에 있기에 더 소중한 것들에 대하여.../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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