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의 비망록
주제 사라마구 지음, 최인자 외 옮김 / 해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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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다. 주제 사라마구라는 이름하나만으로 독자를 끌어모을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임엔 분명하지만 조금의 내용파악조차 하지 못했던 건 누구도 탓할일이 아니다. 수도원의 비리를 파헤치고자 했던 걸까? 딱히 그런 것만도 아닌 듯 하다. 종교적인 이념에 허를 찌르는 그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이 책의 소개글처럼 감동적이고 매력적이고 진실한 러브스토리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랬다면 아마도 내가 느끼지 못했던 것일게다. 비망록이란 단어의 뜻을 빌려서 이야기를 하자고 말한다면 우리의, 아니 책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들 모두의 일상 자체가 비망록에 속한다. 우리 모두가 잊으면 안되는, 잊어서는 안되는 사소한 것들의 비망록...

<눈 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서 주제 사라마구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눈 먼 자들의 도시>가 나에게 주었던 그 놀라움에 대해서는 두말 할 나위가 없겠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그토록이나 신랄하게 파헤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놀라웠었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저 편안한 느낌으로 이어지던 문장들이 놀라웠었다. 그래서 나는 주저없이 선택했었다 <눈 뜬 자들의 도시>를.. 눈을 뜨고 있던 사람들이 눈을 잃어버린 채 겪어내야 했던 일상들과 그 잃어버린 눈을 되찾고 다시 눈 뜬 자들이 되어 살아내야 할 그들의 일상이 궁금했었던 까닭이다. 어쩌면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작의 느낌을 이 책속에서도 만날 수 있을거라고 기대했었던 것은 온전한 나의 욕심이었을지 모르겠다. 이 책을 무릎위에 올려놓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작자와 나의 힘겨루기는 시작되어진 것일게다. 이제까지 접해보았던 그의 책과는 왠지 다른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는 당혹스러움 앞에서 나의 발걸음이 자꾸만 서성거려야 했기에..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마녀재판의 현장속에서  외팔이 발타자르와 남과 다른 능력을 가진 마녀의 딸 블리문다의 만남이 우연이 아닌 필연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주앙 5세와 마리아 아나 왕비에게 아이를 갖게 해 주겠노라고 신처럼 약속을 내려주던 수도사의 그 오만함은 또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마침내 아이는 태어나고 그렇게하여 '마프라'라는 소도시에 수도원 건립을 위한 일들이 착수된다. 그 고된 노역의 현장 하나 하나가 비망록으로 남겨진다는 건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인원보충을 위하여 아니 완공날짜를 앞당기기 위하여 징집되어지는 남자들의 가정은 깨어지고 그들의 행복은 거기서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일 할 수 있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발에는 족쇄가 채워져야 했고 그들의 손목에는 죄인처럼 오라를 지워야만 했다. 누굴 위해서였을까? 새로 태어난, 그야말로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공주를 위해서였을까? 하지만 그 피상적인 존재를 앞세운 종교적인 이념과 권력 남용의 허세를 놓치면 안될 것 같다. 완성을 앞둔 수도원으로 옮겨진 수도사들의 조각상을 보면서 블리문다는 이렇게 중얼거렸었다. 나는 그들이 좌대에서 내려와 우리처럼 인간이라면 좋겠어요. 조각상하고 대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에요. 발타자르가 대답했었다. 어쩌면 그들끼리만 있을 때에는 서로 이야기를 나눌지도 모르지(576쪽)... 참 허탈하다. 누가 누구를 구원하는가!

날으는 기구 파사롤라를 떠오르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의지를 모으기 시작하는 블리문다. 배고픈 상태에서만 모든 것들의 영혼을 볼 수 있다는 블리문다를 위하여 날마다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던 발타자르. 기이한 그들의 모습이 하나의 전설처럼 퍼져나갈 때 드디어 파사롤라는 떠올려진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성령이 되었다. 하지만 그 성령은 곧 사라져버리고 인간의 나약한 가슴속에서 작은 파동으로 기억되어진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 파사롤라가 다시 떠올려졌을 때 블리문다와 발타자르에게 이별이 찾아왔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주 오랜 시간을 이 책과 싸워야 했다. 진실하고 매력적이라던 발타자르와 블리문다의 그 신비로운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까닭이었을까? 지루했고 답답했고 꽉 막힌 동굴속에 갇혀버린 듯한 그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토록이나 나를 힘겹게 했던 것일까? 되짚어보면 우리가 살아내야 할 모든 것들이 비망록이다.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나도 피상적인 존재,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지 않는 그런 존재에 스스로 얽매인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올무를 그가 끊어주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징집되어져 어쩌면 죽을수도 있었던 그 처절한 노동의 현장속에서 그들이 무엇을 위하여 땀과 피를 흘려야 했는가를 다시 생각해야만 할 것 같다. 파사롤라라는 기계를 통하여 인간의 의지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책에서 묻고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도 묻고 싶다. 정말 인간의 의지는 하늘에 맞닿을 수 있는 것일까?  하루하루가 역사를 이루는 작은 조각이라는 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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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다. 정말 오랜만에.. 하지만 이 영화, 볼 때마다 왠지 껄끄럽다. 그리고 섬뜩해진다. 1995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미리 가 본 시대는 2029년이다. 지금이 2009년. 딱 20년후의 일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왠지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 아침 로봇에 지배되는 세상이라는 신문기사를 읽게 된다. 나도 모르게 끄덕거려진다. 이미 오래전부터 컴퓨터라는 기계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이제는 낯설지가 않다. 그 안에서 살아있던 사람이 죽어버리고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 되살아나는 것이 그리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이 영화가 미리 가 본 시대에서는 만연되어지는 일이 아닐까?  환타스틱이라는 장르 자체에 그다지 호감이 가지 않는다. 호러라는 장르 자체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황당할 것만 같은 냄새를 지독하게 풍겨대는 이 애니메이션에 시선을 고정시켜버린 까닭이 무엇일까?

이 영화는 묻고 있다. 당신은 누구냐고.  너의 영혼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바람처럼 속살거린다. 사이보그가 살아숨쉬는 세상이 되기도 전인 지금 우리가 늘 외쳐대고 있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지금 우리가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아니 잊어가고 있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 이미 과거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2029년의 이 영화가 되묻고 있는것만 같다. 그러니 잃어버리지 말라고, 그러니 잊으면 안된다고 충고해주는 것만 같다. 우리가 지금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지금 잊고 사는 것은 무엇일까?

네트워크라는 거대 정보의 정체성앞에서 우리는 왜 아나로그적인 정체성을 들먹여야 하는지 다시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전자두뇌는 2029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바로 우리 곁에도 전자두뇌는 살아있다. 아주 작은 모습으로 내 손안에 가볍게 들어올 수 있을만큼의 무게와 크기로 나를 이미 점령해버린지 오래다. 아니라고 거부한다면 당신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섬뜩하다. 아주 작은 것들로부터 나를 지배하도록 허락해버린 상태이니 이미 내 안의 많은 것들이 하나 둘씩 나를 떠나고 있었을 것이다. 느끼지 못하는 아니 느끼기 싫어하는 그것도 아니라면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 그런 미세한 감정들이 이미 오래전에 나를 옭아매었을 것이다.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태되기 싫은 인간의 오만과 욕심. 동료의식을 느끼지 못하면 왠지 바보스러운... 어쩌면 바코드가 내 몸 어딘가에 찍혀져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떠오르는 것들이 참 많다. 기계인간이 되기 위하여 은하철도 999호를 타야했던 철이의 모습이 생각나고 너무나도 앞서버렸던 진화와 진보속에서 스스로가 묻혀버려야만 했던 천공의 성 라퓨타가 그렇다. 풀썩풀썩 썩어버린 것들의 잔재들만이 날아다니던 오염된 세상속에서 다시 희망을 보게 해 줄 수 있었던 것은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했던 나우시카의 그 마음 하나뿐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도대체 인간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생명을 요구하게 되는 전자 프로그램 인형사의 그 욕심에 허를 찔린다. 사이보그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멈춰버리게 할지도 모를 바닷속을 잠수하는 쿠사나기의 그 공허감에 그만 허탈해진다. 전자프로그램이었던 인형사가 운운했던 자기 의지는 또 무엇일까? 다시 생명이고 다시 사람일바에는 우리 지금부터라도 나우시카의 마음을 배웠으면 좋겠다.  아이덴티티 identity .. 나를 구성하고 있는 육체와 영혼의 아이덴티티가 필요한 세상이 아닐까 싶기도 한다. 우습게도...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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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요나라 사요나라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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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행복해질 것 같았습니다... 안녕...  그녀와 나, 피해자와 가해자. 하지만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지. 그리고 행복해질 것 같았기에 안녕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집단성폭행.. 16년전의 기억에 발목을 묶인 채 어느곳으로도 도망치지 못했던 그녀와 내가 그렇게 만나 행복해질 것 같았던 순간을 맞이하기까지 그녀는 피해자였고 나는 가해자였다. 내가 떠나면, 내가 없어져 버리면, 내가 그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리면 그가 행복하게 잘 살 것만 같아서, 그를 용서하게 되는 게 싫었던 여자가 어느날 문득 안녕이라는 단 한마디 말만 남긴 채 그의 곁을 떠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찾아낼 겁니다. 아직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무슨 인연이었기에 그들은 그토록이나 힘겨운 싸움을 해야만 했었는지 알 수 없다. 서로의 불행을 핥아주며 그렇게 살았던 몇개월의 시간조차도 그들에게는 허락되어질 수 없었나 보다. 용서할 수 없었으나 끝내는 용서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 나쓰미와 나 슌스케의 이야기.

요시다 슈이치.. [파편], [돌풍], [열대어], [7월24일 거리], [나가사키], [악인]등 그의 작품이 의외로 엄청 많았지만 그를 처음 만나게 해 주었던 <일요일들>이란 작품이 떠오른다.  현란한 수식어들을 달고 있었던 탓에 그 작품을 만나게 된 것 같지만 그많은 일요일들속에 담겨져 있던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불안한 삶의 형태들을 기억한다. 도시라는 테두리속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연속이었지만 그들 나름대로 밀고 가야할 생의 수레바퀴는 제각각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고 기억되어진다. 요시다 슈이치의 문장속에는 저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와 끝내는 울컥 쏟아내버리고 싶은 그런게 있는 것 같다. 이 작품 역시 사시처럼 변해만가는 사회적인 편견을 앞에 두고서 당신들의 편견이 더 많은 아픔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절규하는 듯 하다. 제발 좀 색안경을 벗어보라고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덜컥 겁이 나기도 하는 순간이 갑작스럽게 찾아올 때도 있다.

아무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 순간의 분위기가 묘하게도 그런 상황을 연출해버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그녀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던 거다. 일이 그렇게 되어버리고 촉망받던 운동선수로써의 생활을 접어야 했을 때까지도 그는 잊을 수 있을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의 기억속에서 그 일이 일어났던 순간을 떼어내버릴 수 있을거라고만 믿었었다. 하지만 타인의 기억이 그와 그녀의 기억을 놓아주지 않은 채 물귀신처럼 잡고 늘어지는데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해버려야만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속에서 그들은 마주섰고, 운명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한 느낌으로 그들의 기묘한 인연은 시작되어진다. 행복해 질 수 없다면 차라리 불행을 받아들이자고.. 

범죄소설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나의 연애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묘한 매력을 모른체 할 수가 없었다. 이 소설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마치도 내가 지금 그 현장을 보고  있는것만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들의 곁에서 유령처럼 따라다니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들의 불행앞에서 나도 아파했다. 차마 가질 수 없었던 그들만의 행복앞에서 안타까워야 했다. 마침내는 그와 그녀일거라고 느껴지던 순간 가슴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던 그 울컥거림의 정체를 토해내고 싶었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앞에서도 우리는 모두 왜 그랬느냐고, 그러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책망한다. 그러고나서는 그 순간이 어땠었느냐고 잔인한 호기심을 드러내고야 만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아니 내가 경험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대해 잔인하게도 해부용칼을 들이대고야 마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또하나의 속성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무에게도 용서받지 못했기에 나 자신조차도 용서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의 앞에 섰을 때 그 아픔이 덜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조차도 용서할 수 없었던 그런 일이 생겨나게 했었던 원인앞에서야 그들은 후욱~ 긴 한숨을 뱉어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 하나가 그들의 가슴속에서 잉태되어지던 순간이 그들에게는 하나의 용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안녕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은 당신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사랑이었다는 걸 그녀가 몰랐을까? 아니 그렇지 않기에 그는 그녀를 찾아낼거라고 말했을 것이다. 너무나도 힘겹게 만난 사랑앞에서, 행복앞에서 이제 더이상은 무너지고 싶지 않았을 게다. 너무도 안타까웠던 말 한마디, 안녕.. 안녕..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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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탐정록 경성탐정록 1
한동진 지음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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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코난 도일이 창조했다는 명탐정 셜록 홈즈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탐정사무실 주소가 '런던 베이커가 221번지 B호"로 설정되었지만 실재하지 않는 주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전세계에 많은 팬을 갖고 있다는 셜록 홈즈.. 셜록 홈즈 박물관이 있는 것만 봐도 그 인기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그 셜록 홈즈가 일제시대의 조선 땅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설홍주. 그리고 셜록 홈즈를 도와 주던 조수 와트슨 역시 한의사 왕도손으로 다시 태어났다. 흥미로운 것은 셜록 홈즈나 와트슨의 발음이 설홍주와 왕도손과 비슷하다는 거다. 그 외에도 최초의 법의학자 손다이크 박사는 손다익 박사로, 하숙집 주인 허드슨 부인은 허도순으로 개명을 했다. 배경 또한 영국 런던에서 일제시대의 경성으로 바뀌었지만 셜록 홈즈의 그 명쾌한 추리를 생각해본다면 이 소설 역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재미가 쏠쏠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추리소설을 접해본지가 꽤나 오래된 듯 했지만 이 책을 손에 쥐는 순간부터 나는 숨가쁘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산뜻하다. 별 것도 아닌 사건, 즉 누구나 해결할 수 있는 사건에 매달리기 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일에만 매달리는 것 또한 하나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 책은 다섯편의 단편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사건을 쫓아가는 일인지라 단편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 사건들의 제목조차 <운수 좋은 날>, <광화사>, <천변풍경>, <소나기>등 우리나라 작가의 단편제목을 빌려왔다. 그렇다고해서 그 내용이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읽다보면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단편소설 내용이 떠올려진다.  

소설속에는 일제시대의 부도덕함이나 일본의 폭력앞에 무참하게 무너져내리는 상황, 혹은 그 폭력에 동조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인 모습들이 보여진다. 식민지였던 자신의 나라를 바라보며 한탄하는 설홍주의 내면 역시도 잘 표현되어져 있다. 철저한 증거와 논리를 바탕으로 추리를 하며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육체를 바탕으로 직접 발로 뛰는 사건 해결의 과정은 정말 깔끔하다. 현실을 도피하지 않는 현실주의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만의 외로움을 가슴속에 안고 사는 설홍주의 매력은 참 대단한 것 같다. 한의사 왕도손의 눈을 통하여 보여지는 설홍주라는 인물은 옳지 못한 것을 보면 옳지 않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 식민지의 아픔앞에서 현실과 타협하는 지식인들을 과감하게 꾸짖을 줄 아는 사람이다.

설홍주가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속에서 일제시대의 사회적인 시대상을 만나볼 수 있는 것도 대단한 수확이 아닐까 싶다. 모던보이나 스틱걸 혹은 신여성에 관한 이야기등도 그렇고, 신설정(지금의 신설동)이라거나 본정통(지금의 충무로 일대), 명치정(지금의 명동), 황금정(지금의 을지로) 같은 옛지명을 만나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었다. 또한 <황금사각형>이라는 단편속에서 족보를 통해 단순하지만 복잡하게 느껴지는 암호를 풀어가는 과정 역시 괜찮았다. 

얼마전부터 아들녀석이 <명탐정 코난>이라는 만화에 푹 빠져 지내고 있는 덕분에 나도 몇 편 보기는 했지만 명석한 추리력의 꼬마 탐정 코난을 보면서 무릎을 치기도 했었던 기억이 있다. 철저한 증거와 논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추리력이야말로 탐정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해설부문에서 소설의 배경이라거나 추리소설의 재미라거나 인물에 대한 탐구같은  소설에 대한  궁금증을 많이 풀 수가 있었다. 오랜만에 맛본 추리소설의 즐거움이었다. 형제가 함께 썼다는 추리소설 <경성탐정록>.. 한국 미스터리 문단에 새로운 자극이 되어주길 바란다는 책날개의 말처럼 이 소설을 계기로 한국의 미스터리를 많이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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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팅컬처 - 거짓과 편법을 부추기는 문화
데이비드 캘러헌 지음, 강미경 옮김 / 서돌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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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거짓말 한번 안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살아가면서 남을 한번도 속인적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 몇이나 있을까?  그렇다면 오직 정직과 청렴함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있는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수없이 많은 물음표들이 내 머릿속에서 서성거렸다. 과연 이 복잡하고 미묘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진정 필요한 속임수는 무엇일까? 저자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먼저 바보가 된다면 과연 이 세상은 맑고 향기로워질까?  그렇다면 나는 누구에게 얼만큼이나 속고 있으며 나 또한 누구를 얼만큼이나 속이고 있는 것일까? 지금 나를 속이고 있는 상황은 어떤 것이며 내가 속이고 있는 상황은 또 어떤 것일까? 그런데 나는 되묻고 싶었다. 그 거짓과 편법을 부추기는 문화를 누가 만들었느냐고..

나만 그러는 게 아니다,라는 소제목으로 이 책의 첫장은 시작되어진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속고 속이며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내가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말해주고 있다. 나만 정직하게 살면 왠지 바보가 된 것 같고 왠지 억울하게 느껴지고 왠지 손해보는 것만 같은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행위자체에 아무런 죄의식조차 갖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나만 그러는 게 아니라고... 총 여덟장으로 구분지어진 책의 내용을 따라가다보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참으로 많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왔다고 가슴 뜨끔하게 다가오는 부분들도 꽤나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도 그렇게 했다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죄책감조차 들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뭐.. 누구나 그런일 한번쯤은, 아니 몇번씩은 겪으면서 살아갈텐데 뭐.. 아니 나보다 더 심한 사람도 얼마나 많다고? 했었다. 

"공명정대한 판단을 해야 할 경우, 사람들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자신의 이익과 부합하는 방향으로 판단할 확률이 높다" (187쪽)

그렇다면 왜 그렇게 비양심적인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떠도는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자신의 출세와 욕심, 남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더 나은 환경속에서 잘살고 싶다는 욕망때문이다.  내가 일한만큼 댓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일리속에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모순점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나 혼자만의 주관적인 생각이라는 거다. 내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해주는데 당신이 나에게 월급 조금 올려주는 건 당연한일 아니야? 하는 식이다. 자신만의 당위성에 빠져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뭔가 부족한듯하고 불만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렇게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도 하고, 은근슬쩍 겉으로는 표시나지 않게 자신의 욕구를 채워가기도 한다. 남이야 어찌되든 말든 나하고는 상관없다.

최고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갈수록 커지면서 점점 많은 사람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무슨 짓이든 불사하려 든다. 이미 남보다 앞서 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압박과 불안감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극심하다. (114쪽)

너 왜그렇게 사느냐고, 너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이냐고 들이대며 그 한사람의 인격을 따지기 이전에 셀수도 없이 많은 유혹의 손짓과 달콤한 속삭임을 이해해야만 한다.  남보다 잘살고 싶다는 욕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책을 읽는 동안에 불현듯 내게 들려왔던 저자의 목소리가 있었다.  책속에서 만연하는 거짓과 편법들을 행하는 인간의 심리적인 모순보다는 그 거짓과 편법이 만들어져야만 했던 사회적인 병폐를 먼저 꼬집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저자는 우리 하나하나의 그런 심리적인 것을 탓하고자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수많은 예로 들어주었던 일들(거짓과 편법)이 왜 생겨났는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라는 말이었구나 싶었다. 아무리 많은 유혹이 난무한다해도, 아무리 많은 부패가 우리 사회속에서 확산된다고 해도 우리가 그것을 막아내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을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국세청이 덜 부유한 납세자의 탈세 추적에 비중을 두는 이유는 그들이 쉬운 먹잇감이기 때문이다. 중산층과 저소득층 미국인은 국세청을 상대로 길게 싸울 여력이 없다. (196족)

죄는 있으나 처벌은 없는 공직사회나 기업의 행태들앞에서 오직 힘없고 빽없는 서민들만이 세금의 먹이가 되고 있다는 말에는 아마도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어디 한군데 억울함을 호소할곳도 없는 사람들, 지금까지 잘 살아오다가  그야말로 별것도 아닌 일로 구속이 되고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예와 정말 나라가 시끄러울 정도로 크게 해먹은 사람들은 몇푼의 벌금만으로도 그들의 죄가 면해지는 현상황을 예로 들었던 대목에서는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나 역시도 그런 일을 한번 호되게 겪어본 경험이 있었던 까닭이기도 했지만 주변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중에 정말 그렇게 되었던 사람도 많이 보아왔던 까닭이다. 재수없어서 걸렸다는 우스개소리가 생각난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나만 재수없어서 걸렸다는 그 말이...

사람들이 규칙에 따르지 않을 경우 몇 가지 현상이 동시에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우선 성공하는 계층의 사기가 급증한다.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갈수록 보상은 커지고 처벌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학생들도 같은 이유에서 종종 속임수를 사용한다. 성적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속임수가 일반화되고 있다는 것은 정직해야 한다는 동료 집단의 압력이 거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210쪽)

우리는 왜 그런 사회를 만들었을까?  출세지향주의.. 자신이 살아왔던 삶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아주기 원하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기대.. 겉으로 보여지는 모든 것들로 판단하는 우리들의 가치관.. 그 모든 것들이 이미 어린시절부터 시작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좀 더 좋은 대학의 졸업장이 좀 더 좋은 직장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는 세상속에서 아이들에게 우리가 가르치는 것들은 불보듯 뻔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미 출발선에서부터 속임수는 시작되어진다고.. 말로는 그렇게 살지마라 하면서도 이미 우리는 아이들을 속임수의 수렁속으로 밀어넣고 있는거라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그야말로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깃발을 꽂지 못하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저자의 말을 빌어보자면 결론은 이렇다. 속임수를 사용하거나 속임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충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계속 밀고 나가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엉덩이를 걷어차이길 주저하지 말하는 것이다. (354쪽) 속임수 문화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우리가 바보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  무료로 음악을 다운받을 수 있다고 해도 가게에서 돈을 주고 CD를 사는 바보가 되어야 하고,거짓말을 밥먹듯이 한다고 남보다 앞서갈 수는 없다고 말하는 바보가 되어야 하고,기회가 생길 때마다 부패를 눈감아주기 보다는 고발하는 바보가 되어야 하고... 끝도없이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처럼 나는 과연 정말 바보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단연코 말하건데 나는 그런 바보가 되는 게 더 어려울 것 같다. 속임수를 줄이려면 '다들 그렇게 한다'라는 인식을 바꾸는 작업부터 선행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도 백프로 공감한다. 우선 '나'부터 속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몇몇 사람'으로, "소수 몇몇'으로, 그리고 '다들' 속이지 않게 될 것이라는 계몽적인 말에도 공감한다. 문제는 그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다는 거다. 

재미있는 것은 후기에 나와 있는 <치팅컬처> 출간 이후의 변화였다. 거짓과 편법의 예로 지적당했으나 처벌이 미미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다시한번 조치가 취해졌다는 것을 보고 쓴웃음이 났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다니는 사람 역시도 많았다고 하니 저자의 외침에 동조를 해야하는 것인지 모른척 해야 하는것인지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말인즉슨 옳다. 그런데 내가 바보가 되기는 싫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니 어찌하랴.. 나 먼저 바보가 되기보다는 너 먼저 바보가 되어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하랴.. /아이비생각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을 기억해두기로 한다. 바보가 되기는 싫지만 바보스러울수는 있을 것 같으니까..
다음은 특별히 부모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만약 부모라면 교육 체계가 인성 교육 프로그램이나 진지한 명예 규범을 채택할 때까지 기다리지 마라. 가정에서 윤리 교육을 실시하라. 아이들에게 규칙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규칙에는 정당하게 맞서야 한다고 가르쳐라. 아이들의 삶에서 돈과 지위가 최고의 선이 아닌 환경을 만들어라. (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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