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숲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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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시작부터 스포일러를 자처해야겠다. 무슨 말이냐하면 추리소설이나 영화속의 범인은 항상 곁에 머문다는 것이다. 늘 그랬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범인을 쫓아가는 형사의 주변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가까이 머무는 사람이 범인이라고 보면 대충은 맞아 떨어진다는 말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죽은자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쯤? 그렇다면 이 사건의 범인은 후자일까 전자일까? 추리소설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는 새 긴장감이 생겨난다. 누가 범인일까? 같은 호흡을 하며 범인을 쫓다보니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모양이다. 그런데 영화를 볼 때도 그렇지만 소설도 어느정도는 그 형식을 충실하게 따가가고 있는 면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범인을 알아맞추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설령 범인에게서 살짝 멀어졌다해도 소설의 중간쯤에 이르러서는 어느정도 범인의 윤곽을 그려내게 된다. 이 소설 역시 그런 것 같다. 그렇게 알아챘는데도 재미있느냐고? 물론이다. 사건은 사건대로, 해결해야하는 과정은 과정대로 그것을 풀어나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가 없다면 구성이 너무 허술한 탓일게다. 치밀한 구성과 속도감을 따라가다보면 나도 모르게 숨이 가빠온다. 어느순간 무릎을 딱,치게 된다. 그만큼 흥미롭다는 말도 될게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용의자 X의 헌신>을 읽고 났을 때 범인이 밟아가던 그 기막힌 범죄의 구성이 참으로 놀라웠었다. 그리고 그 밑에 깔려 있던 잔잔한 애정공세라니... 그 느낌을 다시 <잠자는 숲>에서 느껴보고 싶었다. 

<잠자는 숲>이라는 제목과 책표지의 그림 토슈즈를 보면서 나는 두가지를 떠올렸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는 동화와 언젠가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달구었던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이다. 엉망이 되어버린 그녀의 발모양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정말 놀라워 했던 그 때를... 이 책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발레리나들의 삶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의 열의와 준비된 노력이 없이는 프리마발레리나가 태어날 수 없다는 것.. 누구나 꿈꾸는 것을 누구나 가질수는 없다는 것.. 그랬기에 그것을 지켜내기 위하여 더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이야기의 모티브가 된 것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는 동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도 잘 맞아떨어진다. 초대받지 못한 마녀의 주술에 걸려 물레에 찔려죽을 운명이었으나 백년동안의 잠을 자는 것으로 죽음을 모면하게 되는 오로라 공주. 그녀가 잠들자 그녀 주위의 모든 것들도 잠이 들었었다. 모티브가 된 동화속 이야기와 이 소설의 발레단이 이끌어가는 묘한 심리전이 신기하게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누군가 일부러 들여다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이야기 설정자체에서도 묘한 여운을 남겨준다.

도쿄의 유명 발레단..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아무런 증거도 찾아낼 수 없었던 첫번째 살인의 증거를 찾아 바쁘게 움직이는 가가형사의 마음속으로 조용하게 다가오던 미모의 발레리나 미오.. 실질적인 주인공도 아니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의 설명을 주도하는 듯한 미오의 존재가 조금은 의아했었다. 사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형사 시리즈'가 있다는 것은 이 책을 보고서야 알았다. (뒤쪽 역자후기를 읽으면서 가가형사에 대한 프로필을 조금은 얻을 수 있었고 가가형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 듯 하다.) 그 시리즈에 대한 궁금증을 일단은 모른척하기로 하고 형사라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따스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의자를 용의자로써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써 대하는 그의 여림이 왠지 마음에 와닿았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책속에서 살인을 불러들일만큼  발레리나를 사랑했던 한 남자의 순애보보다는 미오를 향한 가가의 마음이 더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내게 전해져 온다. 

<용의자 X의 헌신>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듯이 히가시노 게이고가 보여주는 진실한 사랑에 대한 정의는 여러번을 생각해보아도 참 아름답다. 잠시 머물렀다 떠나가는 순간적인 사랑보다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림으로 전해져오는 진실된 사랑을 보여주고 있음이다. 어쩌면 폐쇄적인 공간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수 밖에 없었던 발레단원들은 서로의 모습속에서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다. 어떤 의미로든 테두리를 만들어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모습일 것이다. 외로움이었을 게다. 그리고 욕심이었을 게다. 어떤 외로움이었든, 어떤 욕심이었든 그것은 자기 자신을 버텨내게 해주는 하나의 버팀목이었을 게다. "그냥 왠지 오늘은 나를 위해 누군가가 이야기해주는 걸 듣고 싶었어요. 나 혼자만을 위해"..라고 말하던 미오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추리소설을 읽고 난 뒤 안도감이 아니라 이렇게 뭉클하게 젖어드는 뒷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잔잔하면서도 촉촉하게 젖어드는 느낌을 전해주는 형사를 만난다는 것도 그리 흔치는 않을 듯하다. 추리소설치고는 상당히 여리고 감성적인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사고 후유증으로 소리를 잃어가던 발레리나와 그 친구의 마지막 춤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들의 프리마발레리나를 위해서, 또한 관객을 위한 최고의 발레공연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그들의 모습을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었다니.. <백조의 호수>와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멋진 발레로 그려지는 영상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눈앞에 그려진다. 동화와 발레와 추리소설의 만남.. 멋지지 않은가! 거기에 양념처럼 맛을 내주는 범인과 형사의 사랑이라니! 이쯤에서 나는 가가형사의 뒤를 밟아보고 싶어진다. 역시 읽어야 할 것 같다. 그 '가가형사 시리즈'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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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 : 조선 선비가 본 드넓은 아시아 샘깊은 오늘고전 10
방현희 지음, 김태헌 그림 / 알마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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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의 고전을 대할 때마다 이 부끄러움앞에서 그저 먹먹하다. 말로는 우리의 것을 가까이하자고 하면서 과연 나는 얼만큼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뿌듯한 것은 이렇게라도 우리의 고전과 마주할 수 있다는 다행스러움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부제처럼 이 책은 조선 선비가 본 드넓은 아시아에 대한 이야기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책을 읽다보니 좀 더 크게 아우르는 것은 역시 중국기행이다. 세계 3대 중국견문록중의 하나라는 이 작품은 실망스럽게도 우리에게서가 아닌 일본에서 먼저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에도 시대 일본에서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 라는 제목으로 일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는 책. 국제 상황과 정세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써의 가치를 우리에게보다 일본에게서 먼저 인정받았다는 것은 정말 서글픈 일이 아닐수가 없다. 

성종 18년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갔던 조선 선비 최부가 이듬해 부친상을 당했다는 전갈을 받고 고향인 나주를 향해 배를 출발 시킨다. 그다지 좋지 않은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급한 마음에 배를 띄웠지만 그만 풍랑을 만나 배는 바다를 표류하게 된다. 어떻게 되었을까?  그 와중에서 위기에 닥쳤을 때 문제해결을 하기보다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좌절해버리는 조선의 근성을 여기서도 보게 된다는 건 왠지 씁쓸했다. 그렇게 바다를 표류하던 중 해적을 만나 고충을 겪기도 하고, 왜구로 오인을 받아 중국땅에서도 죽음을 당하기 전까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선비 최부는 함께 배를 탔던 몸종과 군인들을 통솔할 줄을 알아 힘겨운 여정속에서도 멋진 통솔력을 보여준다. 마흔세명의 일행이 단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되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기치와 벼슬아치로써의 곧은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은 최부의 여정을 따라가는 도중 고비마다 설명을 해주는 친절함을 잊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다시한번 요점을 설명해주는 대목이 참 좋았다. 어른인 나조차도 그 설명이 꽤나 유익했다는 말이다. 왜구로 오인을 받아 죽임을 당할 뻔한 최부는 몰래 빠져나와 그때부터 중국땅을 기행하게 된다. 계획하지 않은 일이기에 가는 곳마다 공포와 두려움이 따라오지만 그 때마다 그의 박학다식함이, 그리고 조선인이라는 자부심이 그를 구해낸다. 중국관리들로부터 인정을 받기까지, 그리하여 외국관리로써의 예우를 받기까지 참으로 힘겨운 여정을 지난다. 결국 중국의 황제까지 만나게 되고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는 최부.

최부의 표류기를 듣고 난 성종은 그것을 기록하라 명하고 드디어 최부의 표해록이 만들어진다. 본래 제목은 '중조견문일기中朝見聞日記'였는데 뒤에 간행할 때 이름을 표해록으로 바꿨단다. 일본 스님 엔닌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 이탈리아 사람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과 함께 세계 3대 중국 여행기로 꼽는다는 표해록에는 주변국들, 중국 내륙에 관한 지리적, 군사적인 면이나  중국의 생활양식, 인심, 풍속들을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간략하게만 설명되어져 있다).  물론 최부 혼자서 쓴 글이 아니라 수행했던 아전 정보, 김중, 이정, 손효자가 틈틈이 기록해 놓은 자료가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으로 돌아온 최부는 높은 벼슬을 하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인하여 귀양을 가게 되고 제대로 능력을 발휘해보지도 못한 채 사형을 당한다.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교육에 힘을 쏟았다는 최부..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죽임을 당했다는 것에 대하여 애석해 했다고 한다. 늘 그렇다. 그 쓸데없이 허울만 좋은 말싸움에 우리의 인물들은 하릴없이 스러져 갔다. 그래도 그가 남긴 작품이 있어 그 후대의 자손들이 뿌듯함을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랴 싶다.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또한 다행스러움이 아닐까? 정말 멋진 이야기였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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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릇한 친절 - 캐나다 총독 문학상, 의회 예술상 수상작
미리암 토우스 지음, 황소연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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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잘 모르겠다. 책을 읽고나니 공연스레 마음만 뒤숭숭해진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종잡을수가 없다. 꼬아도 너무 꼬아버린듯한 느낌이랄까?  뭔가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입속에서 웅얼웅얼거리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그렇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는 말이다. 문화적인 차이일까?  하지만 이 책을 말해주고 있는 낱말들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종교에 관한, 신앙에 관한, 믿음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은 확실해보인다. 비록 그 테두리가 희미하긴해도..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책을 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게 느껴졌던 것은 아무래도 직설적인 화법을 찾아볼 수 없었던 까닭이다. 어린 소녀의 눈을 통해서, 그녀가 바라보는 가족과 사회의 흐름을 읽어내야 하는, 그리하여 그녀의 좁은 시선속에 머무는 하나의 관념을 읽어낸다는 것이 그리 녹녹치만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기도 하다. 나만 그랬을까? 어쩌면 그랬을수도 있겠다.

이 책의 주인공인 노미의 가족들이 서로를 떠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지는 이야기.. 그들은 왜 서로의 곁을 떠나야 했을까? 그리고 남겨진 자들은 그것을 왜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야만 했을까? 그저 그렇게 자연스러운듯이 흘러가는 노미의 가정생활은 뭔가 불안하다. 그녀 또한 자신앞에서 사라져버린 엄마와 언니의 존재에 대하여 어쩔 수 없는 반목과 이해를 거듭한다. 자신을 버려두고 떠난 엄마와 언니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져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면서도 이제 남은 아빠를 위해 무언가 해드릴 수 있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작고 소박한 꿈들을 이루기엔 뭔가 이상하다. 동네사람들, 학교, 그리고 외삼촌의 방문.. 그녀의 외삼촌은 목사다. 현실속의 삶보다는 죽음 뒤의 '영원한 삶'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재앙을 내리는 악마같은 존재이다. 아이러니다. 내세의 삶을 위해 목소리를 키우는 그의 존재가 현실속에서 행복하기 위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악마같은 존재로 다가온다는 것이.. 왜 그런 일이 벌어져야만 하는 것일까?

가끔씩은 생각해보는 화두가 아닐까 싶다. 살아있는 삶보다도 죽음뒤의 삶에 대하여 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는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관념앞에서 나 역시도 허허웃음지을 때가 많았지만 노미가 겪어내야하는 슬픔에는 반도 따라가지 못할 듯 싶다. 점점 무너져가는 노미의 어린 삶이 너무 서글펐다. 거대한 무언의 존재앞에서 자신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정체성마져 흔들리는 사춘기소녀에게 떨어진 무서운 형벌, '파면'... '야릇한 친절'이라는 말이 그제서야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실제적으로 내 삶의 곁에서 머무는 믿음의 허상 또한 그 '야릇한 친절'을 늘 품에 안고 다닌다고 생각해왔으니까.. 심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뱉어내는 그 '야릇한 친절'의 뉘앙스가 역겹기까지 했었다. 결국 '파면'당하여 떠나야 하는 작은 딸을 위하여 마지막 남은 가족 아빠마져도 노미의 곁을 떠나버린다. 그녀가 떠날 수 있도록...

간혹 매스컴을 통해서 들려오던 믿음을 가진 자들의 욕망앞에서 왠지 나는 주눅들어버리곤 한다. 절대의 존재만이 자신의 아픔을 치유해줄 수 있다고 수혈도 거부한다는 사람들(이 책속에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노미의 친구 리디아를 통해서 보여주는..), 절대의 존재만이 그들을 다스릴 수 있다고 나라에 대한 충성조차도 거부한다는 사람들.. 정말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사실 내게 중요하지않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그 죽음뒤의 삶에 대한 그들만의 이기심이 나는 두려울 뿐이다. '믿음'이라는 휘장을 내려놓고서 그들만의 틀에 갇혀사는 그 고집스러운 점들이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들에 대하여 어떻다고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그들이 책임져야 할 그들만의 삶일테니 말이다.

책정보에 나와 있는 수많은 격찬들이 사실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단순한 광고성 멘트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마져 들었다.(오해마시라,이건 단순히 나혼자만의 생각일뿐이니!)  그렇다면 옮긴이의 말처럼 불행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은 무엇일까? 미래가 없는 현재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면 지독한 쾌락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도 공감한다. 그렇다고 현재가 없는 미래에만 중점을 둔다는 것도 문제있다. '중도'.. 참 어려운 말이다. 그렇지만 죽음뒤의 천국을 위하여 현재를 부정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종교는 종교고 세상은 세상이다. 현재는 현재고 미래는 미래일 뿐이다. 현실을 무시한 채 미래만을 위한 삶을 산다는 것, 그것도 추상적인 개념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그것은 분명 어불성설이다. 세상의 쾌락이 모두 죄악시 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엄격한 규율도 때로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현재의 내 삶을 갉아먹는 상태가 된다면 차라리 없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각설하고.. '야릇한 친절'에 관한 이 책의 느낌은 제목처럼 정말 '야릇하다'. 자신이 살았던 메노파 마을의 이면성을 소설로 풀어냈다는 말을 보면서 그다지 용기있는 글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다루고 있는 주제가 너무 무겁게 다가왔던 탓이다. 수많은 찬사를 받았다는 저자의 글이 왜 내게는 다가오지 못했을까? 알 수 없다. 단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 현실속의 삶에서 느껴야하는 불안 또한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기에 그 무엇을 탓할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죽을 수 있기에 삶이 아름답다고 말한 어린 노미의 말을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아이비생각


사족...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지극히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지기에 옮겨보았다)

메노파... 전 세계에 150만 명의 신자가 있다지만 우리나라에는 단 두 개 교회가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메노파(메노나이트교회)는 우리에게 꽤 낯선 교파이다. 이런 까닭으로 메노파 교인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의 16세 소녀가 화자인 이 책은 그 배경부터가 충분히 독특하다.
책 속의 주인공 노미 니켈이 ‘우리 십 대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창피한 종파’라고 말한 메노파는 네덜란드의 종교 개혁자 메노 시몬스가 설립한 재세례파(再洗禮派)로, 오늘날 주로 미국과 캐나다에 농업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기독교의 한 종파이다. 메노파의 사상은 종교와 세상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성서적 생활 방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새로운 제도와 의식 등 외부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분열도 일어났던 이들 메노파는 외적으로는 은둔을, 내적으로는 엄격한 집단 규율을 통해 강한 문화적 연대감을 형성한다. 삶보다는 죽음을, 축제보다는 고행을 가치 있게 보는 이들의 사상은 감수성 예민한 열여섯 살 소녀에겐 숨통을 틀어막고 온몸을 옥죄는, 벗어버리고 싶은 옷과 같은 존재다. (-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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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비치 - 꿈꾸던 삶이 이루어지는 곳
앤디 앤드루스 지음, 강주헌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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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이 있다. 세사람의 장님이 저마다 코끼리를 만져본 후 제가 만진 느낌으로만 말하고 있는 상황을 머리속에 그려보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그래, 그럴수도' 있지 하며 각각의 의견에 동조해주고 싶은 기분도 든다. 다리를 만진 사람, 코를 만진 사람, 몸을 만진사람.. 제각각 코끼리에 대한 정의는 달라도 코끼리를 만져보았다는 것은 같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떨까? 같이 코끼리를 만져봤다는 전제하에서조차 그 '다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내가 만져본 부분이 더 큰 의미를 차지해야만 뭔가 만족스러운 느낌이 든다.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토록이나 어려운 일일까? 그렇다면 그 '다름'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무엇이 필요할까? 감히 이 책의 말을 빌려 말해보자면 '관점'이다. 저마다의 '관점'에만 머무르지 말라는 것이다. 좀 더 가까이 혹은 좀 더 멀리에서 바라볼 줄 아는 배려와 인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배려한다'는 것과 '인정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고 배우고 싶어하는 삶의 화두이기도 하다. 그만큼 나를 버려야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버린다는 느낌은 곧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말도 될테다. 물질적인 손해보다는 '자존심'이라고 일컫는 감정적인 손해이다보니, 우리 스스로가 결코 포기하고 싶어하지않는 손해이다보니 그게 참 어렵다. 아주 조금만 비켜선 채로 바라본다면 쉬울텐데 우리는 왜 모든 것을 정면승부하려드는 것일까?

사실 이 책은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선뜻 이 책을 집어들었을까? 간단하다. 책띠에 나와있던 문구하나 때문이었다.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 저자라는 말.. 그렇다면 내가 그 책을 읽어보았을까? 아니 나는 그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다. 그저 무성한 소문으로만 그 책의 제목을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쭙잖게도 그 무성한 소문을 가진 책의 저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으니.. 자기계발서일거라는 생각은 맞았다. 당연히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시오, 저렇게 하시오,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저렇게 하시면 됩니다.. 명령조 혹은 부탁조의 말들이 쏟아질거라고 지레 짐작했으니 책장을 열면서 한숨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책읽는 고통의 시간과 싸워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앤디를 통해 존스를 만났다는 것도 하나의 행운일까? 아니 나는 실제로 존스를 만나보고 싶었다. 어느날 문득 내 곁에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으면 했다. 어쩌면 이미 내 곁에 머물다가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앤디조차도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없었던 존스의 존재가 너무 가깝게 느껴져 정말  기가막혔다. 결코 어렵지않게 그리고 결코 이론적이지 않은 말투로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해 주던 존스의 목소리.. "세상은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거야" 가 아니라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면 어떨까?" "네가 안고 있을 작은 가능성부터 시작해보는거야" 라고 말해주는 존스의 그 따스함과 친절때문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런 것 같다'가 아닌 '그렇다'라는 단호함을 너의 가슴속에 키워보면 어떻겠느냐고 충고해주는 존스의 시선이 마치 내게 향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멋지다! 대충 빨리 읽어야지 했던 나의 마음을 단숨에 오래달리기로 바꿔치기한 존스의 마력앞에서 나는 무릎을 꿇어야 했다. 아니 '닫힌 마음의 빗장을 내려놓기 시작했다'가 맞을 것 같다.

어렵지 않다. 제목처럼 시원하고 상큼하다. 왜? 우리가 일상속에서 겪어내야하는 가려움증을 아프지않게 긁어주기 때문이다. 그거 하나도 못하느냐고 호통치지 않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을 믿지 못했던 비뚤어진 나에게조차.. 단 한가지 초장부터 힘겨운 사람에게 위인전을 내미는 생뚱맞음을 제외하고. 그렇고 그런 이야기일거라고 생각하며 들어갔던 곳에서 환하게 웃고 나오는 또하나의 나를 본다. 읽어보니 뭐 그렇게 새로울 것도 없구만...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수많은 명령과 부탁과 심지어는 협박성 멘트를 날려대던 계발서들에 상처를 입었던 내게는 너무도 따스하게 다가왔던 책이라고 말해주고 싶을 뿐이다.

덕분에 꼭 읽어야 할 책의 목록에 하나를 더 첨가하게 되었다. 그것이 저자에 대한 예의라고 나름 생각하면서. 저자 앤디 앤드루스의 작품이라던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는 꼭 한번은 읽어보리라 다짐한다.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폰더씨의 하루가 어떻게하여 위대한 하루가 되었는지.. 어쩌면 존스는 실제하는 인물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의 가슴속에 살아있을 또하나의 자신일 수도 있을테니까. 생각하는 관점,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모습, 다른 느낌을 표현하는 또하나의 자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다름'을 인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한다. 다시 존스의 목소리를 빌려 얘기하자면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변화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지만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나는 거라고 존스는 말하고 있다. 단지 변하겠다고 결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뿐이라고..

사랑에 대하여, 우정에 대하여, 믿음에 대하여, 결혼에 대하여 그리고 희망에 대하여 정말 쉽고 편하게 이야기해주고 있는 존스와의 만남은 정말 좋았다.  단 한가지 자신의 '관점'만 바꿀 수 있다면 나를 힘겹게 했던 모든 것들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듣기 편하게 잘 설명해주고 있음이다. 젊은이라면 꿈과 희망에 대하여 그리고 가슴속에 품어안은 저마다의 사랑에 대하여, 조금은 다르게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결혼한 사람이라면 남편이나 아내를 향했던 그 첫마음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게다. 부하를 거느리고 상사를 모시는 직장인이라면 자신의 사회생활을 다시한번 돌이켜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도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가 사소한 것들이라고 밀쳐냈던 것들에 대하여 소중한 마음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존스의 목소리를 빌릴까 한다. 갈매기 다섯 마리가 부두에 앉아 있네. 그러다 한 마리가 딴 데로 날아가겠다고 결심했지. 그럼 몇 마리가 부두에 남아 있나?" 존스가 당신에게 이렇게 물었다면 당신은 과연 몇마리라고 대답했을까? 궁금하다면, 아니 궁금하지 않다해도 내 대답에 따른 존스의 설명을 들어보기 바란다. 행동하지 않는 의도는 모욕이라던 존스의 목소리가 울림처럼 남아있다. 남들은 행동으로 판단하면서 유독 자신만은 의도만으로 판단하는 습관에 대하여 질책하던 존스의 말에 마음이 아팠다. 오렌지 비치의 모든 사람들에게 씨앗을 남겨두고 떠나간 존스의 존재.. 그 씨앗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들은 눈치챘다. 그리하여 그 씨앗을 심고 항상 곁에 머물 존스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 남은 그 끝내주는 것을 위하여 화이팅을 외칠 것이다. 그날에 나도 그들과 함께 하고싶다는 욕심이 생겨난다. 책장을 덮어야 한다는 것이 또하나의 고통으로 다가오는 날도 있다. 오늘처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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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남자 - KI신서 916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아주 작은 플라스틱 통이 있습니다. 거기에 그야말로 아무런 형체도 없는 시간 5분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판다고 하네요. 당신이라면 그 시간을 사시겠습니까? ... 어찌보면 참 황당하다.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 통에 들어있는 시간을 산다면 그 5분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온전한 나만의 5분이 될 수 있다는 건 생각해 볼 문제이다. 어느날 문득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며 자산을 계산을 보던 남자는 집을 한 채 사고 그럭저럭 꾸려나갈 수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35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리곤 경악한다. 그렇게 계산되어진 시간속에는 오로지 타인을 위한, 어떠한 체제를 위한 시간만이 존재할 뿐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은 하나도 없다는 것에 대하여.. 붉은머리개미를 관찰하면서 살고 싶다는 아주 소박한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3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야만 한다는 것에 대하여.. 그러나 그것조차도 아주 불안하다는 것에 대하여.. 자, 이제 어찌하면 좋을까?

남자는 그 소박한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떠한 체제에 희생되어지는 자신의 시간을 계산하고 그 시간에 맞는 돈의 가치를 따지기에 이른다. 그래서 어찌되었느냐고? 아내의 성화에 이끌려 정신과치료를 받게 된다. 아주 당연한 수순이다. 단지 붉은머리개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때려치운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아마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치료를 하는 사람과 치료를 받는 사람 양쪽 모두 서로를 믿지 않았다. 진정으로 상대방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저 형식적인 면담이었을 뿐이지만 치료를 받는 남자의 입장에서는 우연찮게 큰 수확을 건지게 되고 결국 자신이 원했던대로 사직서를 던진다. 그러나 성공할 수 있는 시간은 그에게 일주일만이 주어졌을 뿐이다. 실패하면 가족 모두를 잃게되는 올인!

시간은 곧 돈이다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그 돈이 되는 시간을 팔기 위하여 남자의 부단한 노력은 시작되었다. 자, 남자는 시간을 팔 수 있을까? 그것도 아주 조그만 플라스틱 통에 들어있는 5분을?  하지만 이 남자, 일냈다. 특허를 따낸 것이다. 자명종시계를 사고 그 통에 5분씩 넣기 시작한다. 팔렸을까?  마케팅에 성공하지 못한 남자는 우울한 기분으로 절친한 친구를 찾아가고, 그 친구의 가게에 5분이 들어있는 플라스틱 통을 전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모든 희망은 꺾여버린 뒤다. 그러나 그 다음날 '세상에 이런일이!' 에나 나올법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친구가 지역방송에 광고를 때려버린 것이다. 그 덕에 대박났다. 5분의 효용가치를 증명해보인 것이다. 그 5분이 들어있던 플라스틱 통이 바닥나버렸다. 왜 그랬을까? 무슨 이유로?

세상은 바쁘게 돌아간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보다는 남을 위한 시간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온전하게 1분의 시간조차도 쓰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그 5분짜리 플라스틱 통 하나가 구세주였을 것이다. 내가 산 시간이니 어느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대박날 밖에.. 공장이 세워지고 5분의 시간은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다. 생각해보라, 나 5분 용기 하나만 빌려줘! 너 나한테 시간 맡겨놨냐? 이 기발한 상황이 전개되어가는 것을... 우리의 주인공, 여기서 멈출수는 없었다. 이제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5분이 2시간으로, 2시간이 일주일로 단위는 점점 커간다. 문제는 없었을까? 당연히 문제가 생겨났다.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니 사람들은 일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만을 위해 그 시간을 찾아 쓸 뿐이었다.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모든 것에는 원리원칙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제 사람들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자신만의 시간을 사기 위해 혈안이 되고, 그런만큼 나라의 경제는 죽어가기 시작했다. 일하지 않으니 어찌 세상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며 돌아가겠는가 말이다. 큰일이다. 이미 2시간짜리 플라스틱 통이 시중에 나돌았을 때 재계의 인사들은 위험성을 경고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만 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일하지 않는 사람들때문에 모든 것이 정지되어버리기 전에..  어떤 대책이 세워지고 그 대책은 우리의 주인공인 시간을 파는 남자의 목덜미를 휘어 잡았다.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라. 그리고 그 5분의 시간이 도대체 얼마에 팔려나갔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아주 기상천외한 이 사건의 주인공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굳이 찾아내고자 한다면 시간개념이 아닐까 싶다. 너무 많은 시간 혹은 너무나도 부족한 시간, 그런 시간들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하여 시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들에 대한 톱니바퀴의 울림소리에 한번쯤 귀를 기울여보는 시간도 가져볼 수 있다면 더욱 더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겠다. 나에게 오는 1분 1초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느낌을 가질 수 있다면 더더욱이나 좋은 일이겠다. 시간과 경제의 맞물림... 시간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관념이 너무도 무겁게 다가온다. 이런 황당하고도 짜릿한 상황을 전개해나가는 스토리가 왠지 허구적이지 않게 다가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나는 내 시간을 온전히 쓰고 있는가? 묻고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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