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4분의 1
오사키 요시오 지음, 우은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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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안텀이라는 식물이 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식물은 어느 한부분이 시들거나 죽으면 나머지 부분들도 다 죽는다는 말이 있다.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는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식물의 이름을 제목으로 달고 나왔던 <아디안텀 블루>라는 책이 있었다. 오사키 요시오의 작품중에서. 왜 이런 말을 하느냐하면 오사키 요시오라는 작가의 작품에서 풍겨져나오는 분위기가 딱 아디안텀 블루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딘지 모르게 알 듯 모를 듯 안개같은 사랑이 항상 존재한다. 굳이 찾으려 애쓰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나 항상 그 사랑은 너의 곁에 머물고 있다는 것처럼.. <9월의 4분의 1>이라는 제목이 주는 뉘앙스는 참 미묘하다. 가을이라는 분위기도 풍기고 어느정도는 익숙해진 듯 하지만 아직은 조금 부족하다는 그런 느낌도 있다. 왠지 이제부터는 무르익어갈 사랑을 기대해도 될 것만 같은 기대감도 은근슬쩍 끼워넣게 된다. 그런 사랑이야기들이 이 책속에 머문다. 한편의 서정시같고 한장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사랑을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다.

사랑이란 감정은 구체적으로 어떤것을 말하는 것일까? 둘 중 하나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을 때 그 손가락끝을 보는가, 아니면 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함께 보는가 하는 문제처럼 사랑이란 것은 각자의 느낌일 뿐이다. 그러니 어느것이 옳다고 딱히 정의를 내릴 수가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했으나 그 사랑이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첫번째 이야기 '보상받지 못한 엘리시오를 위해' 를 읽으면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요리코와 다케이는 어느 한쪽이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끝만 서로 바라보았을 뿐이라는 생각. 그래서 그들은 서로 다른 사랑을 품고 살았을거라는.. 함께 있어도 마음깊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그래서 서로를 가슴 가득 채우지 못한...

자신이 계획했던대로 삶이 살아진다면 그것처럼 행복한 일도 없을거라는 생각은 누구나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10년간 잡지사의 편집장으로 지내왔던 직장을 자신의 계획에 따라 그만 둘 수 있었던 유이치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한통의 편지를 따라서 켄싱턴으로 찾아가는 그의 머리속에서 끝없이 그려지던 타락墮落과 추락墜落의 글자가 주는 느낌은 나에게조차 바윗덩어리같은 무게감을 안겨주었다. 두번째 이야기 '켄싱턴에 바치는 꽃다발' 속에서 마주치는 유이치와 미나코의 사랑은 진지하다. 서로를 받아들이는 깊이가 내게도 전해져오는 듯 하다. 동물나라의 화폐기준이 '기린'이라고 말해줄 때의 산뜻함이 전해져오는 그들의 사랑이 확인되는 순간 왜 내가 가슴을 쓸어내렸을까?  지켜야 할 거리와 쌓여가는 짐의 무게만 주의하면 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서로에게 마음으로 의지하고 마음으로 안아준다는 것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세번째 이야기 '슬퍼서 날개도 없어서' 는 애잔하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상대를 만났을 때는 또 그사람을 위해 이야기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가진 사랑. 그 남자의 좁은 방안으로 스며들던 햇살, 그 따뜻했던 방이 그리웠기에 눈물 흘려야 했던 마미. 우스운 물방울 커튼과 벽에 기대어 기타를 치고 있을 그사람을 끝내는 다시 보지 못한 채 스물아홉의 삶을 마감해야 했던 마미는 왠지 여름날을 힘겹게 울다가 스러져가는 매미같다. 스물다섯까지만 예정되어졌던 자신의 삶이 스물다섯을 넘어서자 비틀거렸다. 노래로 산화시켜야만 했던 그 조바심을 스물다섯이 되기 전날 스물넷의 마지막날에 놓아버리고 그녀는 자신의 사랑앞에서 철저하게 타인의 시선이 되어버렸다. 어딘가에 자신만이 짊어지고 가는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었을게다. 사랑은 그런게 아닐까? 편히 쉬고 싶은 가슴을 원하는 것, 그렇게 편히 쉴 수 있는 가슴을 온전히 상대방을 위해 내놓을 수 있는 것..

몇 년뒤에 어디에서 다시 만나요, 라는 말은 영화나 소설속에서 많이 듣는다. 그리고 그런 약속은 대부분 지켜지지 못한채 영원히 가슴속에 묻혀버리고 말지.. 하지만 지켜졌기에 아름다웠던 사랑이야기가 있었다. 십년 뒤 오월, 피렌체 두오모에서. 를 약속했던 아오이와 쥰세이의 이야기 <냉정과 열정사이>가 떠올랐다. 각인되듯이 남겨졌던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떠오르게 해 주었던 마지막 이야기 '9월의 4분의 1'
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9월 4일에서 만나요, 라는 수수께끼같은 메세지를 남겨둔 채 떠나버린 나오를 9월 4일마다 기다렸던 겐지.. 만나지 못한채 13년을 보내버리고 다시 그녀를 처음 보았던 그랑 플라스.. 그리고 그곳에서 알아버린 9월 4일역.. 수수께끼같았던 그녀의 메세지가 풀려지고 그녀가 앉아 자신을 기다렸을지도 모를 카페에서 자신도 똑같이 그녀를 기다리는 나, 겐지.. 하지만 만날 수 없는 그녀, 나오.. 너와 만났을 때 그때는 괴롭고 절실하고 슬펐지만 자유로웠다고. 막 만들어낸 솜사탕만큼 이라는 마지막 문구가 내 눈속에 새겨진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다. 딱히 신비로운 느낌도 없다. 다분히 일상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쩌면 작가 자신의 주변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오사키 요시오의 작품세계가 어쩌면 따분하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왠지 따분하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말하면 안될 것 같다. 가만 가만 숨을 죽여가며 읽게 되는 오사키 요시오라는 작가의 작품은 은근한 매력이 있다. 강한 태클보다는 부드러운 손길이 기다려주는 듯한.. 그래서 내가 이 <9월의 4분의 1>을 선택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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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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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인줄 알았습니다... 인터넷상에서 그런 글귀가 떠돌던 때가 있었다. 엄마에 대한 애틋함이 담겨 있어 많이들 퍼나르며 너도 나도 읊어대던 말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짧다. 우리의 감성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얕기만 하다. 조금만 더 길고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엄마를 부탁해>라는 이 책이 나온 뒤로 우리들의 엄마는 뭐라도 되는 양 그렇게 도마위에 올려졌지만 과연 그 뭐라도 된(?) 듯한 엄마는 몇이나 될까? 단지 책속의 엄마로써, 내 엄마가 아닌 타인의 엄마로써만 동정을 받았고 딱 그만큼만의 그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생각했을 뿐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부터 신경숙의 팬이라고 자처하는 나는 후후 웃었다. 속으로 웃었다는 말이다. 무채색같은 그녀의 글을 읽을 때마다 가슴 한켠이 싸아해지던 그런 느낌들을 잊을 수가 없었고, 또한 여지없이 드러나는 그녀 주변사람들의 삶이 그랬고, 여전하게 뒷배경으로 자리하는 그녀의 고향집이 거기에 있었기에.. <깊은 슬픔>에서 은서와 사랑 줄다리기를 했던 완과 세의 고향이기도 했던 곳.. 그녀의 그곳은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제는 지천명을 바라다보는 그녀의 세월처럼...

그녀는 어쩌자고 엄마를 잃어버렸을까? 그녀는 어쩌자고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엄마의 존재를 들이밀었을까? 그녀는 어쩌자고 우리가 숨기고 또 숨기려 애쓰는 가슴 한쪽의 빈 공간을 후벼파기로 작정했던 것일까?  늙어가는 엄마를 보면서, 더이상은 하얘질수가 없어서 이제는 오히려 까매지는 엄마의 머리카락을 보면서 그녀는 문득 엄마라는 말보다는 한사람의 여인으로 엄마를 바라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딸이 엄마의 나이가 되어서야, 딸이 엄마처럼 똑같은 엄마의 자리로 들어서서야 보여지는 엄마의 존재는 아마도 남달랐을 것이다. 처음 아이를 나았을 때 병원으로 찾아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여주던 엄마의 표정이, 황달이 심한 아이을 어쩌면 집으로 데려갈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던 간호사의 말을 들었을 때 딸의 표정을 먼저 살펴보던 엄마의 마음이, 다행히도 함께 집으로 갈 수 있었던 외손주를 당신이 안고 차에 오를 때 엄마는 오로지 딸의 거동만을 살피셨던 것 같다. 그랬던 엄마를 이제는 내가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가까이에서 늘 말친구가 되어주는 나를 보면서 엄마는 이렇게 말했었지.. 어쩌냐? 너는 나처럼 딸도 없어서? .. 그러게 엄마. 아무래도 나는 늙어서 외로울 것 같아. 딸같은 며느리는 없다잖어. 그치?  언제부터인가 친구처럼 말을 섞는 엄마와의 대화가 나는 너무도 좋았었다. 어쩌면 작가가 늙어가는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 여인의 체취를 찾아보고 싶었던 것도 그런 마음 때문은 아니었을까?

모든 아버지들이 그렇게 살진 않았을 게다. 그러니 모든 엄마들이 그렇게 살았던 것도 아니었을 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엄마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곤혹스러운 삶을 살아내야 했다. 왜 그랬을까?  일상적으로 힘겨운 가정사에서 빠져나가길 원하며 살았던 아버지와 자식들의 그 염치없음을 모른 체 눈감아주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안식처와 피난처가 되어 주었던 우리의 어머니. 어쩌면 그 힘겨웠던 노역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그 마음을 헤아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엄마는 부엌을 좋아했어? 딸이 물었을 때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지.. 부엌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냐? 나는 아마도 장독대 뚜껑을 엄청 많이 깨먹었을 게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부엌일, 밥먹고 돌아서면 다시 밥을 해야 했다고.. 맨날 똑같았던 일, 도무지 헤어날 길이 없어보이는 그 공간에서 숨을 쉴 수 있었던 것은 장독대의 항아리 뚜껑을 집어던져 깨뜨리던 순간뿐이었다고.. 항아리 뚜껑을 다시 사야했을 때 속이 쓰리긴 했지만 오래도록 그것을 멈출 수가 없었노라고.. 그러니 너도 힘들면 접시를 깨뜨려보라고..

화제가 되었던 TV드라마가 생각났다. 일년만 휴가를 달라고 호소하던 엄마의 입장을 누구도 헤아리려하지 않았었지. 엄마는 오직 그자리에서 멈춰선채로 있어야만 엄마인거라고 그렇게들 말하는 것 같았지. 하지만 그 엄마가 짧은 휴가를 얻어 평생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던 공간에서 떨어져나왔을 때 그 엄마는 비로소 여자가 되었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아니 무엇을 하고 싶어했는지를 알았었다. 그리고 그 짧은 휴가기간동안 자신이 하고 싶어했던 것들을 하면서 살아보려 했지. 하지만 그녀는 결국 그 짧은 휴가기간조차도 채우지 못한 채 다시 움직일 수 없는 엄마의 자리로 되돌아와야만 했었다. 그랬다. 우리가 인정해주지 않았던 거다. 엄마도 엄마가 아닌 한사람의 여인으로써 살아갈 권리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엄마에게도 엄마가 필요했다던 그 말은 너무나도 아프게 다가왔다.

엄마를 부탁한다는 그녀가 엄마를 바라보는 시선은 네가지다. 큰 딸이었던 너의 눈으로, 맏이로 태어나 엄마의 꿈까지도 어깨에 짊어져야 했던 아들의 눈으로, 평생을 함께 살았지만 단 한번도 나란히 걸어보지 못했던 남편의 눈으로, 그리고 엄마 자신의 눈으로 막내딸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살림밑천이라는 첫딸로 태어나 오빠들에게 치이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주장하고 싶어했던 큰딸. 불쌍한 엄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던 장남. 그들이 지금 기가 꺾인 채 살아가고 있을, 아니면 밀려나지 않기 위해 기를 쓰며 살아가고 있을 386세대들이다. 극심한 가난과 빈곤을 짊어진 채 혼란기의 시절을 살아냈던 사람들에게 그런 엄마가 있었다. 아무리 무거운 보퉁이를 들고 간다해도 한번 뒤돌아보지 않고 저만치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야 했던 아버지들. 그 아버지들은 그렇게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을테니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게다. 그렇게 자기 자신만 알며 살아가던 아버지들에게 그런 아내가 있었다. 거기 그자리에서 그 엄마가, 그 아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걸 단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였다. 우리 모두가 엄마를 잊은 채 살아가고 있었던 거다. 뒤집어 생각해보니 그것은 작가의 말처럼 잊은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채로 살았다는 표현이 맞다.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필요할 때만 찾아나서는 물건같은 존재가 엄마는 아닐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책속의 작은 딸이 언니에게 말했듯이 나도 엄마같은 엄마는 되지 못했다. 아니 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거라고 말하며 엄마의 가슴속에 훓어내리는 듯한 아픔을 주기도 했던 나였기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핑게일테지만 말이다. 모든 것은 변해간다. 엄마라는 존재의 의미마져도 조금씩 퇴색되어져가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를 부탁해> 라고 말하던 작가의 말을 듣고 나는 나의 엄마를 다시한번 바라보았다. 이제 팔순을 바라보시는 나의 엄마는 다시 까만 머리카락이 나오고 있다. 엄마, 하얗던 머리가 다시 까맣게 나오면 오래 산대요.. 어이구, 이만큼 살았으면 되었지 더 오래살면 뭐하냐? 그저 자고 일어나니 죽었더라는 말을 듣는 것이 내 소원이다.. 요즘 들어 부쩍 가야할 때가 된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엄마를 붙들고 눈물 바람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나이를 먹지 않으면 엄마도 더이상은 늙지 않을까? 엄마, 나의 엄마.. 작가의 작품속에서 잃어버린 엄마처럼 딱 그만큼의 삶을 살아내신 나의 엄마.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제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조금 더 일찍 당신을 사랑해야 했다고 후회를 하게 됩니다. 가끔씩은 못된 년이 지 엄마한테 큰소리를 친다고 뭐라고 하셔도 저는 그것이 좋으니 어쩌겠습니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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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랫말 아이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어른을 위한 동화 12
황석영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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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후 서울 한강변의 '모랫말'이란 곳에서 일어나는 작은 이야기들이다.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라고도 한다. 이어서 더 많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그대로 접어야 했다던 작가의 말에 작가만이 알 수 있는 어떤 뉘앙스가 풍기는 듯 하다. 왜 그랬을까? 너무 사실적인 이야기를 그저 무덤덤하게 그려주었기 때문에?  책속에서 나는 아무런 표정도 찾아내지 못했다. 자신의 어린시절을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어했던 작가만의 감정이 녹아있을테지만 글쎄, 그 시절을 겪어낸 사람이 아니라면 독자로써 그 느낌을 전해받기가 쉽진 않을 듯 하다.

열편의 이야기로 되어 있지만 살짝 한번 들춰내보자. 동네 다리밑에 움막집을 짓고 마을에서 밥을 얻어먹은 땅그지 춘배의 이야기였던 꼼배 다리. 어찌어찌 여자를 만나 살림을 차리지만 아이들의 불장난으로 춘배는 아내와 가족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니들만 사람이냐를 외쳐대던 춘배의 한은 어쩌면 그 시절을 살아내야 했던 고단함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쟁직후였으니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양색시가 되어야 했던 여인들의 이야기를 그려준 금단추나 그 양색시를 어머니로 두었던 아이를 좋아했다는 내 애인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그 시절의 처절함이 묻어났다.  지붕 위의 전투, 도깨비 사냥,  친이 할머니, 삼봉이 아저씨,  낯선 사람, 남매, 잡초...

모든 이야기속에서 허덕이던 시간의 흔적들.. 배우지 못했기에 서러워야 했던 이야기가 있었고, 치기어린 아이들의 용맹성이 하나의 자랑거리처럼 여겨지던 어린시절의 추억같은 이야기가 있었고,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멈춰선 채 알 수 없는 정체성의 혼란으로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젊은이의 짧은 사랑이 있었다. 하지만 이 시절을 살아내는 아이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얼만큼이나 이해할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아주 먼, 그야말로 몇 백년전의 이야기가 아니니 그저 옛날에는, 전쟁이 있었던 그 때에는 이랬었단다 하는 느낌없는 단어들일 뿐이다. 그때는 그렇게 어려웠다고, 배고픔에 서러워 울기도 했다고,하니 요즘 아이들의 말이 수퍼에 가서 라면이라도 사먹으면 되는데 왜 굻어요? 했다던 속아픈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 역시도 그 전쟁을 겪고 나서야 태어난 사람이니 말해 무엇할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전쟁의 혹독함을 겪어냈던 내 어머니 아버지의 시대가 가고나면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란 나의 시대는 그 기억들을 어찌해야 하는것일까? 하는 그런 생각말이다. 작가의 말처럼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살아 있는 것이라면 조금은 당혹스러울 것도 같다. 그 혹독함을 견뎌냈던 부모님 세대들의 힘겨움이 고스란히 나의 어린 시절속으로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나 어린시절에도 한쪽 손끝에 손대신에 쇠갈고리를 달고 다니던 사람이 있었고, 커다란 대바구니를 등뒤에 짊어지고 다니며 집게로 헌종이나 빈병 따위를 주우러 다니던 젊은 넝마주이가 많았었다. 모두 전쟁의 상흔이었을거라고 지금에야 생각하게 된다.

때로는 잊고 싶은 기억도 있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일까? 책속의 화자로 보여지던 수남이.. 그 아이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배고픔이나 힘겨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수남이를 돌보기 위하여 어느날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들어왔던 태금이를 잊을 수 없다던 화자의 말을 빌려보더라도 그렇다. 마지막 이야기였던 잡초.. 그 이야기속에서 태금이는 그야말로 이팔청춘이다. 어찌하다보니 젊은 남자와 사랑을 하게 되었고 이념의 시대였으니 그 사랑또한 이념따라 흔들렸을 수밖에 없었을게다. 밀고 밀리던 전쟁중에서 사랑하던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그만 정신을 놓아버렸던 태금이의 이야기는 이 편도 저편도 될 수 없었던, 하지만 살아내야 했던 현실앞에서 냉정해야 했던 내 부모님 세대들의 서러움을 보게 된다.

이야기는 의외로 잔잔하다. 특별하게 다가오는 어떤 진함도 없다. 거기에 삽화로 잡아주는 배경 또한 아련한 느낌을 준다. 아주 오래된 기억을 표현하기엔 딱 좋아보이는 수묵화처럼.. 어쩌면 그 아련함으로 작가의 어린시절은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어른을 위한 동화.. 어른들에게는 정말 동화같은 느낌을 전해주었을까? 왠지 삐딱함이 엿보이는 내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그 어린시절이 그다지 즐거운 시절로 기억되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하지만 삶은 덧없는 것 같지만 매순간 없어지지 않는 아름다움이며 따뜻함이 어둠속에서 빛난다던 작가의 말에 토를 달고 싶지는 않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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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 번지는 곳 크로아티아 In the Blue 1
백승선.변혜정 지음 / 쉼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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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말을 빌려보자면  면적이 한반도의 1/4인 나라, 구시가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나라, 우리와 비슷하게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슬픈 국경을 너무도 쉽게 넘는 나라가 크로아티아다.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동안 맨 몸으로라도 그 마을 한 귀퉁이에 숨 붙이고 살고 싶었다던 마을, 과연 그 마을은 어떤 곳이었을까? 공기인듯 물인듯 나무인듯 자연스럽게 그 속에 섞여 살고 싶었다던 글쓴이의 말을 보면서 생각해보자니 그야말로 마을 자체가 하나의 그림처럼 보여지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을거라는 환상이 생겨난다. 누구라도 행복을 담아간다는 곳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글쓴이의 찬가는 정말이지 극치를 이룬다. 꼭 그곳에 갔어야만 했던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그곳에서 그들이 보고 만지며 느꼈던 것들이 무엇이었을까? 펼쳐지는 사진들이 나를 유혹한다.

핑게도 좋다. 밥값의 거스름돈을 넘치게 받았으므로 빚을 졌고 그 빚을 갚으러 다시 두브로브니크에 가야 한단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랬을까? 가슴 가득, 그야말로 한아름 안아들었을 길위의 행복이 저절로 느껴진다. 사진과 함께 어울어지는 글쓴이의 짧은 감성조각들이 그것을 보는 내 감성마져도 달아 오르게 만든다. 두브로브니크의 성벽위에서 바라다보는 글쓴이의 시선들이 사진으로, 짧은 탄성으로 내게 다가온다. 정말 멋지다! 이쯤에서부터는 나도 은근히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도 여권을 만들어 크로아티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아니, 아직은 아니다. 글쓴이의 말처럼 사람사는 모습은 어디나 비슷할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빨간지붕이 모여 있는 노브리예나체 요새쪽은 나도 한번 가보고 싶어진다.

빨래를 널어놓은 풍경, 내가 참 좋아하는 그림이다. 거기에 뒷배경이 돌담이라면 더 비할데가 없다. 덜 짜여진 빨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그렇게 뚝.뚝. 정이 떨어져내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까닭이다. 시골 어느 마을을 지나치다 높은 종탑이 있는 교회를 보면 차를 세우고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종을 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종소리를 열어 내 마음을 울려보고 싶은 까닭이다. 그렇게 '정情'스러움을, 그런 아름다움을 글쓴이들은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에서 찾아낸 듯 하다. 모든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게!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말이다. 슬픈 기억을 호출하는 바닷빛... 도대체 어떤 그림이었길래 이토록이나 슬픈 뉘앙스를 풍길 수 있는지 두브로브니크의  그 바다가 궁금하다. 그들도 배를 띄워 풍어를 기원하는 사람들일진데 그들의 바다가 무에 그리 특별할까 싶어서. 모르는 사람들앞에서 무장해제된다는 것, 경계심을 허물어뜨린다는 것, 표정없이 눈에 독기를 품지 않아도 되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미소를 짓게 만드는 곳이라는 말에서 하나의 공감대를 찾아보려 노력한다. 상처를 품은 너의 도시를, 너의 사람들을, 너의 물빛을 기억할게, 라고 말하며 두브로브니크를 떠나던 글쓴이는 정말로 두브로브니크를 사랑했었구나 생각한다. 놀랍도록 절제된 문장속에서 놀랍도록 커다란 사랑을 발견해낸다.

내가 글쓴이의 사진을 통해 이곳이라면 정말로 꼭 한번은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은 플리트비체다. 오직 물소리만 들었고 하늘과 땅사이 나무와 폭포와 호수와 그 호수속의 하늘만 있다는 곳.. 물속에 잠긴 나무가 나무요정이 되어 글쓴이의 추운 현실을 잊게 만들어 주었다는 곳.. 그가 사진으로 보여주며 안내하던 플리트비체는 사진만으로도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물도 나무도 하늘도 모두가 물들어 버릴 것만 같은 푸르름으로 옷을 해입은 듯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것만 같았다. 빗속에서의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 는 그 말조차도 부럽기만 했다. 정말로 정말로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떠날 수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여행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말이다! 말없이 펼쳐지는 몇 장의 사진들이 나를 유혹한다. 정말 환상이다! 정말 아름답다!  같은 공간위에서 펼쳐지던 계절의 유혹이었다. 그곳만이 색다른 계절을 살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진이 정말 많은 것을 담아내는구나 싶었다. 다음에 다시 오겠다는, 어쩌면 절대로 지켜지지 못할 약속을 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는 곳 플리트비체는 나도 꼭 한번은 가보고 싶다.

아직 내전의 상흔이 남아있다는 스플리트..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과 밀실같고 미로같다는 구시가지의 풍경은 왠지 낯설었다. 무슨 굴속같다. 누군가 죄를 짓고 숨어 들어와 살기 시작했던 곳은 아니었을까? 이 곳을 여행하면서도 짧게 짧게 여행자의 메세지는 계속된다. 감성을 울리는 메세지들.. 초록색으로 칠해진 나무창과 공중전화 하나를 보고도 지나치지 못하는.. 여행하는 내내 그들은 진심으로 행복했을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여행자들의 기착지. 서글프고 아련한 넥타이의 유래를 알 수 있게 해 준 곳. 기형도의 시를 떠올리게 했다던 장바구니를 머리에 인 아낙네상이 있던 곳. '공존共存'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해주던 타국 남자의 목소리가 그들의 일정을 바꾸게 했던 곳. 그 곳, 자그레브를 끝으로 그들의 여행은 마침표를 찍었다. 어울리지 않을 것들이 공존하는, 모든 것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는 자그레브에서 마침표를 찍는 그들의 마음속에는 그 순간까지도 미련과 여운이 가득 차 있는 듯 하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에게도 당신의 등을 떠미는 한장의 사진이 있느냐고.. 있다! 어쩌면 다른사람도 가슴에 품고 있을만한 그렇게 흔해빠진 사진 한장이지만 기회만 닿으면 꼭 가보리라 다짐하는 그런 사진 한장이 내게도 있다.

흔적. 사랑의 흔적, 우정의 흔적, 이별의 흔적, 배신의 흔적, 슬픔의 흔적. 살아가면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점점 늘어간다. ( 이 책은 쪽수를 헤아리지 못한다. 그저 보고 느끼면 그만인 탓에.. 그래서 이 글이 어디쯤인지를 말하지 못한다. 단지 여행자들이 자그레브의 거리를 걷다가 낙서가 있는 벽을 찍었던 사진위에 이 글이 적혀있었다고만 말해야겠다.. 이렇게 감성이 예민한 사람들이 여행을 떠났으니 그 여행은 한편의 시처럼 다가왔을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어쩌면 글쓴이가 남겨주는 마지막 메세지는 아니었을까? 여행, 흔적처럼 남겨질 여행의 기억들.. 그 흔적을 영원토록 지우고 싶지 않겠지.. 살아가면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점점 늘어간다는 것은 진정 행복한 일일게다. 마음에 상처를 내는 흔적만 아니라면- 돌이켜보아 아픈 기억을 되새김질 해야 하는 그런 흔적만 아니라면- 그런 흔적이 내 가슴속에도 살아가면서 자꾸만 늘어갔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굳이 크로아티아라는 나라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유적지 탐방이 목적은 아니었기에 단지 책과 여행을 사랑한다는 두사람의 마음과 시선만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보여주는 사진 한 장, 그들이 들려주는 작은 속삭임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공간을 아무런 생각없이 느낌으로만 받아들인다는 게 쉽진 않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또하나의 여행길이 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함께 했던 시간이 행복했고 작지만 그들이 건네주는 여유를 한 움큼 받아든 느낌이다. 여행은.. 참 매혹적이다. 할 수만 있다면 여행만 하며 살아보고도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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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사회학
수디르 벤카테시 지음, 김영선 옮김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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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물어보자. 가난은 개인의 책임일까, 사회 문제일까? 가난은 죄일까, 죄가 아닐까? 세상에는 정말이지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눈에 환히 보여지는 것들,  조금만 어떻게 해보면 될 것 같은 그런일들이 의외로 참 많다. 여기 이 책속의 주인공들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 않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아니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열심히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가난은 개인의 책임이기도 하고 사회문제이기도 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때문에 가난은 죄라는 말도 성립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마다의 상황에서 열심히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것이 사회라는 커다란 틀에 부합되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을테니 말이다.

책속의 흐름은 두 줄기의 강물같다. 하나는 그래도 대학을 나오고 한때 주류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했으나 흑인차별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한 채 출신지인 빈민가로 돌아와서 갱단의 보스가 된 제이티이다. 그가 대학까지 나왔고 나름대로 전공했던 분야도 있었지만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꿈을 접어야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그가 이끌어가는 갱단내의 모든 상황들은 차분하다. 분노의 격정에 휘말려들것도 같은데 제이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행보가 상당히 시선을 끌었다. 또 하나는 빈민가 사람들의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해주며 자경自警주의적 정의를 실현해 나가기는 하지만 주민들이 서비스를 받게 해주는 대가로 뒷돈을 챙기며 부정수익자들로부터 세를 거둬들이는 또하나의 중간계층 베일리 부인이다. 그가 해결해주는 문제는 대부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어내야 하는 아주 사소한 문제들이다. 전기가 나갔다든지, 수도가 끊겼다든지, 대문이 떨어져 나갔다는지.. 그런데 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문제마져도 해결할수가 없는 것일까? 그들은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이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한 채 살아가야 했던... 그 사이에서 우리의 주인공 수디르는 그들을 향해 섣부른 동정도, 비판도 또한 미화도 하지 않는 위태로운 줄타기를 한다.

여론조사라는 게 있다. 통계라는 게 있다. 언론시상에서 대다수의 의견인양, 대다수를 이야기하는 것인양 떠들어대는 그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무언가를 발표할 때는 이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떠한 주제에 대한 조사를 한다음 그 조사결과를 가지고 통계를 내거나 연구를 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 직접 발로 뛰어 그 주제속으로 들어가 알아내고 그것을 근거삼아 결론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어느쪽이 옳은 일일까? 일반적인 견해로 볼때 전자의 방법을 더 선호하는 듯 하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어느한쪽만 옳다고 볼 수는 없는 듯 하다. 어떤 근거자료나 조사자료를 보고, 혹은 직접 발로 뛰어 알아낸 자료를 모아 기획한 결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온전히 다 옳다고만 볼 수는 없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직접 연구대상을 만나고 그들의 삶속에 뛰어드는 후자를 선택했다. 잘한 일이었을까?

언젠가부터 사회학 분야 전반에 걸쳐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수디르의 마음을 내가 진정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어느정도는 충분히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공감이 생겨난다. 저명한 사회학자들의 연구논문들이 자신이 목격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추상적인 그들의 사회정책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과는 현저하게 동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연구했고 발표했던 사회학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들이 과연 가난한 사람들과 얼만큼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지... 수디르는 자신이 몸을 담고 살아가는 사회의 테두리안에 그들도 함께 머물렀으면 하고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의 자경自警주의적 정의가 못내 안타까웠던 수디르는 한편으로는 두려웠을 것이다. 점점 다른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얼마전에 읽었던《100℃》의 주인공 영호가 생각났다. 그가 처음에는 외면했고 이해할 수 없었던 선배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외침이 점차 자신의 가슴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인정하였던 그 순간이. 거센 물결앞에서 저항하다가 끝내는 죽음마져도 불사했던 선배들의 그리고 동료들의 그 외침속으로 동화되어가던 영호의 모습. 거기에는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정의가 존재하고 있는것은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수디르 역시 많은 혼란과 마음의 갈피를 느꼈음에도 그들 곁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쯤에서 나는 수디르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조금만 더 힘내라고..

한편의 영화같은 이야기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니 좀더 접근법을 써서 말한다면 한편의 다큐멘터리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리겠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보다는 이런 일도 있다는 것을 세상사람들 중의 몇퍼센트만이라도 인정해주길 바랬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그런 상황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의 안위와 안정과 평화를 위하여 외면하고 있을뿐.. 사람은 누구나 내가 먼저라는 의식속에서 살아갈테니 말이다. 단 한사람이, 그것도 학생의 신분으로 단지 연구과제를 풀기 위해서, 단지 학위논문의 자료로써 써먹을 요량으로 갱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어쩌면 서로의 필요성에 의하여 그런 일이 생겼을 수도 있겠지만 갱단 보스 제이티와 수디르의 끈끈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그들과의 접촉속에서 그들이 요구하던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논리앞에서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상태의 정의를 발견할 때마다 그가 겪어야 했을 혼란과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내가 어떻게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리라. 자신의 마음이 이편도 될 수 없고 저편도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곳의 누구도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만 범위를 정해놓은 채 대화를 나누어왔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사람은 저마다의 위치와 환경속에서 생각하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있는 사람들은 있는 생활 자체를 충분히 즐기며 살아갈 뿐이고, 없는 사람들은 또 없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어쩌지 못한 채 그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살아갈 뿐이다. 문제는 모두가 저마다의 잣대로만 상대를 평가하려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혹은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처럼 관심두기를 꺼려하는 일이 당연한 듯이 우리앞에 존재할런지도 모른다) 그런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모순과 아이러니가 비일비재하다. 너무나도 추상적인 것들이 흘러넘친다. 어느 누구도 상대의 경계선을 넘어서고 싶어하지 않는다. 없는 자들만이 죽어라고 자신들의 경계선을 넘어서기 위해 애를 쓸 뿐이다. 어느것도 온전하게 옳다고 말 할 수 없는 세상.. 우리의 시선과 관심은 어느것에 머물러야 하는 것인지.. 서로를 향한 거짓과 위선을 제외한다면 단지 자신의 안녕과 평화만이 눈앞에 있을 뿐이다. 그렇게 세상은 필요에 의해서만 접촉을 허락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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