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천 가족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4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평화로운 숲속에 너구리들이 살고 있었다. 너무나 평온해서 그들에게는 아무런 근심도 없는 것 같았지만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서서히 숲을 망가뜨리는 인간들의 모습은 정말이지 어쩌지 못하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하나둘씩 쓰러져가는 나무와 함께 그들이 먹고 살아야 하는 숲도 사라져갔다. 떠나야 한다고 말하는 너구리가 있었고 이미 떠나버린 너구리도 있었다. 어떻게하면 자신들이 살아왔던 숲을 지켜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너구리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짜내기도 하지만 포크레인을 앞세우고 땅을 파헤치는 인간들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혹은 다람쥐처럼 인간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먹이를 얻어먹는 너구리도 생겨났다.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는방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더이상 갈곳이 없는 너구리들이 인간을 향해 반기를 들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너구리들은 멋진 둔갑술을 할 수 있었다. 떠나는 너구리들이 둔갑술을 이용해  인간으로 변신하여 하나둘씩 인간세상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인간처럼 살았다. 이 이야기는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줄거리이다. 너구리들은 잡식성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생태적으로 보자면 그럴수도 있겠지만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보자면 그나라만의 민속설화나 전설을 좀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후편처럼 느껴지던 책이었다.

책의 표지를 보면서 내가 떠올린 것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앞서 말한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이었고 또하나는 <이웃집 토토로>였다. <이웃집 토토로> 역시 민속설화나 전설을 염두에 두고 나온 작품이 아닐까 싶은데... 오래된 나무의 깊은 숨결아래에 자신의 거취를 정한 토토로와 깊은 우물의 심연속으로 모습을 감추어버린 너구리 야사부로의 작은형이 오버랩되었다. 사츠키가 사라져버린 동생 메이를 찾아달라고 나무속의 토토로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모습과 야사부로의 동생이 가장 위급한 순간에 우물밑의 형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모습 또한 다르지 않았다. 전철로 변한 너구리는 버스로 변한 토토로의 고양이버스와 흡사했으니 말이다. 이런 저런 설정을 예로 들다보면 엇비슷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너구리를 통해 보여주던 가족사랑과 인간의 씁쓸한 뒷모습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필요치않은 인간의 본성. 오직 인간에게만 있을 것 같은 그 사악함앞에서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까 싶다.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손해라는 것이 일본 독자들의 반응이라는 역자후기를 빌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분명히 손해를 보았다.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한 까닭이다. 역자의 말처럼 이런저런 아쉬움을 차치하고라도 별다른 변화없이 같은 상황들이 여러번 반복되어지는 걸 보면서 약간의 무료함마져 느껴졌다. 철저하게 일본식이었다는 말일까? 아니면 내가 놓치고 지나간 무언가가 있다는 말도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다시 거꾸로 책장을 넘기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장황한 장편소설이 아니라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동화 한편으로 태어났다면 더 멋졌을거란 생각도 감히 해본다. 그랬다면 전하고자하는 메세지가 강하게 와닿지 않았을까 싶어서. 무언가 색다른 것이 있을것 같았던 기대는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단지 모습만 너구리를 빌려왔을 뿐인 허접한 인간의 무리만 보고 말았다. 

아무런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야말로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저 흘러가듯이 책장을 넘기며 오롯이 책속의 세상만 느끼며 읽었다면 재미있었을까? 위급한 상황속에서 하나로 합쳐질 수 있는 가족의 힘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다소 이해할수는 있겠다. 비를 내리고 바람이 부는 천둥신앞에서 벌벌떨며 둔갑술이 풀려버리는 엄마너구리, 잘 나가다 결정적인 순간앞에서는 꼬리를 내려버리고마는 큰형 너구리, 동생의 약혼녀를 좋아했고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었다고 생각했기에 깊은 우물속으로 숨어버린 채 현실을 외면했던 작은형 너구리, 어디로 어떻게 튈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성격을 타고난 주인공 너구리, 둔갑술을 제대로 하지 못해 꼬리를 들켜버리고마는 동생 너구리... 온통 헛점뿐인 한 가족의 이야기가 이 책속에 있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우리와 다를 게 없다는 말이다. 속마음은 숨겨두고 헛헛한 겉모습만 들이대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너구리들의 이야기, 그래서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인 이야기가 이 책속에 있었다는 말이다. 

책을 덮기전에 가장 첫장의 일러두기에서 보았던 말을 다시한번 읽어본다. 유정천有頂天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구천 가운데 맨 위에 있는 하늘, 유(Bhava=존재)의 꼭대기에 있는 하늘. 풀어 설명하자면 형체가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지만, 불교적인 뜻 이외에 파생된 의미로 '유정천'에 오른 것처럼 무엇인가에 열중하여 자기 스스로를 잊는 상태,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는 설명이 다시한번 내게 생각을 요구한다. 책속에서 그리고 역자후기에서 보게 되었던 말이 떠오른다. "재미있는 건 좋은거야" 라는... 그래 맞다. 재미있는 건 좋은거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주인공 너구리 야사부로는 낙천적이다. 가족 사이의 윤활유같은 존재라면 딱 맞을 것도 같다. 자신뿐 아니라 가족의 상황이라해도 누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진다해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처신하는 너구리 야사부로의 모습을 다시한번 떠올려본다. 그들에게 유정천 가족이라고 이름 붙여준 작가의 마음이 보일 듯 말듯하다.  아무래도 손해본 느낌을 없애려면 야사부로를 따라 책속 세상을 한번 더 음미해보아야 할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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