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천 가족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4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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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평화로운 숲속에 너구리들이 살고 있었다. 너무나 평온해서 그들에게는 아무런 근심도 없는 것 같았지만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서서히 숲을 망가뜨리는 인간들의 모습은 정말이지 어쩌지 못하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하나둘씩 쓰러져가는 나무와 함께 그들이 먹고 살아야 하는 숲도 사라져갔다. 떠나야 한다고 말하는 너구리가 있었고 이미 떠나버린 너구리도 있었다. 어떻게하면 자신들이 살아왔던 숲을 지켜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너구리들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짜내기도 하지만 포크레인을 앞세우고 땅을 파헤치는 인간들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혹은 다람쥐처럼 인간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먹이를 얻어먹는 너구리도 생겨났다.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는방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더이상 갈곳이 없는 너구리들이 인간을 향해 반기를 들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너구리들은 멋진 둔갑술을 할 수 있었다. 떠나는 너구리들이 둔갑술을 이용해  인간으로 변신하여 하나둘씩 인간세상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인간처럼 살았다. 이 이야기는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줄거리이다. 너구리들은 잡식성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생태적으로 보자면 그럴수도 있겠지만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보자면 그나라만의 민속설화나 전설을 좀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의 후편처럼 느껴지던 책이었다.

책의 표지를 보면서 내가 떠올린 것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앞서 말한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이었고 또하나는 <이웃집 토토로>였다. <이웃집 토토로> 역시 민속설화나 전설을 염두에 두고 나온 작품이 아닐까 싶은데... 오래된 나무의 깊은 숨결아래에 자신의 거취를 정한 토토로와 깊은 우물의 심연속으로 모습을 감추어버린 너구리 야사부로의 작은형이 오버랩되었다. 사츠키가 사라져버린 동생 메이를 찾아달라고 나무속의 토토로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모습과 야사부로의 동생이 가장 위급한 순간에 우물밑의 형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모습 또한 다르지 않았다. 전철로 변한 너구리는 버스로 변한 토토로의 고양이버스와 흡사했으니 말이다. 이런 저런 설정을 예로 들다보면 엇비슷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너구리를 통해 보여주던 가족사랑과 인간의 씁쓸한 뒷모습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필요치않은 인간의 본성. 오직 인간에게만 있을 것 같은 그 사악함앞에서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을까 싶다.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손해라는 것이 일본 독자들의 반응이라는 역자후기를 빌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분명히 손해를 보았다.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한 까닭이다. 역자의 말처럼 이런저런 아쉬움을 차치하고라도 별다른 변화없이 같은 상황들이 여러번 반복되어지는 걸 보면서 약간의 무료함마져 느껴졌다. 철저하게 일본식이었다는 말일까? 아니면 내가 놓치고 지나간 무언가가 있다는 말도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다시 거꾸로 책장을 넘기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장황한 장편소설이 아니라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동화 한편으로 태어났다면 더 멋졌을거란 생각도 감히 해본다. 그랬다면 전하고자하는 메세지가 강하게 와닿지 않았을까 싶어서. 무언가 색다른 것이 있을것 같았던 기대는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단지 모습만 너구리를 빌려왔을 뿐인 허접한 인간의 무리만 보고 말았다. 

아무런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야말로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저 흘러가듯이 책장을 넘기며 오롯이 책속의 세상만 느끼며 읽었다면 재미있었을까? 위급한 상황속에서 하나로 합쳐질 수 있는 가족의 힘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다소 이해할수는 있겠다. 비를 내리고 바람이 부는 천둥신앞에서 벌벌떨며 둔갑술이 풀려버리는 엄마너구리, 잘 나가다 결정적인 순간앞에서는 꼬리를 내려버리고마는 큰형 너구리, 동생의 약혼녀를 좋아했고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었다고 생각했기에 깊은 우물속으로 숨어버린 채 현실을 외면했던 작은형 너구리, 어디로 어떻게 튈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성격을 타고난 주인공 너구리, 둔갑술을 제대로 하지 못해 꼬리를 들켜버리고마는 동생 너구리... 온통 헛점뿐인 한 가족의 이야기가 이 책속에 있다.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우리와 다를 게 없다는 말이다. 속마음은 숨겨두고 헛헛한 겉모습만 들이대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너구리들의 이야기, 그래서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인 이야기가 이 책속에 있었다는 말이다. 

책을 덮기전에 가장 첫장의 일러두기에서 보았던 말을 다시한번 읽어본다. 유정천有頂天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구천 가운데 맨 위에 있는 하늘, 유(Bhava=존재)의 꼭대기에 있는 하늘. 풀어 설명하자면 형체가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지만, 불교적인 뜻 이외에 파생된 의미로 '유정천'에 오른 것처럼 무엇인가에 열중하여 자기 스스로를 잊는 상태,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는 설명이 다시한번 내게 생각을 요구한다. 책속에서 그리고 역자후기에서 보게 되었던 말이 떠오른다. "재미있는 건 좋은거야" 라는... 그래 맞다. 재미있는 건 좋은거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주인공 너구리 야사부로는 낙천적이다. 가족 사이의 윤활유같은 존재라면 딱 맞을 것도 같다. 자신뿐 아니라 가족의 상황이라해도 누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진다해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처신하는 너구리 야사부로의 모습을 다시한번 떠올려본다. 그들에게 유정천 가족이라고 이름 붙여준 작가의 마음이 보일 듯 말듯하다.  아무래도 손해본 느낌을 없애려면 야사부로를 따라 책속 세상을 한번 더 음미해보아야 할 것 같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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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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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건 뭐지? 한참을 심각하다가 느닷없이 웃음이 터져나온다. 천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명치 끝이 아파오다가도 그들의 방어벽(?)같은 대화를 듣게 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런데 그 웃음 뒤끝이 허탈해지고 점점 깊어지는 먹먹함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작가는 마냥 심각한 상태로 이야기를 들려주기가 미안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일도, 아니 아주 작아서 별것 아닌 것들속에서도 웃음을 찾아낼 수 있는거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가 놓치는 작은 행복들이 얼마나 많은가.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은 채 방치해 둔 그 소소한 행복들은 또 어디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한번쯤은 되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천지와 만지를 통해 보여지는 가족의 울타리가 그다지 희미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었는데... 흐릿한 손바닥 위를 나르는 책표지의 나비 한마리가 애처롭다. 

항상 이런 식이었지? 문제에 접근하다가도 머리 아파지겠다 싶으면, 불리해지겠다 싶으면, 안 되겠다 싶으면, 네 맘대로 말 뚝 끊고 끝냈지? (-106쪽)

그래, 우리는 어쩌면 그렇게 살았을 게다. 아니 그렇게 살고 있을 게다. 머리아프고 복잡해지는 그런 일에는 아예 다가서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하면서. 아직 아이니까, 하는 마음이 늘 앞서는 건지도 모르겠다. 니가 뭘 안다고?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대수롭지 않게 하는 말중에 해서는 안될 말의 으뜸.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지. 뭘 몰라서, 정말 오래살지 않아서 잘 알 것 같은, 나보다는 더 오래살았다고 하는 어른들에게 물으면 가차없이 날아오는 저런 말들이 꼬챙이처럼 그렇게 아이들을 찔렀을 게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었는데.. 어쩌면 그 시절의 일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는지... 아니 사실 나의 경우는 그 시절을 기억하고 싶지 않았었다. 늘 도서실에서 말 그대로 콕 쳐박혀 살았던 나의 학창시절속에는 외롭다는 것조차도 사치였을테니까. 손을 내밀 때 잡아주어야 하는 잠시의 따스함조차도 잃어버린 채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그토록 쉬지 않고 달려가는 것인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마음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사는 게 다 급했다. 아직 내일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금세 내일이었고, 벌써 어제였다. 새끼들한테 인생 전부를 건 엄마는 아니었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달려올 엄마가 있다는 믿음과 존재감은 주고 싶었다.(-163쪽)

정말 급해서 급한 삶은 얼만큼이나 될까? 쫓기듯 산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천지엄마와 화연엄마의 만남이 너무나도 아프게 다가왔다. 어찌보면 피해자와 가해자의 만남처럼 보여지던 그 장면이 나는 너무도 안스러웠다. 사실은 그게 아닌데..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란 말인가. 작가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려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 게다. 그 두 아이의 엄마를 통해서 변명 아닌 변명을 들어야 하는 우리에게 당신도 이런 건 아니냐고 묻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오래전에 내가 경고했었잖아요. 그러니 당신 책임입니다. 그러면 아직 어린 내 새끼는 어쩌라구요? 서로의 마음을 숨긴채로 그것이 정당한 것인양 포장지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대화를 주고 받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왜 자기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인지.. 왜 나의 뒷모습을 한번쯤 돌아보려 생각하지 않는지..

아시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다른 사람의 생을 OX 퀴즈처럼 안다와 모른다,로 결정지으면 안됩니다. (-213쪽)

누구나 다 그렇지. 자신만의 잣대를 들고다니며 그 잣대로 재기를 습관처럼 하고 살지. 하지만 남의 잣대에 내가 재여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감히 그렇게는 할 수 없을텐데.. 죽음을 생각하면서 다섯개의 실뭉치를 준비했던 천지의 그 마음, 봉인되어져야 했던 그 마음이 얼마나 서러웠을까? 가면서도 자기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그 어린 심정을 우린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을 한다. 무서운 십대라고. 그러나 무엇이 무서운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단지 정해놓은 규칙에서 조금 벗어났다고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인데 어른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그들을 몰아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 뜨끔하게 각인되어지던 순간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먹먹함 뒤편으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숨기고 싶고, 숨겨야만 하는 건 아닐까 싶었던 불편한 진실들앞에 당당히 서는 우리의 문학이 서서히 많아져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가 지나쳐왔던 시절이지만 살아가는 방식이 모두 달라졌다. 그런 시대에 사는 지금의 아이들을 이해한다는 건 약간의 무리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책을 훓어 본  아들녀석이 물었다. 엄마, 이 책은 어떤 책이예요? 이건 너같은 중학생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책을 읽으면 아들 마음 좀 알아 줄 수 있을까 싶어서.. 했더니 아들녀석이 베시시 웃으며, 아마 잘 안되실걸요? 한다. 왜? 뭐, 그런게 있다구요!..  책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지나가는 아이들의 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놓치고 지나가는 자신의 마음 또한 잘 담아낸 듯 하다. 그런 마음조차도 자신의 틀에 맞추어 생각하려 드는 어른이라는 이름의 존재.. 내가 아프면 아이들도 아프다는 사실을 왜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인지.. 답은 하나였다. 무서운 어른들이 무서운 아이들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 책을 다 읽고나서 아들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요? .... 아니, 그냥... 아행행 ㅇㅅㅇ(요건 무표정을 뜻하는 말이란다) 엄마, 디게 뻘쭘하다! 히히히...  아들, 너도 이 책 좀 읽어볼래? OK!!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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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
존 론슨 지음, 정미나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심령술사를 보여주었던 것 중에 지금까지도 가장 강한 느낌을 남겨주는 이야기가 있다면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영매 역할을 했었던 배우의 모습이다. 강한 의지로 액자를 넘어뜨린다거나 동전을 밀어올리던 남자의 영혼. 그리하여 그 영혼의 존재를 미심쩍지만 믿게 되었던 여자의 마음. 그런데 정말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벽을 사이에 두고 건넌방에 있는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거나 죽음에 이르게 한다거나 하는 황당한 일들이 정말 생겨날 수 있다는 말일까? 언젠가 매스컴을 통해 위험에 빠진 자식을 위해 자동차를 들어올리는 엄마가 있었다는 말은 나도 들은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전문적으로 하는 군사조직이 있을 수 있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한 두 사람이 그런 경우는 뭐 그럴수도 있겠다 생각하겠지만 단체로 그런 현상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어지는 유리 겔라나 데이비드 카퍼필드같은 단순히 마술이라는 속임수를 쓰는 사람들조차 그런 류의 작전에 휘말려 들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것은 사실적인 것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러니까 믿으라고?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이란 제목만 보면 단순히 추리소설이나 판타지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저자가 뉴스를 다루는 저널리스트라는 말에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일종의 다큐와 같은 내용이겠구나 싶어 살풋 흥미를 자아내기도 했다. 누군가를 따라다니며 취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직접 사건속으로 뛰어들어 사건을 파헤치는 형식은 긴장감마져 들었다. 그야말로 SF소설같은 이야기였다. 미국의 군사정보시설이나 기밀을 파헤쳐가는 일들이 실제적으로도 이렇게 일어나는구나 싶기도 했다.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이라는 말속에 함축되어진 커다란 의미들을 저자의 발길을 따라가다보니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었다. 염소를 노려보기만 해서 죽일 수 있다는 힘, 일종의 초능력을 키우기 위해 모여든 집단.. 그런 집단들에 의해 많은 희생자들이 생겨났고, 자신들이 유추해냈던 일들에 대한 효과를 시험해 보기 위해 저질렀던 비인간적인 행동들은 정말이지 읽는 사람에게조차 역겹게 다가왔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미국이 지금도 최대의 실패라고 여기는 베트남전이 이야기의 실마리인 것처럼 보여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거란 생각마져 든다. 일전에 실감나게 읽었던 가케하시 쿠미코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를 통해 알 수 있었던 전쟁 이야기라거나, 그 책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아버지의 깃발>이라는 영화속에서 보여지던 참전용사들의 뒷이야기속에는 사람이 사람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었던 까닭이다. 지금 현재도 이라크전에 참전했던 병사들이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리며 정신적인 고통과 싸워가며 살아가고 있다는 뉴스를 들어본 기억이 있는 걸 생각하면 단순히 베트남전에서의 일이 동기가 되었다고 하기엔 뭔지 껄끄럽게 다가오는 뉘앙스가 있다. 죄의식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어렵다, 그러니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라는 생각.. 정말 기가 막히지 않은가 말이다.

간혹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한 것 같다. 염력만으로도 상대방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거나 상대방의 생각을 바꾸게 할 수도 있는 일들 말이다. 책속에서도 저자가 실제적으로 그런 일을 겪는 모습이 나오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훈련을 시켜서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부터가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미국 군사정보기지에는 실제로 그런 부대가 있었다니! 그리고 그 부대의 사람들이 영화에서처럼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고 그림자처럼 배치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것도 철저하게 가려진 비밀부대였다. 그들은 정말로 그럴 수 있다고 믿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럴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으로 거기에 매달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라거나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그런 부대를 창설하기에 이르렀겠지만 조금은 황당하기도 하다. 투명인간처럼 모습을 감춘다거나 벽을 통과해서 건너편으로 넘어간다거나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염소를 죽일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정말로 생겨날 거라고 믿었다는 말이니..

실제적으로 테러와의 전쟁 이면에서 싸우기도 했다던 그들. 저자가 만난 사람들과의 인터뷰는 정말 경이로웠다. 고문의 형식으로 도입되어졌을 초능력 부대의 모든 기술들. 텔레파시라는 말은 어느정도 인정하겠지만 초능력이라는 말을 인정하려면 꽤나 인내심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통한다거나 소리를 통해 사람의 저 밑바닥에 깔린 그 무엇인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그들은 이라크 전쟁포로들에게 자신들만의 방법을 적용시켰다고 한다. 저자와 인터뷰를 했던 실제 경험자의 경우로 보았을 때 그것은 정말이지 터무니없어 보였다. 더구나 그들만의 용어는 나의 눈을 의심하게 했다. 제다이의 전사라는 말이나 그들이 사용하는 어떤 기구(손 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은 크기)의 이름이 프레데터였다거나 하는... 영화를 찍는것도 아니고....

현재 미국 내에서나 전후의 이라크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초능력부대 이야기.. 저자가 보여주었던 많은 사진들을 보면서 실제로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싶었는데 이라크전에서의 실패를 밑바탕으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고 느낀 그들은 또다시 색다른 길을 모색중이라고 한다. 아니 어쩌면 지금 실행되고 있을지도 모를.. 평화롭고 온화한 방식으로 싸워야 하니까, 라는 모토를 가지고.. 포로를 다루는 방식에도 변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말을 전해주었던 사람, 끝까지 모든 일의 진행사항을 알려주겠다고 했던 가이 사벨리에게서는 특수부대로 들어간 뒤로 아직 소식이 없다던 저자의 말이 왠지 섬뜩하게 다가온다. 이번 아이디어는 인정있고 온화한 방법이오, 라고 말했던 그의 말처럼 정말 그럴 수 있는 것일까? 그냥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이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분간 못 할 지경까지 사람들을 혼란시킬 수 있고, 그런 지경에 이르면 온갖 정보를 털어놓게 될거라는 그들의 계산은 맞아 떨어졌을까?  비관적 사태를 예언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닥터 둠"이라는 말이 책속에 있었다. 나는 자꾸만 그 말이 떠오른다. 9.11 사태를 예견하기도 했다던,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던 특수요원 '닥터 둠'들이 세상속에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지... 그들이 실존한다면 인류의 발전과 평화를 위해 존재하기를... 좀 더 밝은 면을 지켜줄 수 있는 수호천사가 되기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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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인가? - 인류가 밝혀낸 인간에 대한 모든 착각과 진실
마이클 S. 가자니가 지음, 박인균 옮김, 정재승 감수 / 추수밭(청림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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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두 발로 걷기? 두 발로 걷는것은 인간 말고도 있다. 도구를 사용하는 것? 아니다. 도구를 사용하는 것조차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일까? 신발을 신는다는 것과 엄지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동물과 달리 사람은 지적 호기심이 많다는 것등.. 인간을 동물과 분류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이 책속에 녹아 있다고 보아도 될 것 같다. 동물에게도 마음이라는 것이 있을까? IQ와는 상관이 없다는 마음이론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긴장하며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조금 난해하긴 하지만 동물에게도 마음이 있을까? 라는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해 치루었던 많은 실험들은 인간이기에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만들어 주기도 했다. 침팬지가 앞일을 계획하고 예약도 할 것이다라는 말을 이해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설명이 장황하다. 그래서 나는 한번 더 의문점을 찍어야 했다. 정말 왜 인간일까? 왜 인간이어야만 했을까? 이쯤에서 나는 어린 시절에 읽었던 동화 한편을 떠올린다. 평화롭게 살던 개구리들이 어느날 신께 우리에게도 왕을 내려 주십시오 했다던.. 개구리들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던 신이 처음에 선택했던 것은 나무토막이었다. 해가 되지 않는.. 그러나 개구리들은 고개를 저었고, 마침내는 신을 화나게 만들었다. 황새가 내려왔다. 무생물이 아닌 생물체였다는 것이 개구리들은 좋았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 지구상에는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종들이 살아가고 있음에도 왜 인간일까? 라는 의문점은 자꾸만 생겨났다. 나의 의문점이 혹시라도 개구리들과 같은 무지함이 아니기를 바래보면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복잡하고 어려운, 전문적인 용어들이 난무하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설명이 너무 장황하게 느껴지는 까닭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본인의 관점으로 치우치는 것 같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의 전문가와 이야기 하는 게 어렵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상대방도 잘 안다고 생각한다.(-251쪽) 책에도 나와 있는 이 문구를 빌어 나는 위안삼으려 한다. 왜냐하면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우측하두정피질과 후부측두피질의 집합이 무엇인지, 안와전두피질이나 측두전엽합부라는 말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로써는 저자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나 넘어갔는지 모를 일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더 많았다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일게다. 감수자의 말에서 할아버지가 들려주듯이 말했다는 표현은 같은 부류를 전공하는 사람의 입장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했다. 사실 그 전문적인 용어들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에 책읽기를 끝내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읽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그 용어들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는 부분들은 그다지 어렵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중해야만 했지만 내가 찾고자 했던, 내가 찍어야 했던 의문점에 대한 마침표 혹은 느낌표를 찾기 위해 무던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저자가 찾아낸 점들은 공감하기에 충분한 것 같다. 왜 인간이어야 했는지, 연구하여 분석했던 것들을 동물과 비교하여 보여주었던 많은 사례들만 보아도 그렇다. 사람은 자발적이고 의도적으로 하나의 추상적 관점을 다른 관점으로 전환할 수 있다거나 과학은 인간에게만 있으며 언어와 상상을 통해 감정을 모방하는 능력또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다는 것 등 동물이 누릴 수 없는 것들, 다시 말해 사고할 줄 알고  즐거워하며 느낄 수 있는, 인간이기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내세우며 인간우위를 주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미술이나 음악을 통해 예술활동을 한다거나 인지능력과 인식을 통한 추상적인 관념, 상상력 따위들 말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와같은 것들을 동물이 누릴 수 있겠는가? 동물과는 달리 보상을 바라는 이타적인 관계나 감정을 통해 사회적인 교환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도 그 한 예일것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파이보그라는 말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사이보그는 들어봤는데 파이보그는 도대체 뭐지? 기능적 사이보그라는 의미로, 기술 연장을 통해 기능적인 면을 보충한 생물학적 유기체!  무슨 말이야? 정말 어렵다. 내적인 부분보다 외적인 소유물과 부속물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가? 지방을 축적하기보다 통장잔고를 축적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누군가 옷을 벗겨 내 알몸을 드러내게 한다면 당혹감과 수치심을 느낄 것 같은가?- 와 같이 파이보그 자가진단 질문이라는 것을 예로 보여주고 있었지만 가만히 읽어보니 좀 그렇다. 내부적인 것보다는 외부적인 것에 더 치우쳐 살아가는 것이 파이보그라는 말처럼 들리니 어찌된 일일까?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왜 신체는 업그레이드하는 게 잘못일까? 라는 말 앞에서 나는 문득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들이 떠올랐다.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를 대비하여 자신과 똑같은 또하나의 생명체를 만들어 관리한다는- 조금은 떨떠름한 영화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하나의 혁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뒤로 이어지는 설명을 듣다보면 마치도 한편의 영화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달팽이관 이식이라거나 뇌속에 발생한 전위를 잡아 신경신호를 전기로 바꿔 전신마비환자가 컴퓨터 커서를 조작한다거나 하는- 더 무서운 것은 잃어버린 기억마져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뇌의 신경계를 연구 분석하여 산출되어져 나오는 이런 모든 것들이 왠지 나에게 두려움을 전해준다. 어쩌면 미래세상속에서 우리는 모두 터미네이터가 되어 있지는 않을까?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아 보인다. 저자의 말처럼 지금 우리 곁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로봇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다. 감정까지도 주입시키려 애쓰는 걸 보라! 터미네이터란 영화와 AI,아이로봇과 같은 영화가 허구가 아닌 현실이 되어버리는 그런 세상!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인간과 똑같은 로봇을 만들 수 없다는 현실에 안도하게 된다. 저장된 기억을 사용하여 끊임없이 예측을 한다는 우리의 뇌. 하지만 기계는 아무리 지능적이라해도 인간과 같은 동기나 욕구를 갖지 못할 것이기에 영화와 같은 일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주는 까닭이다. 인간! 도대체 왜 인간일까? 이 지구상에 오직 인간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인간이 최상의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는지 궁금했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테다. 그런데 으아~ 정말 복잡하다. 내 머리가 터져버리는 줄 알았다. 인간만이 할 수 있다는 엄지를 사용하는 능력, 문제를 제기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 추상적인 사고, 상상- 이런 모든 것들은 뇌로부터 시작이었다. 그래서 이책은 시종일관 뇌에 관한 설명이다. 뇌의 부분들, 그 기능과 능력에 대해, 그런 부분들에 이상이 생겼을 때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해 정말이지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때로는 동물과 비교해가면서 말이다. 

너무 쉽게 생각하며 다가갈 책은 아니었다고 느끼며 나의 눈길이 책의 말미를 달려가고 있을 때 나는 에필로그에서 재미있는 구절을 발견했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전혀 감흥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는.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생명체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자라고 한다는 말도 함께. 저자와는 달리 나는 솔직히 그 말에 공감한다. 구구절절 아무리 그럴 듯한 설명을 늘어놓는다해도 오직 인간일 수 밖에 없다는, 오직 인간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놓은 함정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인간, 그 오만함의 극치를 이 책을 통해 다시한번 보게 된 것 같아 왠지 씁쓸하다.

흥미로운 결과가 있어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소개해볼까 한다. 사람이 조직적인 계층구조없이 관리할 수 있는 인원은 몇명이나 될까?  150명~ 200명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고 한다.  현대인의 주소록에 적힌 주소 역시 150명 정도라는 말이 재미있지만 놀랍기도 하다. 동물이 털고르기를 하며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듯이 인간도 잡담을 통해서 서로간의 연결고리를 형성한다는 말은 새겨둘만 하다. 잡답이 없다면 혼란과 무지에 빠질 것이라는 말에 공감할 수 있는가? 놀라운 것은 대화집단이 무한정 커지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네명정도로 제한된다는 것이다. 네명을 넘어가면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패가 갈린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럴 듯하다. 아니 정말 그런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 그 외의 많은 사실들에도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딱 하나 마음에 드는 말이 있다. 인간은 유일하게 우는 동물이다. 감정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어쩌면 그 눈물때문에 그 오만함도 현재까지는 용서되어지는 것이 아닌지.../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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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 치타가 달려간다 - 2009 제3회 블루픽션상 수상작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40
박선희 지음 / 비룡소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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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원치 않는 일을 하며 십대를 살아가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니까... 이런 말에 공감하지 않는 십대가 몇명이나 될까? 나는 아들에게 가끔 이렇게 묻곤 한다. 너 엄마랑 얘기하면 답답하니? 자주는 아니고 가끔은 그래요..라고 말하는 아들녀석에게 이렇게 묻는 것은 아마도 나름대로는 소통하고 싶은 욕심이 앞서는 탓일게다. 어른들과 통하였느냐,고 묻는다면 대체적으로 꽉 막힌 벽이옵니다, 라고 말하는 아이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요즘 아이들이 미쳐 날뛰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건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쉬운 일은 아니다. 귀를 찢는듯한 그 소음속에서도 아이들은 제각각 나름대로는 음악을 느끼고, 때리고 부수는 게임의 법칙속에도 나름대로의 룰은 있다고 아이들은 말한다. 어찌보면 우리가 어른이 되기 위해 치러야 했던 성년식과 너무도 다르기에 용납되어지지 못하는 행동일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자라왔던 시절과 지금의 아이들이 살아가는 시절이 다르다는 것은 인정해야만 한다. 단 한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어른들은 몰라요, 라거나 어른들은 다 그래, 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었으니까.

성장소설이라는 것은 솔직하게 말해 똑같은 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단지 이름만 바뀔 뿐.  제목이 참 신선하게 다가왔던 책이었다. 파랑치타라는 말 자체가 전해주는 느낌이 약간은 신선했다고나 할까?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파랑치타가 안고 있는 의미가 의외로 컸다. 주인공 강호가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의 이름이 파랑치타였고, 우리의 아이들이 답답한 현실속에서 찾아낸 하나의 출구로 작용했던 밴드부의 이름이 또한 달리는 파랑치타였다. 발산하지 못하는 십대다움을 쨍쨍거리는 기타와 두두두두둥 쨍 하는 드럼과 심벌즈를 통해 표현해주고 싶어하는 작가의 안타까움이 충분히 실려있던 이름이 아닌가도 싶다. 무조건 빗나가기 보다는 나름대로의 이유와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달랐다. 마음속에 하나씩의 멘토를 설정해 두었다는 것도 멋지게 다가왔다. 무조건적인 반항과 어른들을 향한 결사적인 항전(?)을 그리기 보다는 타협의 여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우리의 주인공들이 멋지게 첫 공연을 끝냈을때 나도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아니 이미 박수를 치고 있었다. 벽에 그림처럼 붙어있던 부모들이 조금씩 몸을 흔들기 시작했던 것처럼.

파랑치타를 읽으면서 완득이를 생각했다는 건 무리가 아닐 것이다. 완득이의 옆에 머물던 선생 똥주처럼 강호 패거리 옆에는 김세욱 선생이 있었고, 행복을 말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던 완득이의 가정생활처럼 우리의 강호에게도 힘겨운 삶이 있었다. 말해 무엇할까? 어제, 세번째 엄마가 집에 들어왔다- 로 시작되어지는 첫문장이 이미 너무도 많은 것을 대변해주고 있으니... 그렇게 틀에 박힌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파랑치타를 타고 달려가는 이 소설속의 캐릭터들은 살아 있었다. 십대다움을 한껏 발산하고 있었다.  시민운동가로 살아가면서 학교를 자퇴하고자 하는 딸아이의 진로를 과감하게 수용해주는 이경의 부모를 보면서 우리의 교육현실을 모른체 할 수는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우리아이를 지금의 학교시스템에 맡기고 싶어하지 않았던 부모중 하나다. 대안학교에 대한 정보를 찾아 헤맸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못한 채 결국 현실의 벽에 부딪혀 그 뜻을 접어야 했지만 지금도 미련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의 학교시스템에서 내 아이를 벗어나게 해 주고 싶다.

지독한 현실을 인정하며 동생 강이에 대한 사랑만큼은 잃지않는 강호의 무던함이 나는 좋았다. 제 나름대로의 인생여정을 받아들이며 산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닐테니 말이다.  또한 없어서 편하게 느껴지는 아버지의 존재를 불쌍하게 바라보았던 강이의 시선속에는 요즘의 십대들 심정이 담겨있는 것 같아 마음 한쪽이 시렸다. 엘리트 만들기의 희생양이 되었던 형과는 달리 엄마의 의지보다는 자신의 의지쪽으로 가닥을 잡았던 도윤의 용기도 괜찮았다. 학교는 그대로인데 너희만 상처를 받을 뿐이라던 김세욱 선생의 말처럼 아이들에게 보여지는 세상은 딱 그만큼이다. 아이적의 반항은 그저 반항일 뿐이다. 한순간 스쳐지나는 바람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바람들이 모여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자양분이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이, 시간이, 세월이 우리를 그저 아이라는 틀속에만 가둬두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 아이들이 훗날 어른이 되어 다시 아이들을 본다면 어허, 나도 그때는 그랬었다 이놈들아! 이렇게 말할 것임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랬듯이... 나는 생각한다. 한 아이의 엄마로써. 한순간의 치기였다고, 그러니 가끔씩은 아이들의 십대다움을 인정하고 안아주어야 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아이들이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다고. 몇몇의 소수를 보고 다수를 평가하는 잘못된 잣대를 이제는 버려야 한다고...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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