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의 머리일까?
차무진 지음 / 끌레마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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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사실과 허구를 아우르는 팩션이라는 게 흥미로웠다. 추리소설 내지는 환타지? 이렇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가슴속에 뭉클하게 올라오던 무언가가 있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자꾸만 치고 올라오려 했다. 그것을 눌러내리기를 몇 번, 나는 결국 한숨을 후우, 내뱉으며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 당신들은 당신들의 조상이 기록한 문서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민족이오"라는 말 앞에서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단지 한 편의 소설속에 쓰여진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이긴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공감한다. 당연히 그럴수밖에 없을 것이다. 책에서도 대화중에 나오는 말이긴 하지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 중 어느쪽에 더 신빙성이 있을까?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역사를 단순히 기록이라고 말하는 시대는 아닌 것 같아 하는 말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삼국사기>보다는 <삼국유사>쪽에 더 무게를 두고 싶은 것이 나의 심정이기도 하다.  그 사람이 어떤 사고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관점은 달라지는 것이 맞는 말일테니..

어찌되었든 이 책은 정말 흥미롭다.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상당히 강하다. 고전을 빌미로 엉켜드는 모든 사건들은 다시 고전을 통해 풀려진다. 실은 엉키게 한 자가 풀어야 한다는 이치다. 그런데 그 전개방식이 기가 막히다. 책을 읽는 내내 도저히 참아낼 수 없었던 궁금증 하나를 풀어보기 위해 검색해보기를 몇 번, 실력이 없는 탓인지 제대로 찾아내질 못했다. 이 책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김유신 묘 진위사건..  1968년 이병도라는 사람이 조선일보에 기재해서 세상에 논란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너무 오래된 일인 까닭인지 제대로 찾아지지가 않았다.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로써 한국의 역사와 사상, 문화에 관해  실증적·객관적 방법을 중시하는 실증사학(實證史學)을 추구하여 한국근대사학이 성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된다는 말과 함께 소개되어진 그의 책들도 엄청났다. 1968년에는 정말 사건사고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 유명한 전태일이라는 이름과 김신조 청와대 피습사건이라는 말들이 1968년이라는 시대속에서 보인다.

역사적 진실속에서 잉태되어지는 끔찍한 예고살인의 형식은 호흡을 가다듬게 만들기도 한다. 먼 미래였을 지금의 시대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손의 입을 빌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하는 조상들의 서글픔.. 일제 강점기를 다룬 이야기였기에 가능했을까? 엉켜있는 씨줄 날줄의 끝은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다. 반전의 매력이 최고조를 이루게 되는 마지막 부분은 그야말로 끝내준다. 처음부터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화자의 존재.. 우리의 역사를 파헤져가는 시선이 우리가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점은 아이러니였다. 왜 우리가 아니라 일본인이어야만 했을까? 왜 우리는 그저 방관자로써만 존재하는가? 그렇지만 사실이 그랬을테니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을 하며 쫓아가는 나의 마음은 내내 불안했다. 결국 그거였구나, 싶었던 대목을 앞에두고서 나는 부끄러웠다. 내 상상을 비웃기라도 하는 양 치고 달리는 저자의 상상력은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사건의 추이를 유추해가며 쫓아가다보면 어느새 숨을 헐떡이게 된다. 그리고 오싹하는 공포를 함께 느끼게 된다. 책 속에서 살아 숨쉬는 듯한 그 분위기가 나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까닭이다. 머리만 발견된 미이라의 움직임이라거나 머리잘린 시체를 표현하는 그 문장들이 이채롭다.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고전과의 싸움.. <삼국유사>에, <삼국사기>에 저런 내용도 있었구나 싶어 안목을 넓히지 못하는 나를 탓해보기도 한다. 우리의 신화와 설화가 적절하게 잘 조화를 이루어내며 곳곳에 숨겨놓은 지뢰와 같은 복선들.. 몇 번씩 그 지뢰를 밟아 터뜨리며 내 몸이 망가질 때쯤 대한민국 사람이기에 느껴야 하는 부끄러움을 저자는 내 앞에 떡하니 남겨놓는다. 감정적인 것을 내세우기보다는 이성적인 사고와 관점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나치의 그 잔혹한 유대인 학살 현장속에서 <쉰들러 리스트>가 있었듯이 우리의 민족정신과 문화를 말살시키려 했던 일제 강점기속에서도 학자로써의 양심을 내세워 우리문화를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일단 읽기 시작하면 그 다음장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강하게 흐르는 물살처럼 그렇게 빠져드는 나를 보게 된다. 무작위로 도굴되는 우리의 유적들. 전문지식도 없는 사람에 의해 도굴된 우리의 문화유산들은 총독부로 들어갔고 들어간 문화재는 다시 경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은 우리의 문화만 말살시켰던 게 아니었다. 산맥의 혈을 막아 우리의 기를 꺾어야 한다고 쇠말뚝까지 박았다. 지금도 찾아내지 못한 쇠말뚝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는데... 일본인 겐지의 말이 떠오른다. -의식은 항상 현실에 있지않고 노래나 그림따위에만 담겨 있는 것 같아 서글프다-던 말... -정작 필요할 때는 현실에서 도망가버린다-던 말... 참으로 서글픈 말이 아닐수가 없다. 어쩌면 우리들은 사물의 본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물로 인해 얽힌 인간의 의지만이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던 그의 말은 작금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울림이 담겨 있는 듯하다.

고전을 바탕으로 풀어가는 이야기라서 혹자는 따분하거나 재미없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이 책속에서 찾아낸 메세지는 정말 많았다. 우리가 잊고 사는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인식.. 우리가 잊고 사는 우리문화에 대한 인식.. 우리의 역사속에 지금의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정답이 들어있다던 어느 유명인사의 말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너무 홀대하고 있다고... 현실속에 난무하는 문제에 대한  정답과 해답이 들어있다던  그 역사, 이제는 우리가 제대로 껴안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저 기록일뿐인 역사가 아니라 살아 숨쉬는 우리의 역사가 되어야하기에... 한 편의 소설이 주는 감동은 컸다. 멋진 작품이었다. 10년 이상 온라인 게임을 만들었다는 저자.. 러시아 여인의 몸매에 변형된 일본식 갑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북유럽 요정들이 우리 젊은이 문화의 현실임에 소심한 울분이 터졌다는 저자는 우리 이야기를 하며 놀아보고 싶었다고 했다. 우리의 것으로 이야기판을 벌이는 스토리텔러로 살고자 한다던 저자에게 진정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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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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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이 책의 부제다. 아우슈비츠가 유대인을 집단으로 학살했던 수용소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400만 명의 목숨을 빼앗았던 비극의 현장이 바로 그곳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생지옥을 만나게 된다는 곳. 유대인 학살을 이야기할 때마다 인용되어지는 굴뚝의 연기. 그 소각로나 카펫을 짜기 위해 머리카락을 모아두었다는, 그리고 고문실등 그야말로 광기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는 곳이 지금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는 것을 나는 지금에야 알게 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치에게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란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찾아가던 여행프로에서 그 때 당시 희생되었던 사람들의 두개골만 모아놓았던 위령탑이 떠오른다. 너무나 많아서 누가 누구인지를 가려낼 수 없어 그렇게 한곳에 모아 두었다고 하는데 그 탑의 이름이 영혼의 눈물이었다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숙연해지던 참배객들의 표정이 생각난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폴란드가 그 곳을 보존하기로 결정한 것은 정말 뜻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바로 그 현장에서 살아남았다는 사람의 기록이다. 뒷부분의 부록을 읽다보면 그가 겪었던 일들을 전해야 한다는 의식만으로 버텨냈다는 말이 있다. 이 얼마나 냉혹하고 잔인한 현실인지...

공동샤워실... 이곳이 바로 위장된 가스실이었고 그곳에서 약한 사람이나 노인들, 어린아이들이 죽어갔다.  나치의 인종법에 의해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희생양이었다. 금니를 뽑아 금괴로 만들었다거나 머리카락을 모아서 카펫을 짰다거나 하는 것들은 이 책속에서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열차에 올랐던 사람들. 그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배설물과 함께 먹고 자고 한다는 것이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지 화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수용소에서의 마지막을 남들보다 나은 생활속에서 지냈지만 그가 보고 겪었던 일들을 말이나 글로 전해듣는 우리가 얼만큼이나 공감할 수 있을런지... "몇 개?" "650개"... 나치는 그들을 그렇게 불렀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도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 묻고 있는 그 심정은 오죽할까 싶기도 했다. 싸구려 상품들처럼 무자비하게 포개진 채 무를 향한, 아래쪽을 향한, 바닥을 향한 여행을 했다던 저자의 말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것 같다.

여행중에 그리고 그 후에도 끝도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건져낸 것은 바로 이런 불편함, 구타, 추위, 갈증이었다. 살려는 의지나 의식적인 체념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서로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아니 서로를 바라보며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마음을 다졌을 것이다. 시간이 한방울씩 흐른다!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 더딘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게 해 주었던 버팀목은 무엇이 되었든 정말이지 단단했고 끈질겼다. 누구의 탓도 아니라고.. 누구를 탓해서도 안되는 거라고.. 옆 침대의 젊은이가 가스실로 가야하는 운명에 처했다고 해도 자신이 선발되지 않은 것에 대해 신께 감사하는 노인을 원망해서도 안된다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이름은 174517.. 텅 빈 인간...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인간이기에 그렇게 잔인할 수도 있고, 인간이기에 그 잔인함을 견뎌낼 수 있었던 거라고.. 그래서 한번 더 생각해보면 이것이 인간이냐고 묻고 있는 주체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고 피해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잔인하고 오래된 고통, 기억... 그 기억은 이미 오래전에 곁을 떠나가버린 지난 시절들이다. 뒤돌아보면 안타깝기만 한 그런 기억들이 그들을 버티게 해 주었던 것이 아니었다. 당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오직 한가지 신념으로 살아남았다는 그의 말은 정말이지 기가 막히다.  그런 기억들이 육체를 혹사시키고 배고픔에 주린 배를 쓸어내리고 곪아가는 상처의 아픔이 지독할수록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혹독한 현실을 견뎌내야만 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런 기억은 오히려 사치였을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고. 쉬운 일도, 간단한 일도 절대 아니지만 독일인, 당신들은 그 일에 성공했다고...

부록 1 - 독자들에게 답하다부록 2 - 프리모 레비 연보 를 읽으면서 쓸쓸하게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던 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내가 모르고 지나쳤던 그 커다란 사건의 배경이나 그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는 충분했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러 지나가버린 기억들에 대해 묻는 이 시대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질문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힘겨운 고통을 견뎌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열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얼마나 먹먹해지던지... 그에게는 그 열흘이라는 시간이 백년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해서 살아남은 이들중에서 나중에 서로 만남을 가진 이도 있지만 아픈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며 만남을 원치 않았던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럴 것이다. 아픈 기억은 잊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일테니... 영화 <쉰들러 리스트>나 <인생은 아름다워>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하는 제2차 세계대전이야기..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혹은 머물러 있는 시대에 따라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일까?  '이것이 인간인가' 라고 묻는 저자의 아픔속에서도 '인간'임을 인정했던 사람들도 있었음을 떠올린다. 그래서 아직은 우리에게 조금의 따스함이 남아있을 수 있는거라고...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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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한국의 명품문화
하중호 지음 / 삼양미디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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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과연 무엇을 우리문화라고 하는 것일까? 단순히 옛 것만을 우리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아닐게다. 보통은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것들이 우리문화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솔직하게 말해 나는 우리문화라고 일컬어지는 옛전통에 대해 잘 모른다. 잘 모르면서도 주변에서 마주쳐야 하는 형식들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큰 편이기도 하다. 우리문화라고 하면 왜 유교문화라는 말부터 생각이 나는지..... 우리것을 알고 싶다는 욕심을 내세워 우리문화 따라잡기에 한발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중이다. 일상적으로 그냥 유물이나 유적이라고 치부되는 것들이 안고 있는 속뜻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내가 과연 얼만큼이나 알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나 있는 것인지 그것을 배우고 싶었던 까닭이다. 그냥 무심히 스쳐지났던 하나의 석등속에서 살아숨쉬는 옛숨결을 알아챘을 때의 놀라움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했었다. 내가 몰랐던 것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너무나도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를 배워도 제대로 배웠으면 했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명품문화라는 말에 솔깃해졌던 것은..

삼양미디어의 <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시리즈를 여러편 보았지만 느낌은 괜찮았다. 가끔씩은 방대한 양을 너무 간편하게 요약하는 건 아닐까 싶어 안타까울때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한 권의 책으로 만나는 여러 분야의 이야기는 충분히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은 그다지 색다른 느낌을 전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면서 쉽게 마주치기도 했고 주변을 통해 보고 듣는 것들이 많은 까닭이다. 그렇다고해서 가볍게 넘겨버리기에는 뭔가 부족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명품문화로써의 우리것을 해석하는 저자 나름대로의 시선이 새로운 까닭이다. 예절바른 옷차림이라는 것이 우리의 한복에서 이제는 양복으로 바뀌어버린 지금에도 저자는 각기 나름대로의 문화적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남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틀렸다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 안에서 살아숨쉴 수 있는 우리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는 백프로 공감한다. 

인성을 키워주는 한국의 명품예절부터 품격을 높이는 인사라거나 이제는 많이 잊혀져가고 있는 한국의 세시풍속에 얽힌 깊은 의미들을 하나하나 짚어주고 있다. 효를 중요시했던 우리민족이었기에 감히 물리칠 수 없는 제사문화, 그리고 우리가 고쳐야 할 의식이나 문화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세세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남녀가 사랑을 해서 함께 살기 위해 하는 예식을 말할 때 결혼이 맞을까 혼인이 맞는 말일까?  결혼結婚은 맺을 결結, 장가들 혼으로 신랑이 장가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그렇다면 혼인婚姻이라는 말은 무엇일까? 장가들 혼, 시집갈 인으로 신랑신부가 장가들고 시집간다는 뜻이니 결혼이 아니라 혼인이 당연히 맞는 말일게다. 그런데 한자사전에서는 혼인할 혼이라거나 혼인 인으로 나온다. 옛 뜻의 와전일까? 아니면 현대생활에 맞게 바뀌어버린 것일까? 그것이 궁금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이어지는 혼인에 대한 설명이 재미있다. 혼인을 혼례라 하였던 뜻을 보면서 시간에 쫓기는 우리의 예식문화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다. 저녁에 장가들어 그날을 충분히 쉴 수 있게 해 주었다던 우리 선조들의 따스한 마음이 놀라울 뿐이다.

잘못된 호칭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지금 사람들은  "자기야~"라는 호칭을 많이 쓴다. 나 역시도 "ㅇㅇ아빠"라는 호칭과  "자기야~"라는 호칭을 함께 얼버무려 쓴다. 그런데 이 책속의 호칭문화를 읽다보면 한쪽 구석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보배처럼 여기고 내 몸과 같이 여긴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여보"와 "당신"이라는 호칭이 그다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 그처럼 서로가 서로를 불러주는 말 한마디에도 좋은 뜻이 담겨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우리 스스가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는건 아닌지 다시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길 때, 그리고 상대방을 소중하게 여길 때 '우리'가 소중해지지 않을까 싶어 하는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마치 <삼국유사>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의 세시풍속이나 제사문화에 얽힌 이야기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단순히 아름다운 사랑만을 생각하게 만들었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옛이야기속에서 찾아낸 효는 참으로 지극했다. 얼마전 극작가 신봉승님의 강연회에 다녀왔었다. TV로 만날 수 있었던 <조선왕조오백년>의 극작가이기도 하다. 제대로 된 글을 쓰기 위해 방대한 <조선왕조실록> 을 다 읽어보셨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다. 519년 동안의 조선사를 하나하나 기록했다던 <조선왕조실록>.. 복잡하게 얽혀드는 현대사를 풀어나가기 위한 정답이 우리의 옛것속에 들어있다는 말씀에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만 지금의 난세를 극복할 수 있는데도 우리는 역사를, 오래된 우리의 모습을 도외시하고 있다고... 이 책속의 글들처럼 아주 작은 것들부터 우리가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좀 더 나아지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저자의 말처럼 '한국분'으로 불리워질 것인지 '한국놈'으로 불리워질 것인가는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 같다. 아울러 쉽게 생각했던 우리문화에 대해 좀더 깊은 마음으로 다가서야 하리라는 다짐을 해 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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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 폰더씨 시리즈 4
앤디 앤드루스 지음, 이종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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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앤드루스라는 작가의 작품은 이 책부터 시작했어야 했을까?  작품의 성격이 '자기계발서' 인지라 어떤 것부터 읽어도 상관은 없겠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었다. <선택>이나 <오렌지 비치>와 같이 이 책 역시 작가가 무엇을 말해주고자 함인지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자기계발서... 그다지 유혹을 느끼지 못하는 부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최근에 읽었던 <오렌지 비치>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는 느낌이 남아 있다. 어린 시절부터 꼭 읽어야만 하는 것처럼 우리를 압박하는 것이 위인전이 아닐까 싶다. 그 위인전을 읽으면서 꿈을 키우고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는 성공하는 모습을 닮으라는 의미겠지만 사실 어린 시절에 읽는 위인전이 그다지 큰 감동을 전해주지 못한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뭐,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부모의 욕심이 너무 지나쳐 요즘말로 아이를 잡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힘겨운 일이 분명할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린시절에 읽었던 위인전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아무래도 문화적인 차이때문일테지만 세계의 위인들보다는 한국의 위인들이 더 깊이 각인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가장 많이 회자되어지는 위인은 누굴까? 말할 필요없이 에디슨일 것이다. 달걀을 품어 병아리를 만들어보겠다고 했다던 그 이야기를 모르는 아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엄청나게 이슈되고 있는 창의력이라는 것을 그런것에 빗대곤 하지만, 그리하여 엉뚱하고 호기심 많은 아이들을 제지하지 말라고 하지만 과연 그런 것들이 창의력일까 한번 생각해보게도 된다.  위인을 되기 위한, 혹은 성공하기 위한 일련의 법칙처럼 등장하는 자기계발서들의 목록은 거의가 비슷하다.  이 책속의 부제목에서처럼 말이다.

결단을 내려야 했던 트루먼이나 멋진 지혜를 보여주었던 솔로몬의 선택이라거나 콜럼버스나 체임벌린처럼 행동하지 않는자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없다는 법칙등 우리가 만나서 배워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사람들은 꽤나 많다. 오늘을 행복한 사람으로 살겠다고 선택했던 어린 소녀 안네 프랑크, 매일 용서하는 마음으로 살겠다던 링컨, 하지만 내게 색다른 느낌을 전해주었던 것은 가브리엘이라는 대천사였다. 사람들이 마음먹고 계획을 세웠으나 혹은 아주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갔더라면 분명히 성공했을 그런 일들을 관리하는 가브리엘... 우리가 살면서 마음 먹었던 것, 계획을 세웠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리고 시작은 했으나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지? 생각해보면 참 많다. 아쉬움일게다. 버려졌으나 차마 떠나지 못한 채 마음 한쪽 귀퉁이에 남아  웅크린 많은 꿈들을 그 대천사 가브리엘이 못내 아쉬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믿음을 가지라고..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평생직장이 될 것이라고 믿어왔던 곳에서 쫓겨나 실직이라는 고통을 안게 된 폰더씨.. 그는 절망했다. 왜 나여야 하느냐고, 하필이면 왜 내가 그래야 하는거냐고 절규했다. 하지만 이 책은 되묻고 있다. 왜 너이면 안되는거냐고.. 왜 네가 그러면 안되는거냐고.. 누구나 한번씩은 외쳐보았을 그 절규속에서 놓치고 있는 것은 자신을 향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늘 자신의 몫이었다는 걸 우리는 잊고 있는거라고.. 벌써 십년도 넘은 일이지만 바닥이라고 생각했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차고 올라가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적이 있었다. 폰더씨처럼.. 하지만 나는 지금도 물 밑 작업중인 듯 하다. 아직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이런 책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서 거부감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자기변명에 빠져서 산다.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선택의 늪에서 언제나 허우적거리고 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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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라오가 좋아
구경미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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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갈까?"
"어디든 데려다 주세요"
그렇게해서 남자와 여자는 무조건 길을 떠났다. 바다가 보고 싶다던 그녀는 바다를 보고 있으면서도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사람들은 쉽게 기억했다. 한국남자와 라오스여자... 아직은 아닐 것 같은데도 거리를 걷다보면 정말 많은 외국인들을 보게 된다. 얼마전까지만해도 그들을 신기한 동물보듯이 쳐다보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게 맞는 말일게다. 그만큼 우리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는 말도 되겠다. 그 남자는 라오스의 현장소장으로 근무했었다. 어느날 월급을 나눠주던 그 때에 강도가 들었고 그 강도의 총에 노동자 하나가 죽었다. 그 노동자의 유골함을 들고 찾아갔던 낯선 곳에 그 여자가 있었다. 스물세살의 그녀는 예뻤지만 삶의 현실은 비참했다. 그것이 그들의 어설픈 시작이었다.

그들은 변화를, 아니 변신을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여자가 되기를, 그리고 라오스남자가 되기를.  각자가 그리던 변신의 형태가 많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남자와 그 여자가 공간이동을 통해 서로의 변신체가 되어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들이 변신을 원했던 이유는 결코 다르지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 타국생활로 인하여 한국으로 돌아온 그남자는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고 그야말로 신데렐라의 꿈을 안고 한국남자와 결혼했던 그녀의 꿈은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남자는 외로웠고 여자는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다. 마음의 위안을 찾아 헤맸던 그들은 쉽게 여행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탈출을 시도했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누구나 꿈꾸는 그 유토피아... 외로움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어떤 모습일까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사람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외롭다. 어디에도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채 부유물처럼 그렇게 떠돌기만 하는 현실이라는 흐름속에서..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사람들속에 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나의 화신으로 변신했다.

얼핏보면 그녀 아메이를 통해 다문화가정이라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내게는 그것과는 무관하게 다가왔던 책이다. 사랑의 도피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는데,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함께 떠날만큼 많이 사랑했던 여자도 아니었는데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 떠났다고 생각했던 남자의 참담함.. 멋진 코트와 자동차와 집을 줄 수 없었던 남자를 버린 것은 여자에게는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이었을 게다. 오로지 네가 원하는대로 다 해주었다던 그 남자의 말이 가슴속까지 파고 들지 못했던 것은 그여자의 말처럼 "내 마음을 당신 종은대로만" 해석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했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모든것이 제 잣대로 재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아주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싶어지니까.

그렇게 좋다던 라오라오가 뭘까? 거두절미하고 술이다. 독한 술.. 마시면 강해지는 술.. 한마디로 화끈한 술.. 온 몸에 활기를 주고 뱃속에 용기를 주는 술.. 어쩌면 그 남자가 필요로 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독함, 강함, 화끈함, 활기, 용기... 미적지근하게 살아지는 일상속에서 자신을 확 끌어당길 수 있는 그 무언가를 꿈꾸면서도 그 남자는 쉬고 싶었다. 온전히 쉬고 싶었다. 자신을 이방인처럼 대하는 가족들이 두려웠고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직장에서의 시간들이 두려웠다는 말이다. 여기서 문득 기러기아빠를 생각하게 된다. 오랜 시간을 타국에서 고생하는거나 아내와 자식을 타국으로 보내놓고 혼자서 생활하는거나 별다른게 없을테니.. 단절을 보게 된다. 가족이라는 테두리안에서조차 부유물처럼 서로가 겉돌기만 하는 우리의 시대를 누가 만들었는가! 모든 것이 엉킨 실타래같다. 

상실감이었을 것이다. 무언가를 잃은듯한.. 그리하여 마음속에 텅 빈 풍선하나를 품고 살아가는 것같은.. 그 남자와 그 여자에게서 나는 상실감을 보았다. 그나마 있었던 것들도 하나씩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던 남자의 여정이 처절한 서글픔을 자아냈다. 위안이 되어줄 수 있을거라 생각했었던 여자는 버렸던 제둥지로 다시 돌아가 버티고 있는데 자신만 모든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내가 가야 다들 맘 편히 살 것 같아서" 라는 말이 서럽게 들려왔다. 그나마도 자신을 받아주고 안아주었다고 생각되는 라오스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정했으면서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보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선택했던 충동적 도피.. 그 도피는 우리의 마음속에 내재되어진 그 어떤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혼자 갈거야"
"그나마 라오스에 있을 때가 행복했던 것 같아" 
그 남자의 슬픈 목소리가 슬프다. 바다를 보고 있으면서도 바다가 보고 싶다고 말하던 그녀는 끝내 동행하지 않았다. 삶의 길이란 것이 혼자가야하는 것이 맞는데도 지독한 서글픔이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예전의 가을은 가을다웠는데 올해 가을은 겨울을 닮았다던 그 남자의 말이 가슴 어딘가를 콕 찌르며 지나간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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