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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와 침묵의 제국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윤휴, 그는 누구일까? 광해군대부터 숙종대까지 조선중기를 살아냈던 사람.. 이괄의 난과 정묘, 병자호란을 피해 어머니와 함께 피난을 다녔다. 주로 젊은 시절을 여주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에 외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기는 했으나 거의 독학하다시피 자신의 학문을 정진했다. 열아홉살때 십년이나 연장자였던 당대의 석학 송시열로부터 자신의 독서가 부끄럽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보고 그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가 오기 전에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던 그가 중국에서 오삼계의 반청(反淸)반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 전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라 여겨 숙종대에 관직에 오른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를 불러들였던 숙종의 속마음을.. 숙종에게는 송시열을 견제하기 위한 인물이 바로 윤휴였음을.. 숙종이 누구인가? 교묘하게 당쟁의 힘을 이용하며 왕권을 다졌던 인물이 아닌가 말이다.
대부분의 일생을 포의(布衣-여기서 포의는 베옷이다.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 입는 옷이기도 하고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로서 보내어 정치적인 면보다도 학문적인 업적이 더 많다는 사람이 윤휴다. 원래 당색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지만 예송논쟁으로 서인측과 틈이 벌어지자 남인으로 활약했다. 기해예송때는 벼슬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를 내세워 송시열의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빗대어 지적하였고, 갑인예송때도 같은 기준으로 서인측의 견해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였던 까닭이다. 예송논쟁... 정말 하릴없이 무의미하게 보내야 했던 시절을 대표적으로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송시열이라는 이름 석자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이긴자가 쓴다 했고,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는 말이 있다. 예송논쟁이라는 말이 나오면 당연하게 뒤따라 나오는 이름이 바로 송시열이다. 우리의 역사속에서 그다지 의롭지 않은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동안 그사람에 대한 평을 어떻게 들어야 했는가를 곰곰히 따져볼 일이다. 북벌론조차도 그의 의견이 아니었음을 이제 알만 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가는 바뀌지 않는 것 같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시의 정치현황과 지금의 정치현황은 판박이다. 그러니 당연하다.
예송논쟁이라는 것이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다. 어째서 그 따위 논쟁에 허송세월을 해야만 했는지...모두가 제 잇속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효종의 절대적인 신임속에 자신의 입지를 굳힌 송시열이었지만 효종이 급서한 뒤 장례절차를 시시콜콜 따졌던 것이 바로 예송논쟁이었다. 계모인 자의대비의 상복을 참최복(3년)으로 할 것이냐, 기년복(1년)으로 할 것이냐가 문제의 시초였다. 효종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소현세자의 아우다. 그러므로 그 문제는 효종이 적장자냐 아니냐와 결부되어 있었기에 중요한 문제였다. 이를 두고 윤휴는<의례>에 근거하여“제일자(第一子)가 죽으면 적처소생의 차장자를 세워 장자로 삼는다.”고 말하며 대비가 3년복을 입어야 할 뿐 아니라, 국왕의 상에는 모든 친속이 참최를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송시열은 <의례> 의 소설에 “서자(庶子)가 대통을 계승하면 3년복을 입지 않는다.”는 예외규정을 들어 이에 반대하였다. 서자는 첩의 자식을 이르는 칭호이기는 하지만, 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두 사람의 주장을 듣고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대신들이 <의례>에 근거한 두 설을 다 취하지 않고,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장자·차자 구분없이 기년을 입게 한 규정, 즉 국제기년설에 따라 1년복으로 결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목이 또다시 차장자설을 주장하여 3년복으로 할 것을 상소하고, 윤선도가 기년설이 효종의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고 적통과 종통을 두 갈래로 만들 수 있다고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송시열과 송준길의 뜻을 꺽지는 못했다. 그 문제로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지만 기년설은 번복되지 않았다. 윤선도를 포함한 남인들이 유배되거나 축출된 것을 보면.. 그러다가 효종비의 상으로 자의대비의 복제문제가 또다시 불거진다. 서인들은 송시열의 주장대로 대공복(9개월복)을 주장하여 시행되었으나 영남유생 도신징의 상소로 인하여 기년복으로 번복되고 말았다. 그 일로 인하여 송시열은 '예를 그르친 죄'를 입고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사실 송시열의 예론은 <의례>에 근거를 두기는 하였지만 대체적으로 왕가의 예나 당시 양반계급의 예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컸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말해 둘째아들이라는 효종의 출생순서만을 중히 여겼다는 말이된다. 이 책속에서도 그런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글쓴이의 분석이 옳다 그르다를 논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왕실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두 갈래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아 결국 파직되는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윤휴와 송시열에 대해 다시한번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다. 내가 배웠던 바로는 효종의 북벌론을 도왔던 사람이 송시열이었다. (검색해보면 지금도 그렇게 나온다) 그런데 효종과 송시열의 북벌론은 동상이몽이었다는 사실이다. 실제적인 북벌보다는 이념적인 북벌만을 강조했던 게 송시열이었다. 송시열에게는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한 대의명분이었다는 말이다. 말로는 백성을 위한다고 하였지만 유교적 명분을 내세워 신분차별에 더욱더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있었던 것도 송시열이었다. 책에 따르면 그가 주장했던 성리학 역시 살짝 변형되어져 원래의 주자학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연구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올 수도 있는 일이지만 당시 송시열의 오만함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효종이 죽음으로써 잠잠했던 북벌론이 윤휴의 등장으로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고, 윤휴가 내세우는 북벌론이 실제적인 북벌론이다보니 당시의 서인에게는 발등의 불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 된다. 실제적인 북벌론을 외쳤던 윤휴의 업적을 따져보자면 이렇다. 도체찰사부를 설치하고 무관인 만과를 실행하여 다양한 인재를 등용하려 하였다. 또한 전차나 화차를 개발, 보급하고자 했던 것도 윤휴였다. 군권통합을 요구했던 도체찰사부의 설치가 끝내 그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원인이 되기는 했지만 책을 통해 보여지는 윤휴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보게 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호패법을 지패법으로 바꾸어 신분차별을 약화시키려 노력했다. 끝내 실행되지 못했던 것은 백성을 부리고 싶어했던 양반계급의 반대때문이었다. 윤휴는 숙종에게 오가작통을 주장, 실행하기도 했다. 농경을 서로 돕고, 어려움을 서로 이겨낼 수 있다는 이유이기도 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각종 조세의 납부를 독려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던 게 오가작통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윤휴는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던 사람인 듯 하다. 오직 북벌만을 생각하며 관직에 올랐던 그였기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고문을 당하고 유배길에 오른 그에게 피맺힌 버선을 갈아신으라고 권유하던 자식에게 돌아가는 형국을 제대로 읽지 못한 자신이 반면교사가 되기를 원한다며 갈아신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교사라는 의미가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이라는 걸 생각해본다. 어쩔 수 없이 그가 느꼈을 후회가 내게도 전해져오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사문난적(斯文亂賊).. 그가 죽어야 했던 이유다. 유교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을 사문난적이라고 말한다. 유교를 반대하는 사람.. 다시말해 송시열에게 반기를 든 사람이라는 말도 될 것이다. 성리학, 즉 우리나라만의 유교학을 정립시킨 것이 바로 송시열이라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을테니까.. 유교의 교리자체를 반대했던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어야 했던 이유는 끝없는 당쟁의 결과이기도 했다. 숙종이 그를 버리기로 작정했던 이유가 바로 당쟁으로 인한 왕권의 흔들림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윤휴의 죽음은 반란의 중심에 있었다거나 역모를 꾀했다는 이유가 아니었다.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 죽일것까지는 없었다'는 그의 마지막 말은 울림이 크다. 책을 덮으며 이덕일이라는 글쓴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의 소개글을 찾아 읽어본다. 색다른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 싶다. 그의 작품을 몇 번 읽어보았는데 그 때마다 이채롭다는 생각에 흥미로웠던 것도 사실이고, 큰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는 것도 솔직한 말일게다. 판에 박힌 역사관은 아닌 듯 싶어 그의 이름이 보이면 다시한번 시선을 두게 된다. 그의 역사관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사람이 있어 고마움을 느끼게도 된다. 그가 보여준 이 작품속에서 당시의 상황과 결부되었던 많은 사건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다. 일전에 논산여행길에 둘러보았던 돈암서원과 윤증고택이 떠오른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진리를 다시한번 되새긴다. /아이비생각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