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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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런 노래가 있었다.
모모는 철부지 모모는 무지개 모모는 생을 쫓아가는 시계바늘이다
모모는 방랑자 모모는 외로운 그림자
너무 기뻐서 박수를 치듯이 날개 짓하며 날아가는 니스의 새들을 꿈꾸는
모모는 환상가 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
정확하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 책속 모모의 모습이다.
어릴적 이 노래를 들을 때 나는 미하엘 엔데가 말하던 시간의 소녀 모모인줄 알았었다.
그리고는 뜻도 모른채  따라부르곤 했었다.

참 애절하다.
너무도 슬픈 이야기다.
모모는 외롭다. 하지만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다.
사람은 사랑없이는 살 수 없다던 하밀 할아버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되자
모모의 사랑이었던 로자아줌마는 떠나갔지만 그래도 우리는 서로가
사랑해야만 한다고 결론을 내려주는 모모의 이야기는 슬프지만 또한 슬프지 않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 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거지."<93쪽>
우리앞의 생은 모두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게다.
완전히 희거나 검지 않은 모습으로 .
잿빛모습을 한채 우리곁을 서성일게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아프고,늘 서럽고,늘 슬픈 것일게다.
너무나 일상적인, 너무나 평범하기만 한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평범하지 않은 소년의 눈을 빌려 너무나 많은 것들을 말하고 있음이다.
이 책속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지 않는다.
가진 것 없고 힘도 없고 그야말로 든든한 빽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을 안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아름답도록 처절하다.

자신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모모가 했던 말은 정말 서글펐다.
"어제든 오늘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할아버지.
 그저 흐르는 시간일 뿐이니까요."<171쪽>
진즉부터 <자기앞의 生>이란 책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읽지 못했다.
어쩌면 내 앞에 펼쳐져 있는 生이란 시간들이 너무 아플것 같아서였다.
모모처럼 시간을 거꾸로 돌려가며 환상을 쫓을 줄 아는 능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다면
모모처럼 나쁜 일도 좋은 일처럼 바꿔 느낄 수 있는 마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다면
아마도 이 세상은 간을 맞추지 않은 찌게같은 맛이 아닐까?
로자아줌마를 떠나보낼 준비를 하면서 하밀 할아버지에게 니스이야기를 해달라고 말하던
모모의 가슴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아주 오래된 시 한구절이 입속에서 맴돌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김춘수님의 시 -꽃-의 일부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의 곁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일게다.
이미 죽음을 맞이한 로자 아줌마곁에서 몇날을 머물렀던 모모의 마음처럼
그렇게 곁에 있어주는 느낌이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마지막 장을 읽고나서도 나는 한참동안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우연하게 다시 찾게 된 모모의 새 사랑의 둥지를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도 모르게 모모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 거다.
모모의 개였던 푸들 '쉬페르'와,  초록색 얼굴을 한 모모의 우산 "아르튀르'는
아마도 사랑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사랑해야 한다.
사랑해야만 한다, 우리는.
자기앞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래서 뒤돌아보아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도록...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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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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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글이 만들어지면 10년 안에 세상이 바뀔 것이다"
"이제 글은 사대부의 것이 아니다. 학문 또한 사대부의 전유물이 아니다"
"글만 익히면 세상천지가 학문하는 자들로 넘쳐날 것이다.
 종놈들은 시종학을 한다고 나설 것이고
 장사치들은 상학을 한다고 할 것이며 갖바치들은 피혁학을 한다고 나설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무지렁이 농군이 송사에서 이치를 따질 것이고 세상의 모든 자들이
 자기 이익을 주장하고 나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학문하는 사대부가 갈 곳이 어디겠느냐"

153쪽에 나와 있는 글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속에서 치고 올라오는 그 무엇을 느껴야 했다.
지금까지도 저놈의 유교적인 사상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는 모습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학문이, 깨우침이 어째서 몇 %의 인간들만을 위해서 생겨난 말이라더냐?
억지스러운 비교같지만 나는 가끔 생각한다.
진즉에 대원군이 이 나라의 문을 열었더라면 지금과 같이 우매한 세상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금보다는 훨씬 앞으로 나아가 어쩌면 이 세상을 호령하는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경학과 사장의 이치가 만백성에게 고유되는 새로운 세상,
모든 백성이 현학이 되고 원하는 자는 누구나 학문할 수 있는 꿈의 나라.
그 나라에서는 관념보다는 실용이, 이론보다는 실제가,권위보다는 실력이,
신분보다는 능력이 우러름을 받을 것이었다. <197쪽>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형식에 치우쳐 겉치레에만 매달리기 보다 먼저 실용을 따지고,
말만 앞세우며 탁상공론에 치우쳐 살기 보다는 실제의 상황을 먼저 직시하고,
내노라하는 이름과 명패보다는 실력이 우선이 되며,
신분보다는 각자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진즉부터 꿈꾸어 오신 분.
한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고통을 견뎌내면서 오로지 백성만을 위해 존재하셨던 분.
그 분이 우리의 세종대왕이셨다는 사실에 나는 이 책을 통해 다시한번 경의을 표한다.

백성은 무지할수록 다루기 쉽다고 했는가?
이 책의 밑바닥을 곰곰히 살펴보면 작금의 정치상황과 다를 게 하나도 없음이다.
백성은 깨어 있으나 아직 겨울이라고 우기며 잠에서 깨어나기를 거부하는 군상들의 모습.
단지 소설에 불과한 이야기일뿐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도 와닿는 느낌들이 많았다.
자신만의 우월성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최만리라는 인물의 생각이 너무 안스러웠다.
끝까지 한글창제에 대한 반대 상소를 준비하던 최만리의 끝없는 아집을 보면서
대종손이었으며 또한 대종가집의 맏며느리로 평생을 살아오신 내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 수많은 형식과 겉치레에 눌려 숨한번 제대로 쉬어보지 못하신 내 어머니의 삶을 생각했다.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나도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우겨봤지만
지금은 나도 맏며느리로 살아가고 있음을 어쩌랴.
유교적인 것들에 대한 나의 반감은 사실 엄청나게 크다.
하지만 유교적인 것들을 다 반대만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옛것이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좋은 것은 유지하되 시대에 맞지 않은 부분들을
현실에 맞게 고치지 못하고 목소리만 높이는 융통성의 부재가 화가 날 뿐.

<뿌리깊은 나무>라는 책을 처음 보았을 때,
그리고 한국형 팩션이라는 소개글을 보았을 때
나는 정말이지 읽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어쩌지 못했다.
기대가 너무 컷던 탓일까?
초반부에서 느껴졌던 밋밋함을 중반부까지 고스란히 안고 가야했지만
서서히 밝혀지는 세종대왕의 그 넗으신 뜻을 펼쳐나가는 부분에서는 가슴이 뭉클해져 왔다.
글의 짜임새를 논하기에 앞서 다루어진 소재가 너무도 이채로웠던 까닭이다.
매년 10월이 오면 공휴일로 책정되지 못한 9일 한글날을 보면서 못내 아쉬움을 숨긴다.
세계적으로도 우수성이 공인된 한글을 정작 쓰고 있는 우리는 중요성을 모르고 있는가 보다.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더불어 인터넷 세대들이 이런류의 책을 더 많이 읽어보았으면 하는 혼자만의 욕심을 가져본다.

강추!!!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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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연애편지
김다은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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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쯤에 허름한 건물이 하나 있다고 치자.
그래서 나는 그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건물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굳게 닫혀 있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열어보기로 한다.
빼꼼이 열린 문틈으로 바라본 건물안은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기왕 문을 열었으니 안으로 들어가보기로 작정을 한다.
안으로 들어가자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내려갈까 말까를 망설이다가 한발짝 내디뎌 본다.
그 순간 저 아래쯤에서 살풋 일렁이는 빛이 보인 것 같다.
그래서일까? 하나씩 계단을 밟고 내려갈때마다 긴장감이 인다.
촛불을 켜놓은 것처럼 나의 움직임에도 미세하게 일렁이는 빛의 환영을 느낀다.
뭐지? 내 몸을 조여드는 이 느낌은?
긴장감에서 풀려나지 못한채 나는 계단을 하나씩 내려가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이다.
정말이지 책장을 한장씩 넘길때마다 나는 속으로 긴장감을 늦추지 못했다.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은 없었다고 봐야한다.
하지만 서간체의 소설이란 말에 은근한 유혹을 느끼게 된 것은 사실이다.
어린시절부터 편지쓰기를 좋아하던 내게 손짓을 했던 것은 서간체라는 말이었다.
이름도 몰랐던 작가나 책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고나서도 이 책을 선뜻 선택하지 못했다.
단순히 이 책을 선택해야만 했던 어떤 동기가 나에게 있었던 것 뿐이라고...
하지만 이 책은 나를 놀라게 했다.
짜여진 구성과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흐름이 나의 감정세계를 파고 들었다.
편지글로도 이런 글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나도 신기하게 보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화가 났다.
우리의 문학계에서도 이렇게 멋진 글을 만날 수 있었건만
편식을 하던 나의 책읽기 습관에 화가 나기 시작했던 거다.
프리랜서 기자가 떠나는 그 미지의 여행길에 동행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 심장은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내 내밀한 사람에게-를 읽어내려가던 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단순한 편지 한통으로 얽혀지는 인연의 고리들.
그리고 그 편지 한통으로 생겨나던 수많은 설레임의 순간들.
죽음으로 끝을 맺어야만 한다는 모티브가 단 한통의 편지였다는 것.
하지만 얽혀진 그 인연의 고리들속에서 느껴지던 사람들의 욕망이 품어대던 냄새.
그 악취로 인해 편지가 안고 있었을 향기로운 것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국민학교라고 불렀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초등학교라는 말보다 국민학교라는 말이 더 정겹다.
교사를 하는 오빠를 따라 전학을 왔던 친구와 편지를 주고 받았던 생각이 난다.
그 친구의 집은 평택이었고 우리집의 바로 맞은편에 살고 있었다.
친구는 방학이 되면 평택집으로 내려갔고 방학내내 우리는 편지를 주고 받았었다.
그 시절의 힘겨움과 아련한 그리움들을 그 친구와 편지로 이야기 나누었던 것 같다.
참으로 무던한 친구였다는 생각이 든다.
30년을 훌쩍 넘긴 세월을 떠나보냈는데도 내 기억속에 뚜렷하게 남겨진 친구의 이름.
아마도 마음을 주고 받았었기에, 혹은 내 아픔을 말없이 안아주었던 친구였기에
그토록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내 가슴을 아련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 친구와 단순히 대화로써 아픔을 나누었다면 이렇게까지 오랜시간을
내 기억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편지의 힘, 말의 힘이 아닌 글의 힘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이후로 나는 그토록 절절한 편지를 써본 기억이 없다.

말그대로 이상한 연애편지 한통으로 시작되어진 이 책속에서 많은 것들을 만난다.
평소 책속에서 간접적으로 거닐어 보았던 프랑스의 풍경들조차도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종교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들이 어울어진 마당도 펼쳐져 있는 듯 보인다.
작가의 후기글에서 만나지는 편지글의 형태들은 나에게 새로운 눈뜸으로 다가왔다.
작가는 왜 서간체 형식의 글을,
그것도 추리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소설을 쓰고 싶었을까?
어쩌면 인터넷속에서 흉물스럽게 떠다니는 부유물같은 우리의 존재의식을
깨워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그 무엇을 하나씩 잃어버리면서도
그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 채
아니 어쩌면 그 사실을 부정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아주 따끔하게 충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단 한통의 편지, 아니 단  몇줄의 글귀속에 담겨진 진심어린 마음 한조각으로 인해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설레임을 되찾아 주고 싶었는지도 모를일이다.
덕분에 나는 이미 오래전에 떠나왔던 내 기억의 모퉁이를 다녀왔다.
그리고 다시 보고픈 얼굴과 이름하나를 가슴속에 되새김질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정말 멋진 책이 아니었나 싶다.
단 한순간도 책에서 손을 떼고 싶지 않았을만큼.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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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래 - 앨빈 토플러 (양장)
앨빈 토플러 지음, 김중웅 옮김 / 청림출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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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9대의 차가 달리고 있다.

시속 100마일로 달리는 차..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기관(기업이나 사업체)들이 타고 있다.
시속 90마일로 달리는 차..
    2등 조직은 마치 서커스 광대들처럼 여럿이 한차에 올라탄다.
    그들은 바로 집단적으로 견해를 형성하는 시민단체들이다.
시속 60마일로 달리는 차..
    급속도로 달라지고 있는 가족이 타고 있다.
시속 30마일로 달리는 차..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는 노동조합이 타고 있다.
시속 25마일로 달리는 차에는
    소리만 요란한 정부 관료조직과 규제 기관들이 타고 있다.
시속 10마일로 달리는 차는
    타이어는 펑크가 나서 흔들거리고, 라디에이터에선느 연기가 뿜어져나온다.
    이 차량은 뒤따라오는 차까지 속도를 낼 수 없게 만든다. 학교가 타고 있다.
시속 5마일로 달리는 차..
    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역기능적인 조직들 즉 세계적인 관리기구들이 타고 있다.
시속 3마일로 달리는 차에는 누가 타고 있을까? 바로 정치조직이다.
시속 1마일로 달리는 차에는 가장 느리게 변화하는 법이 타고 있다.
<69-70쪽 참조>

위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많은 혼돈을 느껴야 했다.
어째서 가장 빠르게 변화를 요하는 것들이 가장 늦은 순위로 변화를 해야 하는 것인지..
어째서 앞서가야 할 사람들의 변화가 가장 나중으로 미뤄져야 했는지..
이 책에서는 시간과 공간에 따르는 미래의 모습을 여러형태로 예시해주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지, 또한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깊은 눈길로 짚어내려 간다.
제 6부의 프로슈밍을 읽으면서 나는 참으로 놀라웠다.
제3의 직업과 자가 서비스 활동을 통해 무보수로 일을 수행한다는
프로슈머에 대한 이야기<295-297쪽 참조>는 읽을수록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들었다.
모든 일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질 수 있다는 것은
나 자신의 변화에 커다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메세지로 들렸다.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의 변화에 얼마나 관대한가?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 안달하는 나를 바라보면서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작자는 제 7부의 데카당스를 통해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
폭발하기 직전의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처해있는 위기를 속속들이 들춰내며 그 위기를 헤쳐나갈 길을 빨리 찾아야한다는 듯이.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상스런 행위의 대부분은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쇠퇴와 혁명적인 부활간의 투쟁을 반영한다고.

부의 혁명은 컴퓨터와 하드웨어 이상의 것이며 단순한 경제적 문제 이상의 것이다.
부의 혁명은 사회적,제도적,교육적, 문화적,정치적 혁명이다.<430쪽>

어느책에선가 읽었던 기억이 난다.
세계의 눈길이 아시아로 몰려들고 있다던 말을.
이 책에서도 중국,일본,한국을 아시아의 대표주자로 설명하고 있다.
중국으로 중국으로 몰려들고 있는 세계경제의 흐름을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아주 가까운 우리의 모든 생활속에서 maid in china를 만나고 있다.
아직까지도 일제라면 괜찮은 인상을 갖고 있는 것또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글속에서조차 한국이 가장 위태로운듯이 보여진다.
그 위태로움속에서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우리의 직업과 주식 투자,제품,권리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아이들이 입게 될 옷이나
그들이 사용할 컴퓨터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제 우리 모두의 일부분이 되었다.
때때로 일본은 대나무와 같은 말을 많이 한다.대나무는 녹색줄기의 수직으로 뻗은 부분에
회갈색의 반지처럼 생긴 좁은 마디가 있다.높이 성장하는 대나무의 수직으로 뻗은 줄기는
변화에 대한 일본의 끈질긴 저항을 상징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반지 모양의 굵은 마디는
급격하고 혁명적인 변화를 나타낸다. 일본이 한 단계 위의 대나무 마디에 도달하느냐에 따라
세계 모든 지역의 부의 미래가 상당 부분 결정될 것이다.
한국이 속도 지상주의의 문화와 경제 그리고 신중하고 더딘 외교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따라 한국은 물론 북한의 미래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471,489,499쪽 참조>

현존하는 체제에서는 기계적이고, 교과서 중심인 수업과 표준화된 평가로 인해
교사와 학생 모두가 최후의 창조성까지 말살당한다.<523쪽>

그러나 우리에게는 도착지가 중요하고,또 그래야만 한다.
미래는 도착지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552쪽>

이 책에서 작자가 다루는 분야는 너무나도 광범위하다.
의학이나 과학,경제학,사회학등 박학다식한 저자의 식견에 존경을 표하게 된다.
솔직히 어떤 커다란 존재의 흐름을 읽어낸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것이다.
하물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복잡한 세상의 흐름을 읽는다는 건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이 책을 읽는 며칠동안 나는 놀라움과 답답함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현재 펼쳐지고 있고
또 그에 따르는 작용들이 앞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하는 작자의 말들이
느껴지는 것과 느낄 수 없는 것들로 양분화되어 나를 짓눌렀다.
너무나도 짧고 모자라는 나의 식견으로는 받아들이기 힘겨운 이야기들도 참 많았다.
그래도 이런 것들은....하고 와닿는 느낌들이 있었던 부분부분들을 발췌해 보았다.
나중에 다시 이 책을 한부씩 잘라내가면서 다시 접해볼 요량이지만
<부의 미래>을 읽기 위한 나의 대장정은 일단 여기서 1막을 내리기로 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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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
윌리엄 케네디 지음, 장영희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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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장 발장은 한 조각의 빵을 훔친 죄로 19년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한다.
자신을 재워주었던 신부의 집에서 은촛대를 훔쳤다가 다시 체포되어 끌려가게 되었을 때,
신부는 말했었다. 그 은촛대는 자기가 장에게 준 것이라고 .
그래서 장 발장은 비로소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다던 이야기가 있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생활속에도 장발장은 만나진다.
바로 얼마전에 아이들에게 찌게를 먹이고 싶어서 자전거를 훔쳤다던 또하나의 장발장.
그는 폐휴지를 모아 하루벌이가  3천원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자전거들이 거의 못쓰게 된 것들이었다고 한다.
배고픔을 이겨내지 못해 빵한조각을 훔친 소설속의 장발장과
아이들에게 찌게를 끓여주고 싶어 자전거를 훔쳤다던 장발장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소설은 소설일뿐이다.
소설이기에 가혹한 것도, 처참한 것도,냉정한 것도 모두가 예외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작은 것들도 용서되지 못한다.
우선은 나에게 다가오는 피해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도 주지 말며, 나한테 다가오는 피해도 싫은 마음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속성이 아닐까 싶다.
사지 멀쩡한 사람이 왜?
그것도 자식이 딸린 사람이 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는데?
찾아보지도 않고 고작 폐휴지줍는 일을?
어찌되었든 남의 물건에 손을 댔다는 건 좋지 않아...
매정한 표현들이, 혹은 정말 가혹한 처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현실 그 자체인 까닭이다.

ironweed....식물, 국화과의 식물, 혹은 엉겅퀴꽃이라고 검색되어진다.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라는 제목보다는 원제가 가슴에 와닿는 것은
아마도 잡초같이 살고 싶었던 주인공 프랜시스 팰런이란  남자의  생이
그 원제와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까닭인듯 싶기도 한데..
알 수 없다.
누가 그들을 거리의 부랑자로 살아가게 했는가를.
이겨낼 수 없는 건 자기자신일뿐.
아무도 그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의 주인공 프랜시스 아저씨는 그야말로 양다리 걸치기 식의 삶을 산다.
자기 마음 하나만 바꾸면 이쪽이든 저쪽이든 결정을 내릴 수도 있는 처지다.
한편으로는 따뜻한 잠자리와 사랑을 제공해 주는 가족이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차마 버릴 수 없는 마음속의 허무감이 있다.
은하수가 어딘지 아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보여주고 싶다는 말은 억지다.
마음속에 담고 있는 정,혹은 따스함만으로 살아지는 세상이 아닌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꿈꾼다.
정이 필요하다고, 이 각박한 세상속에서 느껴질 따스함을 만나고 싶다고.
그들의 춥고 서러운 하루를 녹여줄 작은 방한칸.
하지만 그 방한칸은 저절로 그들에게 굴러들어오지 않는다.
재개발 구역이 있었다.
언덕진 길에 이어져 산등성이까지 야금야금 생겨나던 천막촌의 모습.
하나둘씩 허물어져 가던 그들의 무너진 희망사이에 뚫려 있었던 길 하나로
출퇴근을 해야  했던 나의 지나간 시간들이 있었다.
하나둘씩 부서지던 담벼락을 보면서 나는 되묻곤 했다. 이제 저들이 갈곳은 어디인가?
그나마 삶의 터전이라고 일구어놓았던 산동네를 떠나서 그들이 갈 곳은 또 어디인가?
지금은 천막촌이었다는 흔적조차도 찾아볼 길 없이 높은 아파트촌이 버티고 있는 그곳.
그곳을 일구어냈던 사람들의 마음과 허접한 꿈을 토대로 세워진 건물들.
그들은 쫓겨나고 떠나갔지만 차마 데려갈 수 없었던 그 마음과 꿈은
아직 거기에, 밑바닥같은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것만 같았다.

거리의 부랑자들을 그리고 있는 책속의 세상은 너무 을씨년스럽다.
그리고 그 부랑자들을 다시 쫓아내기 위해 애를 쓰는 세상 또한 을씨년스럽다.
날마다 자살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습.
하지만 날마다 희망과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이 그려내고 있는 모순된 삶의 여정이 서럽다.
누구나에게 자기만의 세상은 있다.
그리고 그 세상은 오직 자기자신만이 만들어가며 꾸밀수 있다.
어느 한쪽으로 연결되어져 있던 끈이 끊어진 프랜시스 아저씨가 돌아와 멈춘 곳.
그 방은 아주 아늑하고 작은 방이었다.
아늑하고 작은 그 방에서 프랜시스 아저씨의 마음은 따스했을까?
뭐 필요한 것 없느냐고 묻던 아내에게 프랜시스 아저씨가 말했었다.
구두끈 하나가 필요하다고. 이틀동안 노끈으로 매고 돌아다녔다고.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었다.
살다 보면 절대로 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일들이 있다고.
손을 잡아 이끌어주지 않으면 길이나 제대로 건널 수 있을지 모를 여자,
내가 형편 무인지경이고 몸이 아파 죽는 줄 알았을 때 간호해 주었던 여자,
그 여자 헬렌에게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헬렌에게로 돌아가야 할 끈이 끊어지자 아내인 애니에게 돌아온 프랜시스 아저씨.
나는 왠지 프랜시스 아저씨의 마음과 꿈이 아직도 헬렌의 그림자를 쫓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부호를 찍어본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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