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울리는 곳간, 서울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동서남북 우리 땅 4
황선미 지음, 이준선 그림 / 조선북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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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황선미라는 작가의 이름이었다. 저작권 문제로 한동안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작가이기도 했지만 <마당을 나온 암탉>이라는 동화가 남긴 여운이 상당히 강했던 까닭이기도 했다. 그사람은 서울이란 곳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우리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곳이기에 서울쯤이야, 하는 착각에 빠져 지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의 삶과는 밀접한 관계를 지닌 도시가 서울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서울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닌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곳에서 뜻밖의 이야기와 마주치기도 한다. 서울의 역사는 깊다. 그리고 넓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너무 쉽게 피상적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기원이 이런 책을 세상에 나오게 했을까? 아니면 그냥 서울에는 이런 곳도 있어요, 라고 안내를 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어찌되었든 이 책은 단편적이나마 서울이란 도시에 대해 다시한번 짚어주고 있다. 만약 서울을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친절한 안내서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골목마다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는 말이 보인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골목이 하나둘씩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 서울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얼마전 젠트리피케이션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의 도시 서울은 어째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할 수 없는 것인지 무척이나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순간이기도 했는데 이 책을 보면서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것만이라도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앞선다. 좀 더 다양한 곳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어린이들을 위한 책인 듯 싶어 욕심을 버린다.

 

새롭게 알게 된 서울의 역사가 흥미를 끈다. 서울 최초의 상설시장이라는 남대문시장은 사실 조선시대의 칠패시장이 대한제국이 도로를 정비하면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상인들이 남대문시장의 상권을 휘어잡자 한국인들이 자본을 모아서 역시 조선시대의 배오개시장이 있던 자리에 동대문시장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동대문시장은 그렇게 일제의 힘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으로 세워진 것이라는 말이다. 알고자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진즉에 알았을 것을 이제사 알게 된다. 그건 그렇다해도 우리가 흔히 쓰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란 말은 일제강점기의 잔재인 까닭에 이제부터라도 숭례문이나 흥인지문으로 올바르게 불러주어야 한다. 서울성곽을 한양도성으로 바꿔 부르는 것처럼. 시장이름까지야 어쩔 수 없다해도 중요한 문화재의 이름만큼은 제대로 불러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오래전부터 서울말이 있었다는 말은 자주 들었었다. 서울사투리... 얼핏 생각하기에 서울말이 표준어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의외로 서울사투리는 내 주변에서 흔하게 들려왔던 말이었음을 알게 되고 웃음이 났다. 계란을 겨란, ~같이를 ~겉이, ~하고를 ~허구, 네가를 니가, 만들다를 맨들다, ~부터를 ~부텀, 얼마나를 을매나, 가위를 가우로... 이런 말들이 서울사투리였다는 건 처음 알았다. 그런데 계단을 가우당이라고 하는 것은 사투리가 아니라 일제의 잔재로 보여진다. 가만히 읉조려보니 서울사투리라는 게 왠지 귀여운 느낌을 준다. 그러나저러나 작금의 서울에는 서울토박이가 그다지 많지않을터이니 아마도 머지않은 시간에 서울사투리 역시 사라지는 문화의 대열에 서게 될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각설하고, 서울은 넓다. 갈 곳도 많은데 몰라서 못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책은 친절한 안내서다. 서울의 숨은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물론 이런 책을 벗삼아 알고 가는 발걸음이라면 더욱 더 재미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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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어파슬리, 모어일러스트 - 일상이 예술이 되는 시간, 감성 손그림 수업
김혜빈 지음 / 청림Life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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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 유화, 연필화, 색연필화, 담채화, 민화, 판화, 보테니컬화, 카툰, 일러스트.... 찾아보면 그림의 종류도 엄청 다양하다. 그런데 그 많은 그림이 어떤 것이라 할 것도 없이 나처럼 그림과는 너무 먼 사람에게는 부러움을 느끼게 한다. 특히나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일상적인 그림이라면 더욱 더 그렇지 않은가 싶다. 그런 그림을 보면서 와, 어떻게 그린거지? 나도 한번 그려보고 싶다... 이런 생각하지 않는 사람 몇이나 될까?  그래서 나도 시작했다. 일단 가장 기본이 될 것 같아 시작한 연필화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래도 소싯적에는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학교복도에 내 그림이 걸리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마음은 벌써 저만치로 앞서가 있는데 배워야 할 건 너무 많았다. 그렇게 한창 헤매고 있는데 눈에 띈 책이다. 그렇다고 내가 이 책속에 등장하는 소소한 것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식빵, 케이크, 커피를 시작으로 프라이팬, 주전자, 컵과 같은 주방도구를 보여주더니 전화기, 시계, 선풍기, 여행가방, 카메라, 상자, 식물 등등등... 내 눈에 쏙쏙 들어오는 것들을 그리고 있다.

 

책을 펼치지 않아도 이미 책표지에 나와 있는 앙증맞은 그림들을 보게 된다. 달걀후라이나 도시락을 보면서 이야, 정말 그럴 듯 하군! 도대체 어떻게 그린거야? 하다가 나도 한번 그려볼까? 하는 마음이 생겨날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책은 친절하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부터 알려준다. 그리고 각각의 재료들, 예를들면 연필이나 색연필을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지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종이, 펜, 연필, 색연필, 지우개, 칼이나 연필깎이를 구입할 때 이런 것들은 조금 더 신경써주세요라는 말도 초보자에게는 정말 중요하다진즉부터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아마도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펼치고 지은이가 하라는대로 따라서 그리면 된다. 그 작은 그림 하나하나마다 마치 옆에 있는 선생님처럼 세세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나요?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시간이 답이다. 꾸준하게 그리는 것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 노력도 없이 얻어지는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처음 그림을 시작한다고 도구를 준비할 때가 생각난다. 그 때 처음 알았다. 스케치북도 한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수채화용이나 드로잉을 위한 종이가 다르다는 것을. 같은 그림이라도 어떤 종이에 그리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도.  먼저 시작한 선배들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왜 안되는거야? 부러웠다. 내 마음에 흡족한 그림이 나오지 않아 조바심이 났었다. 그림에 소질도 없는데 괜히 시작했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단시간에 좋아질 수 없다는 것을. 이 깜찍한 그림들과 나도 빨리 친해져야겠다. ^^*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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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불멸주의자 - 인류 문명을 움직여온 죽음의 사회심리학
셸던 솔로몬.제프 그린버그.톰 피진스키 지음, 이은경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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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이성중에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은 어느쪽일까? 우리를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원천적인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일까?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에게 외면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죽음도 그렇다. 인간의 삶속에서 일상적으로 죽음은 외면당한다.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조차 철학의 과제는 '죽는 법 배우기'라고 규정했다고 아무리 말해도, '사람이 죽음에 맞서 무엇을 하는가'를 집성한 기록이 역사라고 헤겔이 외쳐댔다고 해도, 실제적으로는 과학심리학 영역에서조차 죽음이라는 주제가 큰 주목을 끌지 못했다고 한다.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지만 책속의 실험결과는 상당히 놀라웠다. 죽음이 우리의 사고를 그토록이나 강하게 바꿔놓을 수 있다니!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일상에서 죽음을 배제시키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이 책은 그런 관점에서 시작한 것 같다. 어린시절에는 죽음에 관한 공포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언제부터, 어떻게 인간은 죽음에 관한 공포를 자각하게 되는 것일까? 죽음을 의식을 하기 시작하면 어떤 느낌이 가장 먼저 찾아오게 될까? 공포? 불안?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것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불멸을 꿈꿔왔던 것일까?

 

책장을 넘기면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말이 '심리적 안정'이라는 말이었다. 어린시절에는 너무도 중요한 말이라고. 어찌보면 어린시절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속에서 가장 중요한 말일 것이다. 그 말은 곧 자존감이란 말을 내포하며 자존감으로 인해 많은 것이 좌우되기도 한다. 자존감이 결여되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심지어 죽음의 공포와 맞닥뜨리기도 한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죽음에 관한 의식을 갖기 시작하고, 그것을 인지하기 시작하면 죽음을 히피하기 위한 온갖 내적 수단을 사용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다시말해 죽음을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리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성장과정에서 겪는 많은 질서, 규제, 규범과 같은 것들이 죽음을 부정하는 일종의 도구 역할을 한다는 말이었다. 전지전능하게만 보였던 부모가 유약한 존재로 인식되어지기 시작하면 아이는 그때부터 자기가 속한 문화의 사회적 권위나 관습으로부터 더 안정을 느낄 수 있게 된다는 말이 어느만큼은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아이라 할지라도 죽음은 피할수도, 되돌릴수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 자기가 속한 문화가 규정한대로 행동하다는 말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이 세계에 가치있는 공헌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안심한다. (-67쪽)  이 말에 공감하는가? 이 말이 곧 자존감이라는 의미일까? 이후로도 책은 계속해서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우리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다루고 있다. '자존감', 과연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또 그것이 왜 이 책의 주제로 등장한 죽음이나 불멸과 연관성을 갖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자기기만'을 사용하며, 낮은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한다는 말이 보인다. 그것이 채워지지 못했을 경우에 나타나는 결과는 그야말로 참담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불멸을 꿈꿔온 사람들은 '실제 불명성'과 '상징적 불멸성'의 형태로 불멸의 존재가 되고자 했다. 전자는 사후세계와 영혼에 대한 믿음을 추구하고는 것이고, 후자는 죽은후에도 자신을 나타내는 상징적 자취를 남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죽지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던 진시황제나 피라미드를 만든 이집트의 파라오에 관한 기록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따지고 보면 옛날에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현재도 과학을 통해 인간은 끝없이 불멸을 꿈꾼다. 냉동인간이라거나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대체인간을 그렸던 영화속의 일들이 과연 영화로만 존재하는 것인지 묻고 싶어진다.

 

당신은 얼마나 자주 의식적으로 죽음을 생각하는가? 죽음에 관한 생각이 당신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가? ... 책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은 많았다. 심지어 강박장애나 불안장애, 정신분열증을 죽음에 저항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살짝 의심이 생긴다. 죽음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내기 위한 학술적인 정의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자살하는 이유가 자존감이 약해서라고?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고통이 너무 커서 죽음을 택하는 것조차 죽음의 공포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자살하는 사람이 자기가 죽은 후에도 계속 살아남을 것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다는 말은 왠지 껄끄럽다. 실제 불멸성을 기원하는 바램에서 비롯되어졌다는 주장이 내게는 단지 학술적인 정의로만 다가온다는 것이다. 또하나의 테두리안에 인간을 가두어버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은 역사를 통해, 혹은 수많은 실험결과를 통해 죽음에 관한 인간의 무의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굳이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말하지 않아도 죽음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문화를 만들어간다면 간단해진다. 죽음을 두려운 것, 공포스러운 것, 외면해야 할 것처럼 인식하게 만든 것도 문화인 까닭이다. 모든 학문이나 문화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것에 따라 인간의 삶은 좌우된다. 그러니 죽음의 공포에 대처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도 없어보인다.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듯이 죽음도 삶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면 그렇게까지 복잡하지는 않을 것 같다. 아주 오래된 역사속에서도 보여지듯이 죽음을 축복의 형태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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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관한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물음 49 - 어디다 대놓고 묻기 애매한
장웅연 지음, 니나킴 그림 / 담앤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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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神을 믿지 않는다고?  첫장부터 세게 나온다. 불교는 종교다. 그런데 신을 믿지 않는다는 말에는 언뜻 듣기에 모순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自燈明 法燈明'이라는 말이 있다. 부처는 자신을 믿으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자기 스스로 깨달음을 구하고 깨달음에 따라 행동하라고 했다.  神은 원래 인간이 창조한 것이다. 그러나 主客이 전도된 昨今의 실태를 보라. 어느 사이엔가 우리의 틈새를 파고 들어 너무도 깊게 뿌리를 내려버린 종교라는 허상!  그래서인지 나는 모든 것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어진다는, 그리하여 나로부터 비롯되어진 모든 것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좋아서 불교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불교에 관한 것을 알고 싶었던 차에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각설하고, 나처럼 불교에 관해 조금이나마 알고 싶은 이가 있다면 이 책을 권한다.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이라는 책의 제목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불교가 처음 들어올 때 우리나라의 토속신앙을 받아들였던 까닭에 불교를 말하면 당연히 무속적인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무속과 불교는 엄연히 다르다. 재미있는 질문들이 보인다. 스님들은 왜 삭발을 하나?, 부처님은 원래부터 곱슬머리였나?, 절에서는 왜 여성을 '보살님'이라고 부를까?, 관세음보살은 여성인가, 남성인가?, '수리수리마수리' 는 무슨 뜻일까?, 비슷하게 생긴 나치 문양과 만(卍) 자, 히틀러는 불교를 믿었나?  와 같이 누구나 한번쯤은 궁금해했을지도 모를 질문들은 슬며시 미소를 짓게 한다. 하지만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가 실존인물이었다는 것, 禪宗에는 왜 6조까지만 있는지, 탑의 층수가 모두 홀수인 까닭에 관하여, '天上天下唯我獨尊' 이란 말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처럼 진지한 질문도 역사를 통해 혹은 선사들의 말을 통해 답을 하고 있다. 법정스님을 통해 유명해진 말 '무소유'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렇듯이 무언가를 피상적으로 알기보다는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하다. 편견이라는 무서운 울타리에 갇혀있는 사람에게 올바른 판단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올해부터 시행되기 시작된 도로명주소의 피해를 고스란히 불교계에서 당하고 있다는 뜬금없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의 문화는 예로부터 이미 불교적인 색채를 지녔다는 걸 이해한다면 그런 결정들이 안타까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토록이나 많은 지명이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한때 고양시 식사동에 살았었다. 그곳에 살면서도 동네이름이 식사동이 뭐냐? 라고만 생각했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 일가에게 몰래 밥을 지어다 바친 절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는 건 전혀 몰랐다. 堂자가 들어가면 그곳에 당집이 있었다고, 立石이란 말이 들어가면 그곳에 큰 돌이나 석상이 서 있었을거라고 짐작은 했었지만 미아리에는 미아사라는 절이 있었고, 청량리에는 청량사가 있었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불광동은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비추는 곳이며, 은평구 신사동은 새로운 절이 들어선 곳이라는 이름이다. 불교 관련 지명이 전국에 550여개라고 지은이는 말하고 있다.  엄청나게 많은 지명속에 불교적인 의미가 들어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 그야말로 불교의 나라였다고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 하다. 그런데 우리의 이런 고유지명은 일제에 의해 한번 훼손되었었다. 그후로 나름의 뜻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는데 그 동네의 속성을 기억하게 해 줄 원래의 이름들이 도로명이라는 어설픈 말로 인해 다시한번 사장되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 또한 서글픈 일이 아닐수가 없다. 하기사 편리성과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사라져가는 우리의 옛모습들은 어딜가나 있으니...

 

우리가 흔히 쓰는 '야단법석'이나 '이판사판'이라는 말도 사실은 불교에서 온 말이다. 불교는 종교로 바라보지 말고 하나의 문화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어찌되었든 정말 사소한 질문이었으나 결정적이었던 질문을 통해 불교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 불교의 역사를 말하는 책은 많다. 사찰의 장신구들에 관한 이야기도 많다. 하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들은 바로 이런 질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연유로 이 책은 딱히 불교신자가 아니라해도 한번쯤은 읽어볼 책이 아닌가 싶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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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생각하다 - 사람이 행복한 지속가능한 집에 대한 통찰
최명철 지음 / 청림Life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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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이 있는 전원주택을 내집으로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쯤은 누구나 해보았을 것이다. 아파트가 아무리 편하다고해도 자연과 어울어지는 그림같은 집에 대한 생각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나 역시도 그렇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집의 형태가 아파트다.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람을 위한 집이 아니라 아파트를 위한 하나의 부속품처럼 사람이 거기에 붙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씁쓸한 기분이 느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더러는 아파트의 삭막함을 감추기위해 덩그렇게 커다란 나무를 심어놓기도 하고 물길 하나 만들어서 그것이 마치 시냇물인양 선전하기도 하는 걸 보면 아파트가 제 본성을 숨길래야 숨길 수 없다는 걸 금새 눈치채게 된다. 그런 집의 형태가 자산가치로서의 역할을 언제까지 하게 될까?

 

굳이 크고 넓은 집이 아니더라도 흙을 밟고 사는 곳에 내 집을 갖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데 어떤 집이 좋은 집일까?  타운하우스, 트리하우스, 셰어하우스, 플로팅하우스, 거기에 게스트하우스까지 집의 종류도 정말 다양하다. 건축에 문외한이다보니 처음 듣는 말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은 잘 넘어갔다. 어떤 집이 좋은 집인지, 집은 어떻게 지어야 하는 것인지 넘어가는 책장마다 한번씩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공동으로 마을을 형성해서 개성있는 자신만의 집을 지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시선을 끈다. 많은 사진을 함께 보여주고 있어서 뉴타운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달라지기도 했지만 집에 관한 우리의 비틀린 의식이 보이는 것만 같아서 뒷맛이 개운치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집이 좋은 집일까? 넓고 큰 집? 최첨단 시설을 갖춘 집? 조망권이 좋은 집? 주변의 경치가 빼어난 집? 멋지게 꾸민 집? 이러니저러니해도 가장 좋은 집은 거기에 사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집이 아닐까?  집안으로 들어서면 포근하게 안아주는 것처럼 그렇게 아늑한 집이 가장 좋은 집일거라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고 있다. 남들이 봐서 좋은 집보다는 내가 좋고 내가 편한 집이라면 가장 좋은 집일거라고. 최선의 집, 최적의 집, 최고의 집, 최신의 집이라는 부제로 나누어서 집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시선을 끌었던 것은 최고의 집편에서 보여주었던 방배동 H씨댁이었다. 겉에서 보기에는 그렇게 뻘쭘해보이던 집이 안으로 들어서니 놀랄만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자신만의 개성이 듬뿍 베어있는 그런 집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집을 짓고자하는 사람과 건축가의 생각이 하나되어 만들어진 집이라고 한다. 요즘은 그렇게 시대에 편승하기보다는 집다운 집을 짓고 싶어하는 건축가가 많다고 하니 앞으로는 개성있는 집을 자주 보게 되지 않을까?

 

불현듯 강릉의 오죽헌과 남양주의 여유당이 생각난다. 사랑채가 주는 느낌이 유난히 좋아서 오래도록 기억되는 집이다. 나중에 집을 짓는다면 이렇게 지어봐야지, 하는 마음에 평면도를 한번 그려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 그림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다. 가끔은 조금씩 수정하기도 하면서. 堂號도 미리 지어놓았다. 나도 언젠가는 편안하게 나를 감싸줄 집을 지어보리라. /아이비생각 

뜬금없이 찾아온 생각하나, 그런데 나무위의 집에서 살던 허클베리 핀이나 타잔은 행복했을까?

 

멀쩡한 단독주택지들을 노후 주거지라고 선을 그어서 아파트를 지을 수 있다고 부추기고 이웃 간의 갈등마저 야기한 잘못된 도시 행정은 멈춰져야 한다. 고요한 단독주택지 속에 뻘쭘하게 솟아 있는 아파트의 풍경은 이제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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