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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긴 변명
니시카와 미와 지음, 김난주 옮김 / 무소의뿔 / 2017년 2월
평점 :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앞에서 눈물 한방울조차 흘리지 않았던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책장을 덮고 난 지금 울지 않았던 게 아니라 울지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사람들은 가끔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잊혀진다는 건 슬픈 일이라고. 그래서 나를 잊지않고 기억해주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보면 상당히 이기적인 말인데도 우리는 항상 그렇지. 상대방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하는 모순을 어찌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아내의 죽음앞에서 눈물 한방울조차 흘리지 않았던 그 남자 사치오. 아내가 죽고나서야 사람이 살아간다는 의미에 대해 다시생각하는 계기가 찾아오고, 그가 갖지 못했던 일상적인 삶의 방식들이 그의 곁에 머물기 시작한다. 그 순간부터 그는 알았을 것이다. 산다는 게 이런거였구나, 어쩌자고 나는 이토록이나 쉬운 것들을 하지 못한 채 살아왔던 것일까?
톨스토이가 말했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라고. 온 세상이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믿을 수 있는, 만리길 나서는 길 妻子를 내맡겨도 마음 놓을 수 있는,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느냐고 우리의 시인 함석헌도 묻고 있지만 과연 그말에 온전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 몇이나 될까? 세잎클로버의 행복보다도 네잎클로버의 행운만을 찾아헤매는 우리에게 과연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아 책을 읽는 내내 서글펐다. 과연 나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과연 내게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모든 걸 볼 수 있는 건 아니야. 무언가를 선택하면 무언가를 잃게 되거든. 훗날 자신이 원해서 거머쥔 것들의 가치조차 희미해질 무렵에는 알게 돼. 자신이 얕잡아 본 것들 가운데 실은 거대한 세계가 있었다는 걸. 어차피 별 거 아니겠지 하고 우습게 여긴 거.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려다 보이는 세계를 잃어버리는 거지. (-165) 사치오가 아내를 잃고 자신의 삶을 하나씩 느껴가면서 뱉어냈던 저 말이 이내 가슴속을 파고 든다.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은 단지 나쓰코라는 이름뿐, 함께 했던 그녀와의 일상이 그에게는 단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걸. 그녀가 입었던 옷이 어떤 스타일이었는지, 그녀가 무엇을 보며 웃었는지, 그녀가 나와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는 어떤 것이었는지... 그 남자 사치오는 아내 나쓰코가 죽은 후에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가식적인 표정으로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자 노력했었다. 적어도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는 그렇게 하찮은 것에 흔들리는 사람은 아니어야 했기에. 하지만 예기치못했던 요이치 가족과의 만남은 그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 도대체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고.
왜 우리는 소중한 것들에게 상처를 주는 건지. 눈에 보이는 신호를 무시하고, 잡았던 손도 놓아버리고. 언제나 기회를 날려버리죠. 왜 이렇게 맨날 헛발을 디디고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지. 책을 읽어도 돈을 벌어도 전혀 현명해지지를 않으니. 언제까지 이런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건지. (-284) 결국 모든 걸 쏟아내며 절규하던 사치오의 눈물은 그렇게 힘겨운 회한을 불러왔다. 우리는 왜 모든 걸 잃고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일까? 이 소설은 같은 사고로 아내를 잃었던 요이치 가족과 그들 가족안에서 또 한명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사치오의 일상을 그렸다. 거기에 그들을 바라보는 他者의 시점을 빌어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한다. 지금 이 순간이, 지금 당신의 곁을 지켜주고 있는 그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을 잊지 말라고. 동명의 영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 영화를 한번 찾아서 보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살고 있으니까, 살아라'
그렇게 간단한 일일까 하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그런 건지도 모르지.
그 사람이 있으니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 사람'이 누구에게든 필요해.
살아가기 위해, 마음에 두고두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그런 생각이 절실하게 드는군.
他者가 없는 곳에는 인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생은 他者라고.
죽은 당신이 내게 '그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드는군. 이미 늦었나. (-325)
저 문장들에게 마음을 빼앗겼었다. 어디선가 저 문장을 읽으면서 저 책은 꼭 읽어봐야지 했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늦지 않았기를... 나만큼은 자신있게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기를... 나도 누군가의 마음에서 두고두고 생각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기를...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