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오거스트의 열다섯 번째 삶
클레어 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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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time leap.. 시간여행을 소재로 같은 기간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타임리프라고 한다. 당연히 SF장르다. 그런 소재를 다루었던 영화가 몇 편 기억은 나지만 그다지 관심있는 주제가 아니다보니 이렇다 할 느낌은 없었다고 말하는 게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다. 죽으면 다시 태어나고 죽으면 또 다시 태어나고... 우리가 알고 있는 환생과 같은 말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환생이라는 의미와는 별개의 의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사실 SF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몰입해서 읽기가 너무 힘들었다. 제목을 보면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일전에 읽었던 <달의 영휴>라는 작품이었는데 책의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까닭이다. 그러니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말부터 나왔다. 그런데 이 책의 소개글에서 한 줄의 문장을 보고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짜릿하고 행복한 상상을 부추기는 타임루프물을 생각한다면 큰 코 작은 코 다 다친다, 고.

 

읽으면서 내내 헤맸다. 도대체 뭘 말하고 있는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주인공 해리 오거스트가 몇 번의 삶을 살아가면서 겪어내는 일들은 쉽게 퍼즐이 맞춰지지 않아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하녀 리사가 주인의 강간으로 인해 해리를 임신했고, 그녀는 기차역 화장실에서 그녀를 낳고 죽었다. 어찌어찌해서 친아버지의 가문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관리인 부부에게 입양되어서 키워진다. 1919년에 태어난 그가 1989년에 죽었으니 70년을 살다가 죽은 것이 그의 첫 삶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태어나고 또 다시 태어남을 반복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예전에 살았던 삶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세번째 삶에서야 자신의 삶이 특이하다고 생각했고 그 이후로 그는 자신의 삶과 얽힌 일을 알아내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지식을 터득하게 된다. 그리고 알게 된다. 자신과 같은 사람이 또 있으며 심지어 그들만의 클럽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미래를 알고 과거를 안다고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던 듯 싶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일곱살 소녀가 나타나 세상의 종말을 말하고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말한다. 자, 이제 그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수많은 역사의 순간들이 그를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인간의 문명은 끝없이 발전하여 과학이라는 테두리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었을까? 이 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끝없는 과학의 힘은 신의 영역을 넘보게 되지만 결코 그 영역까지는 침범할 수 없었다. 아니 그가 그 영역까지 침범할 수 없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그칠 줄 모르는 과학의 광기에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가 보다. 그 수많은 역사의 순간들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읽고 생각해 낸 결말이다. 아니라해도 할 수 없고.

 

해리 오거스트의 삶은 열다섯번이나 반복되었고 반복되는 그의 삶은 어지러웠다. 그가 겪었던 모든 일의 퍼즐을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야 완전하게 맞출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까지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왜일까?  그럼에도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웠던 책.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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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잔혹사 - 설계자 이방원의 냉혹하고 외로운 선택
배상열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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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가끔 우리나라의 이름을 생각해 볼 때가 있다. 현재 우리의 문화 밑바닥을 형성하는 것은 대부분 조선의 문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그림도 조선의 비중이 상당한 크기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이름은 KOREA다. 왜 그럴까?  세계 여러나라와 자유롭게 무역을 했던 조선 이전의 나라 고려가 있었다. 그때 고려를 출입했던 무역인들에 의해 고려라는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그것이 KOREA가 된 것이다. 조선이 아니라 고려가 우리나라를 세상에 알렸다고 보면 된다. 고려는 외부의 침입도 여러차례 막아냈다. 그랬던 고려가 그 이름을 조선이라는 새로운 이름에게 밀려나게 된 것은 학창시절을 통해 배운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음이다. 이 책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조선의 건국과 그 시기의 정세를 말하고 있다. 1392년 태조 이성계에 의해, 아니 더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정도전이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게 되는 조선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 정말 무궁무진할 정도로 많다. 그러나 그 가운데 기록된 역사에 의문을 가진 이야기는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일전에 사도세자라는 주제를 가지고 기성학자와 다툼의 여지를 보여주었던 이덕일이란 역사학자를 통해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정말 흥미로웠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속내를 말하는 부분이 보인다.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거나 기존에 통용된 사실을 반박할 수 있거나, 최소한 기존의 주장을 보완할 수 있는 증거를 제출하는 것(-298)'이 사학의 영역을 누비면서 세운 철학이라고. 또한, '실록은 결코 진실을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사실과의 관계를 구획해아 할 필요가 절실하다.(-357)' 라는 한줄만으로도 그가 왜 이 책을 써야했는지를 짐작해 보게 된다. 읽으면서 많은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배상열이라는 이름을 검색해 그의 작품을 한번 찾아보았다. 얼마전에 읽었던 <조선을 홀린 무당 진령군>, 이미 오래전에 읽었던 <반역 패자의 슬픈 낙인>, 그리고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던 <비열한 역사와의 결별 징비록>... 모두 같은 작가의 글이었다는 걸 이제사 알게 된다. 새삼스럽다. 딱히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많은 부분에 공감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던 '하여가'와 '단심가'는 없다, 우리가 알고 있던 '함흥차사'는 없다, 와 같이 책이 보여주고 있는 소제목들은 눈을 크게 뜨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럼에도 그가 주장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한 해석은 논리정연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했다. 그러니 당연히 기록되어진 것들에 대한 오류를 찾아내는 것도 후대의 일일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미 우리 주변에서 잘못된 역사의 흔적은 많이 보여지고 있으며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손길도 많이 볼 수 있으니. 한번 믿은 것을 수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우리의 의식이 문제일뿐.

 

사실 조선사를 읽다보면 부글부글 화가 치밀어오를 때가 많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당연하게 그런 마음을 다스려야만 했다. 세자를 결정하고 이제 국호를 변경하기 위한 승인을 받기 위한 상황에서 朝鮮과 和寧으로써 국호를 고치기를 청했다는 대목에서 사대주의의 정점을 찍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두고두고 부끄러운 역사가 아닐 수가 없다. 제 나라의 이름조차 스스로 정하지 못했던 그 때의 상황을 나열하며 분함을 떨쳐내지 못하던 저자의 심경에 역사를 잘 모르는 나조차도 백번 공감하게 되니 어찌된 일일까?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광해군, 소현세자, 정조, 효명세자... 어느 방송에선가 역사속에서 다시 불러내고 싶은 이가 누구냐고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 가장 많이 나왔던 이름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이름이기도 하다. 광해군이 반정으로 내쳐지지 않았다면, 정조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소현세자와 효명세자가 죽지 않고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다면.... 물론 그 때의 상황을 우리가 살아보지 못했기에 단지 유추할 뿐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인물들이 좀 더 오래 살아주었더라면 아마도 昨今의 우리 모습은 상당히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좀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우리의 역사가 조선이 아닌 고려에서 끝났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여러번 했었다. 고려는 생각보다 모든 면에서 개방적인 사회였던 것 같다. 이방인들과의 자유로운 무역도 그렇고, 여러가지 사회문화적인 측면을 보더라도. 각설하고, 정말 흥미로웠다. 읽는 내내 각각의 장면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래서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우리에게는 다른 각도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응원을 보낸다. 아주 많은 응원을! /아이비생각

 

이번 작업을 통해 다시 한 번 절감하는 것은 합리적 의심이 외면당한다는 점이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격살하도록 명했다는 것과, 주도적으로 반역을 이끌어 이성계를 보위에서 끌어내렸다는 내용이 실록에 기재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록에 나타났다고 해서 사실일 수 없거니와, 진실일 리는 더더욱 만무하다. 그럼에도 합리적 의심이 외면당하는 것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과 영화처럼 돈과 직접적으로 결부되는 바닥에서 그런 기록들을 기반으로 하는 것은 맹수들이 먹잇감을 찾아 나서는 것만큼이나 당연하다. 거짓의 역사가 그들에 의해 다시 가공된 다음 대중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움직일 수 없는 진실로 응고되는 것은 대단히 흔쾌하지 못하지만, 이쪽에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 나가는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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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은 왜 제품이 아니라 브랜드텔링에 집중했을까? - 소비자를 사로잡는 글로벌 기업의 브랜드텔링 전략
염승선 지음 / 책들의정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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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커피 마시는 곳. 현대카드? 아직 나에게는 없는 카드. 몰스킨? 뭔지 모름. 에비앙? 들어는 본 것 같음. MUJI? 무늬가 없다는 건가? ..... 책표지에 보이는 이름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다 잘나가는  No.1 글로벌 기업의 이름이라고 한다. 역시 나는 브랜드에 약한건가?  그런데 브랜드라고 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명품이라고 하는 건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그 정도의 브랜드라면 어느 정도는 '장인의 손길'이 들어있다는 뜻일까?  글쎄... 잘 모르겠다. 진짜로 장인의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 명품이 있기도 하겠지만 광고의 힘에 의해 브랜드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제품도 있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광고에 현혹되었거나 남이 하니 나도 한다는 사람들의 심리적인 상태에 의해 어쩌다보니 이름을 알린 제품도 있을 거라는 말이다. 뭐, 내가 브랜드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보니 그럴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짐작을 해 본것이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런 것들을 가까이에 두지 못하는 속쓰림이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책표지에 보면 변하지 않는 가치를 만들겠다는 '다른 생각'이 브랜드를 만들어냈다는 말이 보인다. 변하지 않는 가치... 멋진 말이다.

 

지금은 여기저기에서 스토리텔링이 많아지고 있다. 스토리텔링이라 함은 어떤 것에 더 많은 이야기를 붙이거나 이야기를 만들어서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브랜드텔링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스토리텔링과 브랜드텔링의 차이는 무엇일까?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진실된 가치를 효율적으로 말하는 것이 브랜드텔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광고하고는 뭔가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일까?  원래의 이야기를 각색하거나 덧붙여서 설득력있게 전달하기 위해서 나온 게 스토리텔링이라는데, 요즘의 스토리텔링은 원래의 것은 작아지고 만들어진 것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경우가 많은 듯 하여 약간은 껄끄럽게 느껴졌던 순간도 꽤나 많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브랜드텔링이라고? 스토리텔링과는 뭔가 다를 것 같다는 생각에 책을 읽기 전부터 은근하게 기대감이 몰려왔다.

 

in 안으로 + nov 새롭게 + ation 하기 = innovateion. 혁신이라고 알고 있는 단어의 속내를 들여다보게 된다. 겉이 아니라 속을 새롭게 바꾸는 게 이노베이션이라고 말하고 있다. 애플의 아이폰을 예로 들어가면서. 아이폰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스마트폰이라고 하지 않고 모두 아이폰이라고 부른다는 말과 함께. 이노베이션을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하는데 애플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관찰했으며 거기에 부합하는 제품을 만들었으니 그게 바로 아이폰이라는 것이다. 비슷해보이지만 절대로 같을 수 없는 제품, iPhone. 즉 내전화라는 뜻이다. 내 전화... 책을 읽으면서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부분이 많았다. 심리전의 승자로군! 기능이 아닌 감성을 팔아라, 라는 말이 안고 있는 의미의 깊이는 상당했다. IQ, EQ를 넘어 이제는 SQ를 말하는 시대라고 한다. 언제는 지능지수가 높아야 한다더니, 언제는 또 감성지수가 높아야 한다고 떠들어댔었다. 그다지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더니 이제는 사회에 적응하는 지수가 높아야 한단다. 다시 말해 타인과 잘 어울리는 능력이 바로 SQ라는 말이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일터다. 그런데 이쯤에서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물건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보여지는 것 같아서. 지금의 세상에서 제대로 된 혁신은 몇 개나 되는 걸까? 하고.

 

지금은 단종되었지만 '봉고'라는 차가 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봉고차, 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봉고'는 차 이름이고, 승합차다. 지금의 젊은세대에게는 낯선이름일테지만 그 당시에는 봉고차라는 말이 승합차라는 말을 대신했었다. 아마도 그게 브랜드텔링의 한 단면은 아니었을까?  딱히 소수의 사람들이 희소성의 가치를 논하는 것만을 브랜드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서 거기에 부합하는 제품을 만들어냈을 때, 그리고 그 제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브랜드가 아닐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광고를 통해 끝없이 주입시키려하기 보다 제대로 된 제품이라는 입소문을 타고 오래도록 사람들곁에 머무는 것이 진정한 브랜드가 아닐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이 책을 통해 세상을 베운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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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내 맘 같지 않은 사람들과 잘 지내는 법
토마스 에릭손 지음, 김고명 옮김 / 시목(始木)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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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물어보자. 세상에 내 맘같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내 맘과 같을 수가 있는거냐고. 책 소개글에 이런 말이 보인다. 이 책은 말 그대로 ' 내 맘같지 않은 사람' 과 오해없이 관계를 맺고, 협력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라고. 정말? 그렇기만 하다면야 진짜로 멋진 일이다. 하지만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왜 모든 사람을 내 맘같이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하는거지?  이 책에서는 사람의 유형을 빨강, 파랑, 노랑, 초록으로 구분했다. 성격이 그렇다는 말인데 각각의 색깔마다 나타내는 사람들의 성격이 재미있다. 물론 자신이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를 판단하게 해주는 질문도 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저자의 말이 보인다. 자신이 왜 이런 연구를 하게 되었는지. 흥미롭기는 했다. 진짜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저 틀안에서만 놀아준다면 걱정할 게 없을텐데.

 

①도전할 거리를 모두 없애버리고, 최대한 비효율적으로 일하라. ②중요하지 않은 것을 계속 걸고넘어지며,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투명인간 취급을 하라. ③다 끝낸 일을 처음부터 다시 해달라고 말하고, 벌인 일은 절대 수습하지 말라. ④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일을 진행하라고 말하라... 앞에 열거한 것들은 모두 그들을 화나게 하는 방법이다. ①번은 레드 타입, ②옐로 타입, ③그린 타입, ④번은 블루 타입의 사람이다. 그래놓고는 그들의 화를 어떻게 풀어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내놓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어떤 타입의 사람이라도 화를 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아닐까 싶어 고개를 젓게 된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굳이 사람을 레드 타입이니, 그린 타입이니, 나누지 않아도 곁에서 보면 그 사람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 그 사람과 그 때의 상황에 맞춰 대응하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람을 저렇게 어떤 틀로 구분지어 놓은 것은 아무래도 세상을 좀 편하게 살자는 뜻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재미삼아 나는 어떤 타입의 사람인가 질문지에 체크를 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체크하면서도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어떻게 사람의 성격을 이렇게 단 한마디의 문장으로 결정할 수가 있는지... 중복적인 답이 많이 나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모든 사람이 상황마다 다 똑같이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도 저자가 말하는 내용에 어느정도는 공감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레드 타입은 '무엇'을 묻고, 옐타입은 '누구'를 묻는다. 블루 타입은 '왜'를 묻고, 그린 타입은 '어떻게'를 알고 싶어 한다. (-197쪽)  저 한줄의 문장으로 저자의 말을 짐작해 볼 수 있을까?  문득 오래전에 배웠던 심리학에서 '좋아하는 색으로 보는 사람의 성격'이 생각났다. 빨강은 적극적이지만 충동적이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를 잘한다. 노랑은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지만 자신이 목표한 바를 위해서는 물불 안가린다. 초록은 온화한 성격으로 안정적인 걸 좋아하며 변화를 싫어한다. 그러나 자신의 성격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한꺼번에 폭발하는 경우가 있다.  파랑은 자존심이 강해서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하지만 정의로운 면이 있다... 등등. 그러고보니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저자의 성격타입과 비슷하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또 하나의 틀에 갇혀버리는 걸까?  어쩌면 이미 그 틀안에 갇힌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

 

싫든 좋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많은 사람과 마주쳐야 한다. 사회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형성되어지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보니 그 많은 사람과 부딪히지 않고 얼굴 찌푸리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세상 사람이 모두 나같지 않으니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면 상황에 따라 내가 마음 상하는 있는 일이 적어질 수도 있을테니까. 그런데 거꾸로 한번 생각해보면 오히려 답은 간단해진다. 이 책 역시 그렇다. 내가 아닌 상대방에게 초점을 맞췄다는 점이다. 이렇게 복잡하게 성격유형에 대해 왈가왈부 하지 않아도 상대방에 대한 약간의 배려와 관심만 있다면 크게 문제될 일도 없을 터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가를 곰곰 생각하는 것부터가 관심이며 그 사람의 성격에 맞춰 무언가를 진행한다는 자체가 바로 배려가 아닐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진심없는 관심과 배려는 아무리 이런 책을 보며 공부를 한다해도 결국 문제를 일으킬 수 밖에 없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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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떠나는 인도여행 인문여행 시리즈 1
허경희 지음 / 인문산책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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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서쪽지방에서 농업과 수렵으로 먹고 살았고, 남근과 어머니신에 대한 숭배가 강했다던 고대 드라비다인의 역사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교과서에서 배웠던 인더스 문명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인도를 중심으로 그 고대의 문화가 살아있다고 한다. 오래전 아리아인에게 정복되기도 했지만 그들의 신앙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 아리아인들의 브라만교와 드라비다인의 토착신앙이 서로 어우러져서 힌두교라는 종교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도의 신화속에서 보았던 창조신 브라마나 천둥의 신 인드라,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가 결국은 힌두의 신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왜 나는 인도를 생각하면 힌두교보다 불교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불교적인 문화의 영향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누구든 마시기만 하면 불로장생 할 수 있다는 암리타도, 시바의 아내였다는 사티도, 가릉빈가라고도 불리우며 鳥의 형상으로 표현되는 가루다도, 살아있는 제물을 좋아했다는 여신 칼리도 모두 힌두의 문화였다는 걸 이제사 알게 된다.

 

사실 요즘처럼 여행이 테마가 되는 세상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여행서를 만나게 된다. 기행문같은 여행서도 있고, 사진을 듬뿍 실어주어 시각적인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여행서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여행서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인도라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까닭이다. 나에게는 인도, 하면 불교라는 말이 당연한듯 따라오지만 그것처럼 항상 인도라는 말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카스트제도일 것이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말이지만 모순되게도 그것이 그들의 일상에서 오롯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 이유가 늘 궁금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세의 행복을 위해 현세의 아픔을 감내한다는 말이 이채롭기는 하다. 뭐, 우리에게도 현세의 아픔을 잊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교적인 문화가 있으니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시선을 끌었던 것이 <우파니샤드>라는 거였다. 찾아보니 산스크리트어로 '가까이 앉음' 이란 뜻이라는 말이 보인다. 인도의 고대 철학 경전이라고 하니 결국 사제간에 서로 주고받은 말들을 써놓은 글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원뜻처럼 스승과 제자의 철학적 토론으로 구성되어있다는 말을 보면서 아하! 한다. 불교의 모든 경전 첫머리에서 볼 수 있다는 '如是我聞' 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우파니샤드 철학이라는 건 우주의 근본원리를 가리킨다는 브라만(Brahman : )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tman : )을 하나로 보는 범아일여() 사상으로, 인간은 윤회를 반복하지만 定과行을 통해 진리를 찾고 윤회에서 해탈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고 한다. 定과行을 통해 진리를 찾는다는 부분에서 '自燈明法燈明' 이란 말을 생각하게 되었다.  부처가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주었다는 말이다. 자신을 등불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인데 외부에서 무언가를 찾지 말고 내부에서 찾으라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쯤에서 나는 살풋 웃음이 났다. 결국 나는 불교를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손에 넣은 것이군,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해도 인도라는 나라가 궁금했던 건 사실이다.

 

이 책은 나에게 인도라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의 형성에 대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물론 이 책만으로 인도의 역사나 문화를 모두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이민족의 침입을 겪어내면서도 자신들의 특성을 고스란히 유지할 수 있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전통을 유지하면서 변화를 받아들이는 나라. 한편으로는 부러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역사나 문화는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겠지만 이 책 한 권을 들고 인도를 여행한다고 해도 왠지 듬직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학적인 나라로 다가왔다던 저자의 시선을 따라 나도 한번 인도여행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꾼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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