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운 꿀벌의 세계 - 초개체 생태학
위르겐 타우츠 지음, 헬가 R. 하일만 사진, 최재천 감수, 유영미 옮김 / 이치사이언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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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도 포유동물이다? 왜? 포유동물처럼 번식률이 낮고, 자손을 양육하기 위해 젖과 같은 왕유 즉 로열젤리를 분비하며, 안전한 양육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벌집을 만들고, 36도의 체온을 유지하는 포유동물과 비슷한 35도의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 가장 뛰어난 학습능력과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 조그만 꿀벌을 포유동물로 본다는, 처음부터 낯선 이론과 마주치게 되는 꿀벌의 세계를 들여다본다는 건 분명 흥미로운 일일 것이기에 일종의 설레임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현란한 사진들이라니!  작은 사진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붙어 있는 아주 짧은 설명글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대충 보아 넘기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유럽에서 세번째로 중요한 가축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꿀벌이다. 이번에는 또 가축이라고? 왜? 그것은 농작물의 수분활동에 관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란다. 벌이 사라진다면 4년안에 지구가 망할 것이라는 이론을 뒷받침해주기에 충분한 근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책을 읽다보면 많은 의문점들에 대하여 명쾌한 해답을 내려주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꿀벌의 탄생부터 벌집을 만드는 과정이나 벌집의 구조, 여왕벌의 혼인비행, 벌들의 언어등등 꿀벌에 관한 새로운 정보들이 놀랍도록 세세하게 잘 설명되어져 있다. 벌집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지키고, 유충을 돌보는 등 많은 일을 하던 일벌이 나이가 들어 가장 마지막으로 하는 일이 꿀을 채집하는 일이라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내가 알고 있던 상식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 모든 벌들이 꿀을 채집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하는 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분봉을 하는 과정에서조차 나는 새로운 여왕벌이 따로이 분봉을 하는 거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새로운 여왕벌이 태어나면 기존의 여왕벌이 원래의 군락에서 70%가량의 일벌을 데리고 옛벌집을 떠난다고 한다. 일벌의 1/3을, 꿀과 꽃가루. 애벌레로 가득 채워진 벌집을 지참금으로 받는 새로운 여왕벌의 출발은 그야말로 탄탄하다고 한 말이 이해된다. 하지만 아주 어린 일벌과 노쇠한 일벌들만이 남겨지는 것과 여왕벌을 따라 분봉하기 위해 벌집을 떠나는 일벌의 일령이 엇비슷하다는 걸 보면 노동과 이익을 고루 분배하는 사고관념이 놀랍기만 하다.

꿀벌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색깔을 알게되니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던 나에게 곤충들의 습격(?)이 있었던 어느날의 산행이 떠오른다. 여러색 중에서 한가지 색을 골라야 할때 망설임없이 파란색과 노란색을 선택한다는 건 그다지 의미있는 행동은 아닌 듯 보여지지만 파랑과 노랑이 꽃밭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색이고 다른 색의 꽃에도 파랑과 노랑의 파장이 많이 들어있다는 사실은 몰랐던 사실이다. 또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움직임에 민감한 꿀벌 군락앞에서는 절대로 크게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사물은 슬로모션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또하나 꿀벌군락 근처에서는 바나나를 먹지 마라. 공격할 때 쏘는 침에서 경고 페로몬이 분비되는데 이 페로몬은 다른 벌들에게 공격개시를 알리는 신호가 된다고 한다. 이 때의 경고 페로몬은 잘 익은 바나나 향기를 풍긴다고 하니 명심할 일이다.

꿀벌이 꽃을 찾아 날아다닐 때 한동안 똑같은 종류의 꽃만 찾아다닌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은 어떻게 꿀벌이 대부분의 수분활동을 도와주는 매개체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풀리게 한다. 그토록이나 많은 꽃의 형태와 종류를 보면서 내심 그런 점들이 궁금했었던 까닭이다. 또한 꿀벌의 지능에 관한 부분은 정말이지 놀랍다. 오른쪽과 왼쪽, 대칭과 비대칭, 같은 것과 다른 것, 더 많고 적은 것등을 알 수 있으며, 미로에서 길을 찾아야 할 때 어떤 표지를 따라가야 하는지를 아주 빠르게 인식하고 습득할 수 있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말이다. 사전에 작업 계획을 세워 효율적으로 작업의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하찮은 미물이라고 치부하기엔 우리가 너무 부끄럽기만 하다. 그렇다면 그 많은 꿀벌들이 똑같은 꽃에 앉을 확률이 많지 않을까? 하지만 한번 방문했던 꽃에 '꿀이 없음'이라는 화학적인 표지를 달아두어 다른 꿀벌이 그 꽃에 내려앉는 수고를 하지 않도록 해 준다는 꿀벌의 학습능력이 놀라울 뿐이다. 꽃들도 저마다의 상황에 맞게 꽃을 피워올리지만 그 시간표에 맞춰 식탁앞으로 날아갈 수 있는 시간 감각까지 갖추고 있다는 꿀벌의 학습능력, 그리고 별다른 수확이 없었던 꽃밭은 기억속에서 지워버려 다시 찾아가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한다는 망각기능을 볼 때 꿀벌을 통해 우리도 배울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개미의 세계. 그 개미의 세계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통해 만났을 때 정말 기막히도록 놀라웠었다. 그리고 그 작은 개체군에 매료되어 연구를 하고 정보를 알아내는 사람들에 대한 경외감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조직적인 사회를 갖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왠지 두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이 책 <경이로운 꿀벌의 세계>를 통해서 또하나의 황홀한 개체군을 만나게 되었다. 체계적으로 조직을 이루어나가는 이 두 개체군의 모습을 보면 왠지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개미들이 내뿜는 페로몬과 꿀벌들이 풍기는 나시노프샘의 페로몬이 담고 있는 그들만의 언어는 정말이지 대단하다. 벌들도 말을 한다고? 실제로도 꿀벌은 그들만의 언어를 갖고 있다고 한다. 바로 '춤 언어'라고 한다. 소리도 없는 몸동작만을 할 뿐인데 다른 벌들이 그 메세지를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을까?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가 떠올랐다. 백설공주를 사랑했던 일곱번째 난장이는 벙어리였다. 그래서 몸짓과 춤으로 그의 사랑을 표현했지만 공주는 알아듣지 못한 채 떠나버렸다는... 그런데 꿀벌은 달랐다. 달콤한 꿀이 있는 목적지까지의 방향과 거리를 아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그 몸짓만으로! 더구나 춤을 추는 주연벌과 조연벌이 따로 있다는 것이 재미있지 않은가? 이 때 그 행위의 나침반이 되어 주는 것이 하늘에 떠있는 태양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자연과 하나된 꿀벌들의 생태를 알 수 있는 일이다.

꿀벌은 집을 짓기 위한 터를 고를 때도 상당히 까다로운 듯 하다. 벽의 상태가 어떤지, 주변의 환경은 어떤지 살펴보고 자신들이 원하는 여러가지 조건에 충족되었다고 여겨지면 선발대를 편성하여 그 주변 지역까지 알아보는 섬세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집을 지을 때도 알방, 유충방, 고치방은 중앙에 그 주위로는 꽃가루가 채워질 방을 만들며 나머지는 꿀을 채워넣을 방을.. 이렇듯이 벌들은 집을 지을 때도 각 기능에 맞게 집을 짓는다고 한다. 벌집 자체가 다양한 기능을 해야하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지만 뚜껑이 있고 없으며 방의 크기가 큰 수벌의 방에 비해 일벌의 방은 더 작고 납작하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그 밖에도 꿀벌들의 세계에서 그들만의 방법으로 질병을 물리친다거나 추위를 막기위해 꿀을 날라다주는 주유벌도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벌집의 입구를 지키며 자신의 벌통에 속하는 벌인지 그렇지 않은 벌인지를 식별하여 낯선벌의 출입을 막는 경비벌은 엄격하지만 꿀방울과 같은 뇌물을 넘겨주면 못본척 눈감아주기도 한다고 한다. 조직적인 생활을 하는 군단에게는 비리(?)가 필요불가결한 것일까? 윌리엄 골딩의 작품 <파리대왕>에서 파헤쳤던 조직적인 사회에서 우두머리를 만들고자 하며 군림하고 싶어했던 이기적인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 그 많은 개체군속에서도 한마리의 우두머리를 통한 지휘체제가 아닌 꿀벌의 세계는 정말 신비롭기까지 하다. 꿀벌의 직업군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여왕벌은 결코 지시나 명령을 내리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수벌, 일벌, 수집벌, 난방벌, 주유벌, 물을 운반하는 벌, 부채질하는 벌, 환기를 담당하는 벌, 건축벌, 통풍벌, 시녀벌, 장례벌 등등 각 상황에 맞추어 저마다의 일을 하는 벌들이 서로 협력하여 그 조직을 이끈다는 것이 참으로 매력적으로 보여졌다.  그야말로 꿀벌의 세계를 탐닉했던 시간이었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꼼꼼하게 읽혀지던 책이었다. 그 많은 사진 한장 한장이 나에게는 놀라움을 선사해주었고, 너무나 안일하게 생각했었던 꿀벌이라는 존재를 다시보기 할 수 있는 기회가 된 듯 하다. 책의 맨 마지막 구절처럼 '꿀벌을 돕는 일이 우리 스스로를 돕는 일' 이라는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구의 생태와 경제를 위해 꿀벌이 건강하게 존속해야 한다는 말은 더더욱 잊으면 안되지 싶다. 책을 통하여 꿀벌에게 우리가 배워야 할 점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환경에 따라 수명이 달라지는 것에서 노화연구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듯이, 꿀벌의 복잡한 생물학적 연관들에 대한 것들을 통하여 우리의 젊은이들이 앞으로 살만한 환경을 만들어 가는 데 책임의식을 느끼도록 동기부여를 할 수 있다는 말에 크게 공감한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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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자란다 - 아라이 연작 소설
아라이 지음, 양춘희 외 옮김 / 아우라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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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꿈결같은 이미지를 품고 있는 곳. 하지만 그곳이 왜 그렇게까지 꿈결같은 이미지를 품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죽기전에 한번쯤은 꼭 들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은 중국의 한 자치구에 속해있지만 그들도 한때는 그들만의 나라일때가 있었다. 단단하게 뿌리박힌 티베트 불교의 단아함속에서 작지만 욕심없이 살아왔던 소수민족이었을거라고 생각되어지지만 어찌되었든 그들이 중국의 침략에 무참히 밟혀 하나의 자치구가 되어버렸을 때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감히 생각해 보게 된다. 포탈라궁이라는 언덕위의 사원이나 현재까지도 어디에 머물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떠도는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의 존재가 어쩌면 나에게 그 꿈결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낸 건 아니었을까?

아주 오래전 <티벳에서의 7년>이라는 영화를 통해 나는 처음으로 티벳을 보게 된 것 같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그들의 종교생활은 지금 생각해보면 저렇게 무너져내릴 건 아니었지 싶기도 하고.. 환생이라거나 윤회라거나 하는 사상 따위는 믿지 않지만 왠지 무너져버린 그들의 종교적 의미가 안타깝게 느껴졌던 까닭이다. 티베트어로 신의 땅이라는 뜻을 가졌다는 '라싸'라는 지명 하나만 보더라도 그들에게 있어 종교적인 의미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했는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티벳인이라는 작가 아라이의 시선은 우리가 바라보는 그 꿈결같은 이미지를 거부하고 있다. 당신들이 꿈꾸는 티벳의 속살이 이렇게 생겼습니다, 라고 말하는 듯이.. 그렇게 중국이라는 커다란 장화아래 짓밟혀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꿈틀거리며 아직은 살아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듯이.. 아무리 그랬어도 티베트라는 단어가 안고 있는 그 신비스러움이 없어질 것 같지는 않다.

처음엔 책속의 흐름을 따라가기에 힘겨웠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앞서고 작가가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들만의 생활을 이해하기가 쉽진 않았다.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다시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그들만의 현재가 책속에 녹아있었지만 왠지 전날의 환상적인 이미지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끈끈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고는 하지만 옛것을 향한 향수를 차마 버릴 수 없었던 때문일까?  이 책속에는 대체적으로 라마, 즉 라마교의 고승으로써 수도만을 목적으로 살다가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의해 철폐되는 사원을 떠나 환속해야 했던 수도승들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경전만을 읽을 줄 알았던 그들이 사회의 현실적인 삶에 동화되어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음이다. 그들을 통하여 당시의 티베트인들이 만들어가던 사회상을 볼 수가 있다. 

어디나 다 그렇다. 무너져가는 가정이나 무너져가는 민족 또는 나라의 마지막엔 다시한번 불사르고 싶어하는 한줄기 흐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다 안되면 서서히 현재에 동화되어져 가거나 아니면 체념이나 포기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들도 그랬다. 마을로 내려왔으나 쉽게 마을사람들속에 섞여들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작가는 그대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1950년대 이후 쓰촨과 티베트 경계의 지촌이라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면서 그들의 평범한 삶속에서도 변화의 물결에 순응하는 한편 새로움에 대한 기대 또한 놓치지 않는 듯 하다. 몇 편의 짧은 이야기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통해서 작가는 그런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중국사람이 아닌 티베트사람으로서의 긍지 또한 뚜렷하게 보여주려 한다.

책을 읽다보면 일종의 구도서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때도 있다. 작품속의 주인공들을 따라가다보면 왠지 모르게 신비스럽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는 부분과 자주 마주치는 까닭이다. '현자 아구둔바'라는 단편이 특히나 그런 것 같다. 티베트인이 바라보는 불교적인 특징이라거나 신성화된 시선으로 속세의 감정등을 바라보는 듯한 표현이 그렇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현자로써 살아가는 모습만 보더라도 석가모니를 떠올리게 하기엔 충분하다. 석가모니처럼 그도 현실의 근심을 회피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때로는 신처럼 때로는 인간처럼 그렇게.. 이렇듯이 이 작품속에서는 변화에 희생되어지는 모습과 변화를 찾아 떠나가는 모습이 동시에 그려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변화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 또한 숨기지 않는다.

<색에 물들다>라는 그의 작품을 읽고나서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읽어보리라 했었다. 그랬기에 이 책은 주저없이 선택되어졌지만 전작만큼의 느낌은 전해받지 못한 듯 하다. 티벳이라는 나라의 속성을 잘 몰랐기에 그러했으리라.. 그리고 그다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작품의 형태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앞서기도 하지만 작품속의 흐름이 왠지 멀게 느껴졌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만큼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았다는 말도 될 것이다.  순수함이라거나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그들 삶의 형태는 나에게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을 전해주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순수를 받아들이기엔 내 마음도 너무나 멀리 와버린 탓이겠지 한다. 그렇지만 티벳이 품고 있는 라싸의 땅위를 죽기전에 한번쯤은 걸어보고 싶다는 욕심은 여전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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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힘
도야마 시게히코 지음, 김은경 옮김 / 북바이북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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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세이, 다시 말해서 수필이라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나 역시도 끄적거리는 걸 좋아하다보니 그저 산문형식의 글이 될 수 밖에 없다. 수필이라는 건 아무런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글이 아닐까 싶은데 그러다보면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시작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글쓴이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야말로 개인적인 생각을 표현한 글을 이해한다는 것이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게 보여지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수필 읽기를 꺼려한다. 어느정도 그 사람의 작품을 읽어보았다면 한번쯤 도전해 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처음 마주친 그 사람의 작품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거나 해서 글쓴이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지는 경우다. 이 작품 <망각의 힘>이 바로 수필집이다. 무심코 생각하기엔 망각, 즉 우리에게 있어서 아주 소중하게 다가오는 어떤 기억의 원리에 대해 말해주는 책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었지만 읽으면서 바로 수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대체적으로 수필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을 담다보니 너무 어렵거나 혹은 너무 장황스럽거나 하는 느낌을 전해받을 때도 있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글이니 쓴 사람보다는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그 책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하게 된다. 너무 어렵거나 장황스럽다면 (쉽게 말해서 잘난체한 듯한 느낌을 전해받게 되면) 두번 다시 그사람의 글을 읽고 싶지 않을테고 그렇지 않고 쉽고 차분하게 다가왔다면, 그리고 나와 같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면 그 사람의 글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책의 저자 도야마 시게히코의 생각은 단순명료하게 다가온다. 그다지 어렵지 않게 풀어가는 문체도 수월하게 읽힌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무언인지를 눈치챌 수 있는만큼의 거리를 주고 있다. 하지만 간혹 일본스러운 것들과 마주칠 때가 있다. 그 나라의 문화적 속성을 모르니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쳐가야 할 때도 있다는 말이다. (소개글을 살펴보자면 일본에서는 꽤나 유명한 사람인듯하다)

여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문제에 대해 찬반이론과 호불호의 이론의 보여진다. 그렇다고 딱히 저자의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하지는 않는 듯 하다. 단지 내 생각은 이렇다, 라는 것만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보니 딱히 거부감이 일지는 않는다는 말이 맞을게다. 저자가 어떤 사람이었든 내가 모르는 상태에서는 아무래도 나의 일상적인 것들과 마주하는 글들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그리고 어떤 주제를 놓고 너무 강력하게 말하기보다는 읽고 있는 나에게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다면 더욱 더 좋다. 멀리 떨어져서 바라볼 때에 아름다운 것들을 굳이 가까이 다가가 실망하고야마는 우리의 조급함에 대한 생각이 참 좋았다. 빗나가기 때문에 재미있다는 예측이론은 왠지 작금의 현실세계를 살짝 엿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했고, 무서울 정도의 힘을 가진 습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글은 다시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어 좋았다. 아이들의 교육문제라거나 블랙먼데이 혹은 블루먼데이라고 부르는 월요일과 상반되는 휴일의 개념에 대한 그의 생각에는 작은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느낌이 괜찮았던 에세이집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의 뇌는 서랍처럼 되어 있어서 가끔씩은 정리를 해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 그 비워주는 역할을 해주는 건 아닐까?  굳이 멀리가지 않아도 좋다. 가까운 곳을 잠시 떠나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해서 잠시 머리를 쉬게 해주기도 하고 저 아래쯤에서 눌려 신음하는 기억이라는 것들을 차분하게 들어내는 것도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망각.. 잊혀지는 사람이 가장 슬프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지만 때로는 잊혀지는 것이 오히려 좋을수도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잊고 살아가야 하는 것들 혹은 잊고 살았으나 잊지 말아야 했던 것들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잊어야만, 혹은 버려야만 다시 채워넣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마음비우기가 절실하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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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루 - Swa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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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배우들의 내면연기가 괜찮았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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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빛 매드 픽션 클럽
미우라 시온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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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우 무슨 말을 해야할까? 책을 덮으면서도 나는 왠지 책속의 주인공들에게 미안했다. 어떤 폭력이 되었든 당하는 자도 그렇고 보는 자도 그렇고 모두가 그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세상에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고 부적절한 상황은 많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은 달라진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의 내면을 파헤친다고 큰소리치던 책도 많았고, 우리 인간의 뒷모습을 투시하고 있다는 책도 많았지만 이번처럼 강렬한 느낌으로 전해져오지는 않았던 것 같아 남은 여운이 너무 가슴 아프다. 나 역시도 그렇게 자의가 되었든 타의가 되었든 끝도없는 폭력의 가해자요 피해자였을테니 말이다. 원제가 '光'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검은 빛이라고 써야만 했을까, 생각했었던 나의 마음에 한가닥 동요가 일기 시작한 것은 책장을 넘기면서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의 기억에서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한정된 공간속에서 벌어졌던 아주 짧은 순간들이었지만 너무나 많은 비굴함과 비겁함, 그리고 이기심이 내재되어진 그 기억은 오래도록 현재가 되어 주인공들을 따라다녔다. 일전에도 말했던 기억이 있지만 일본소설이 주는 그 리얼함에 나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느끼게 된다. 현재의 감각이 리얼하다는 말이다. 피해가려고 하기 보다는 먼저 부딪히고 파헤쳐보아야 한다는 듯이. 이 작품 역시도 그랬다. 그 숱한 폭력의 겉면만을 핧을 줄 알았지 그것을 쪼개어 이렇다 보여주는 경우는 그리 많지가 않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욕망의 허울은 얼만큼이나 부풀어 오를 수 있을까?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절대적인 이기심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나는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하마섬.. 어두운 바다에서 들려오는 물밀 파도소리와 밤의 숲에서 떨어져 쌓이는 동백꽃이라는 서두만 보더라도 그 섬의 끔찍한 아름다움은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그 붉디 붉은 꽃송이가 떨어져내리는 장면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눈앞에 그려진다는 말이다. 바로 그곳에서 서로가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폭력은 잉태되어졌다. 하지만 그 폭력이라는 것이 미하마섬에만 갇혀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미하마섬을 떠나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곳에서도 그와 똑같은 폭력은 재현되어지는 까닭이다. 그런 모든 것들이 나에게 직접적인 접촉을 해오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모른척하거나 외면해버린다. 나와는 상관없다는 이유만으로.. 끼어들어서 얽히면 공연스레 귀찮아지는 그런 것들을 우리는 용납하기 싫은 까닭에..

아버지의 생에 대한 불협화음이 일구어낸 육체적인 폭력의 피해자였던 다스쿠는 어린시절부터 누군가의 절실한 관심을 그리워했다. 날마다 멍이 들었고 상처가 났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말하려들지 않았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그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가장 가까웠던 노부유키형에게 매달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반면 그런 다스쿠가 싫었던 노부유키는 그에게 한자락의 마음도 용납해주지 않았다. 어느날 밤 쓰나미가 밀려오고 모든 것을 휩쓸어갔던 그 쓰나미를 계기로 미하마섬의 폭력은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잠시의 공백기였을 뿐, 그들의 삶을 향한 폭력의 고리는 새로운 모습으로 엮어지게 된다.

<도가니>라는 작품을 얼마전에 읽었었다. 보호해줄만한 울타리 하나 없던 곳에서 아무런 대응책도 찾지 못한 채 그저 당하고만 있던 아이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되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은 그 울타리를 조여가며 올무처럼 그들을 옭아매었다. 그것도 일종의 폭력이라면 폭력일 것이다. 육체적인 폭력과 그 육체적인 폭력에 맞서지 못한 채 바라보기만 했던 사람들의 또다른 폭력. 바라보기만 했던 시선과 마음, 그것을 정신적인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는 그렇다라고 단언을 하고 있다. 드러나지는 않아도 그것은 분명 폭력이라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진행되어지는 폭력은 무수히 많다고.

단지 사랑을 위해서 살인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게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고 이용하고 또한 배신을 한다. 노부유키에게 '살인자'라는 또하나의 이름을 붙여주었으면서도 끝내 자신의 삶을 위해서만 노부유키를 필요로 했던 미카의 존재. 순수와 영악이라는 단어로 이름을 바꿔보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 사이를 오가는 다스쿠의 역할이야말로 흔들리는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편으로 선을 칭송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끝없이 악과 거래를 하는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이 오래도록 아버지의 폭력앞에서 길들여져 버린 다스쿠와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자신이 헤쳐나오기보다는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손을 내밀어 끌어내 주기를 원하는 아이러니라니.. 하다보해 동정심만이라도 발휘해주기를 기대하는, 그리하여 내가 이렇게 폭력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하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그런 다스쿠조차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카는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하나의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태어나고 자라면서 안된다, 하지마라의 연속적인 반대와 부딪히면서도 우리는 어른이 되었을 때의 화려한 비상을 꿈꾼다. 두번째 살인을 하고 미카와 완전한 하나됨을 꿈꾸었던 노부유키에게 미카는 이렇게 말했었지. 이제 더 이상 나한테 아무것도 원하지마. 그날 밤부터 원해도 아무것도 못 느끼니까. 날 좀 내버려둬.. '네가 '부탁'한다고 해서' 라는 말로 자신을 정당화시켜버리고 싶었던 노부유키의 꿈은 허상이었을까? 이미 지나간 기억을 붙잡고 살기엔 우리 삶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것도 어딘가 미심쩍은 것을 그것만은 아닐거라고 부정하는 일이 연이어진다는 것은 정말이지 힘겨운 일이다. 미카를 향한 노부유키의 마음과 노부유키를 향한 다스쿠의 마음이 같은 것일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꿈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과 현실의 인정과 안녕을 바라는 또하나의 시선은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노부유키가 두번째 살인으로 다스쿠를 묻어버렸을 때 우리의 가슴속에는 역시 善 아니면 惡만 존재하는 거라는 섬뜩한 결론과 마주하게 된다. 가슴속에 품은 것은 선일지라도 끝없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악의 존재감을 우리는 어쩌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필요악'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세상속에 떠도는 수많은 '필요악'을 우리는 거부할 수 없을게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일게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일 수도 있을게다. 정말이지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그런 '필요악'의 존재를 이 책을 통해서 가슴 쓰리게 인정해야만 했다. 어쩌지 못하는 것들.. 아니 어떻게 해 볼 수는 있으나 우선적으로 피하고 싶은 것들.. 내가 아닌 남이 나서주기를 원하는 그 모든 것들이 어쩌면 '필요악'일 것이다. 참 잔인하다. 이렇게 속까지 파헤쳐야만 시원할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내면과 마주한다는 것은 역시 불편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원하다. 가끔씩은 이렇게 마음속에 바람 한 점 넣어주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노출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노부유키와 어떻게든 자신을 상승시켜보고 싶었던 미카와 힘겨운 현실속에서도 누군가의  따스한 접촉을 꿈꾸어왔던 다스쿠를 통해서 만나본 우리의 현실은 정말이지 검은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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