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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지음, 박규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2월
평점 :
인간이란 일상생활을 통해 학습되는 존재 (-26쪽)
자기만 옳다고 믿는 그런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생활 양식을 알게 됨으로써 오히려 자기 자신의 문화를 더 깊게 사랑할 수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유쾌하고 풍부한 경험의 기회를 스스로 차단해 버린다. 지나치게 자기방어적인 태도로 인해 그들은 다른 나라에 대해 그들 자신의 특수한 해답을 강요하는 것말고는 다른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30쪽)
일본인들은 어떤 하나의 행동 방침에 모든 것을 걸며 만일 그것이 실패할 경우에는 다른 방침을 취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했다. (-72쪽)
일본인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각자 알맞은 자리를 취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일본인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계층적 위계질서에 대한 그들의 신뢰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우리의 신념과는 완전히 다르다. 일본인은 일본 국내의 문제뿐만 아니라 국제 관계의 문제도 계층적 위계질서의 관점에서 바라보려 한다. 지난 10여년간 그들은 일본이 국제적 위계질서라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여겼다.(-75쪽)
종교적 고행에 몸을 바친 일부 종교전문가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일본에서 종교란 결코 엄격하고 금욕적인 관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물론 일본인들은 신사와 사찰을 참배하는 종교적 순례에 열성적이지만 이는 또한 휴일을 즐기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129쪽)
일본의 조상숭배는 최근의 조상에만 한정되어 있다. 일본인은 누구의 무덤인지를 확인하려고 매년 묘비의 문자를 고쳐 쓰지만,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미 사라져버린 조상의 묘비는 치워버린다. 또한 그런 조상의 위패는 불단에 안치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일본인은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사람외의 조상에 대한 효행은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들은 오직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집중한다. (-173쪽)
일본인에게 영원불멸의 목표는 명예다. 이를 위해서는 타인에게 존경받는 것이 필수다. 이와같은 목적에 도달하고자 사용하는 수단은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취할수도 있고 버릴수도 있는 도구일 뿐이다. 일본인은 상황이 바뀌면 재빨리 태도를 바꾸며 그것을 서구인처럼 도덕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자기 욕망의 만족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은 육체적 쾌락을 좋은 것, 함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쾌락 추구가 가치있는 것으로 존중받는다. 하지만 쾌락은 그 적절한 자리에만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생의 중대한 영역을 침해하거나 침입하도록 놓아두어서는 안된다. (-234쪽, 241쪽)
각자의 영혼은 본래 새 칼이 그렇듯이 덕의 빛을 발한다. 다만 갈고 닦지 않아 녹이 슬수는 있다. 이와 관련해 일본인들은 '자기 자신의 몸에서 나온 녹'은 칼의 녹과 마찬가지로 좋지 않다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사람은 칼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격이 녹슬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하지만 설사 녹이 슨다해도 그 녹 밑에는 여전히 빛나는 영혼이 있고 그것을 다시 한번 갈고 닦기만 하면 본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268쪽)
일본인은 각자의 생활이라든가 혹은 자기가 아는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판단을 내린다. 즉 그들은 의무의 법도를 저버리고 개인적 욕망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을 약자로 판단한다. 그들은 모든 일을 이런 식으로 판단한다.(-278쪽)
일본인은 죄의 중대성보다는 '하지恥'의 중대성에 더 무게를 둔다. 일본인은 '하지恥'를 도덕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즉 '하지'를 느끼기 쉬운 인간이야말로 모든 율법적 선행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타인이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지 추측하면서 그 판단을 기준으로 자신의 행동 방침을 정한다. (-295, 296쪽)
일본에서는 '붓다'를 '호토케佛'라고 부른다. 불교에서 '붓다'란 원래 '깨달은 자'를 일컫는 말이지만 일본인들은 그런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희석화시켜버리고 그것을 주로 조상신의 의미로 사용한다. 이점에서 '붓다'와 '호토케'는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양자의 결정적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히 '붓다'와 '호토케'를 동일시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본문에 나오는 '붓다'는 '호토케'라고 고쳐 적어야 한다. (-332쪽 각주편)
일본인들은 나이에 따라 그때그때 상황에 적합한 행동을 지향한다. (-368쪽)
오미야마이리お宮参り: 신사참배에 관하여...
통상 남아는 생후 32일, 여야는 33일이 지난 다음 어머니와 할머니가 아기를 안고 신사에 참배해 아이의 건강한 발육과 행복을 기원한다. 한편 아이가 3세(남여공통), 5세(남아), 7세(여아)가 되는 해의 11월 15일에도 신사를 참배하는데 이런 관습을 '시치고산七五三'축하연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일본에는 성인이 된 후 남자는 25세와 42세때, 그리고 여자는 19세와 33세때 액땜을 위해 신사를 참배하는 관습도 있다. (-380 각주편)
종래 <국화와 칼>에 대한 비판자들은 베네딕트가 군국주의자들이 내세운 이데올로기에 근거해 일본문화를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해왔다. 하지만 러미스는 아예 베네딕트가 고의적이고 의식적으로 국가 이데올로기를 선택했으며, 정보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마치 국가 이데올로기가 과학적 자료인양 묘사했다고 주장한다. 뿐만아니라 러미스는 베네딕트가 일본문화를 설명하는 방식도 전혀 과학적(학문적)이지 않다고 비난한다. <국화와 칼>은 미국식 생활방식을 기준삼아 미국인이 일본인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내세우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일본인에게 무언가 더 좋게 바뀐다는 것은 곧 미국을 더 많이 닮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407쪽 각주편)
오랫동안 바라보기만 했던 책이었는데 혼란한 사회가 기회를 주었다. 역시 시간에 쫓기지 않으며 책을 읽으면 훨씬 더 집중할 수가 있어서 좋다. 일본문화에 대한 고전으로 취급받는다는 책이었다. 그렇다고 정석까지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한번은 읽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심 실망하기도 했다. 기대를 너무 크게 한 탓도 있었겠지만 일단은 이 책이 쓰여지게 된 동기나 그 시대적 배경을 알고나니 어느정도는 그 실망감이 이해되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껄끄러운 점도 없진 않았다. 그 당시에 한국이란 나라의 존재감이 얼마나 미미했는지를 다시한번 느끼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일본이란 나라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고 단순히 인터뷰만을 통해 한 나라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었던 까닭이다. 많은 일본인의 말을 차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점에서도 너무 편협적으로 판단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크게 다가왔다. 그렇게 막혔던 속을 마지막 각주편(-407쪽의)에서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솔직히 각주가 따로 있는 구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책을 읽는데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만큼은 각주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어찌되었든 한번쯤을 읽어볼 만한 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도 우리나라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연구를 엄청나게 했다는 글을 본 적 있다.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지배하기에 조금은 수월해지는 까닭이다. 살아보지 못한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