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수상록 범우문고 122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최혁순 옮김 / 범우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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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범우문고 몇 권을 샀습니다. 부피가 적어 이동중에 쉽게 읽을 수 있고 다른 책들을 보면서 사이사이에 짬짬이 기분 전환을 겸해 읽을 수 있으며, 가격도 매우 저렴하여 가격 대비 질적인 측면에서 단연 으뜸이라 생각해서였습니다. 쇼펜하우어 수상록,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프로타고라스, 손자병법, 이태준의 문장강화(개정판), 박제가의 북학의를 샀습니다. 그 중 어제 《쇼펜하우어의 수상록》을 읽었습니다.

문고판인 까닭에 그가 남긴 에세이 중에서 일곱 편만 골라서 담았습니다. 사색, 독서와 서적, 저술, 여성, 자살, 예술, 죽음 등 일곱 가지의 주제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에세이를 두고 '독일어로 쓴 글 중에서 최고의 명문'이라고 평한다는데 번역본인 이 책만 봐서는 그것을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각각의 주제에 대하여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화법은 그의 사상을 간결하고도 확실하게 전달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이발소에 가서도 결코 자신의 목덜미에 면도날을 대지 못하게 하고, 잘 때는 권총에 탄환을 재어 침대 옆에 두고 잤다는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 흔히 염세주의(厭世主義) 또는 비관주의라 함은, 세상이나 인생에 실망하여 이를 '싫어하는' 생각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그의 글을 통해 단순히 세상을 '싫어한다'는 증거를 포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세상과 인생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둘로 보지 않는다는 생각에 가깝습니다.

〈자살에 대하여〉에서 그는, 자살은 죄악이 아닐 뿐더러 죽음은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최후의 피난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분명히 합니다. "자살은 고난에 찬 이 세상 속에서 참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상적인 구원만을 받는 것이므로, 자살은 최고의 윤리적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도피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는 성직자들이 자살을 죄악시하는 그 근거나 논리가 매우 졸렬함을 비판하는 것이지, 자살 그 자체를 미화하지는 않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되 자살은 결국 도피라는 그의 생각에서 '염세'의 징후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하여〉를 읽으니, 그가 염세주의자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초월한 사상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과 죽음은 자연에게 전혀 파격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때문에 상심할 필요는 없다. 우리도 자연의 일부이니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습니까? 이 말만 놓고 보자면 그의 생각이 노장사상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비록 개체(인간 개인)의 죽음으로 개인의 의식은 일단락되지만 "죽음의 손에 멸망된 것은, 거의 형상뿐"이며 "우리의 한정된 빈약한 인식 능력은 시간 속에서 그 그림자와 이 형상을 의식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가을에 나뭇잎이 떨어지면 봄에 새 잎이 돋아나지만, 이런 사실로써 위로받지 못하고 '그 나뭇잎은 내 것이 아니다'라고 서글퍼하는 비유를 하면서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충고합니다.
"아, 미련한 나뭇잎이여! 너는 어디로 가느냐? 그리고 다른 잎사귀들은 어디서 오는가? 네가 두려워하는 허무의 심연은 어디 있는가? 너는 차라리 자기 자신이 나무 속에 숨어서 끊임없이 작용하고 활동하는 힘 속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 힘은 모든 나뭇잎의 세대를 통하여 생사에 구애받지 않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생사에 구애받지 않음이라! 이것이 과연 세상을 '싫어하는' 염세주의자의 생각인가요? 그렇다면 왜 노자와 장자를 두고 염세주의자라고 하지 않는 걸까요?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노장사상이라 하듯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생각을 쇼펜하우어 사상이라 하면 안 되는 걸까요?

〈사색에 대하여〉와 〈독서와 서적에 대하여〉에서도 깊이 새겨둘만한 말들이 많았습니다.
"수량이 아무리 많더라도 정리가 되지 않으면 장서의 효용도 의문스러우며, 수량은 보잘것없어도 정리가 잘 된 장서라면 훌륭한 효과를 거두는 것과 같이 지식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진리를 터득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여러 가지 지식이나 진리와 결합시키고 비교할 필요가 있다. 이 단계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완전한 자신의 지식이 되고 그 지식을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말이죠^^.
그러나 그는 시종일관 "독서는 사색의 대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독서에서 얻는 것은 남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나 남이 벗어서 버린 헌 옷에 불과하며, 오로지 스스로 생각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색의 중요성을 이해한다고 해도 좀 지나치리만치 독서의 '불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최고의 독서법은 "읽지 않는 기술"입니다. 양서를 읽기 위해서는 악서를 읽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몸을 해치듯 다독으로 부지런한 사람은 점차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합니다. 독서를 즐겨하는 사람이라면 이 말의 뜻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책 읽는 것 자체를 게을리하는 사람들이 이 말로써 위안을 얻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통찰도 결국은 독서와 이에 따른 깊은 사색에서 얻어진 것일테니까요.

쇼펜하우어를 성인(聖人)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역사상 아직 염세적 사상을 가진 성인은 없었습니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그의 생각 또는 주장과는 달리 실제 자신은 명예욕과 질투 또는 시기심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대학에서 헤겔에 맞선 강의를 개설하고 실패하고 저주스러운 욕설을 퍼부은 것만 봐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그가 생사의 구애됨을 거부하였듯이, 아침상을 받고 탁자를 향하고 있는 자세로 조용히 그리고 누구의 간호도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토록 세상의 주목을 받고 싶어했던 그의 바람은, 훗날 고서점에서 그의 책을 우연히 발견한 니체로 인해 실현됩니다.

*
여성 혐오주의자

쇼펜하우어를 두고 염세주의자라고 못 박는 것에는 좀 문제가 있는 듯 하지만, 그를 '여성 혐오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한 것 같습니다.
〈여성에 대하여〉에서 그는, "궁극적으로 여성은 종족 보존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여성은 날 때부터 적의를 품고"있는, 이른바 열등성이며 모든 면에서 남성에게 뒤떨어지는 제 2의 성이라고 규정합니다. 혹시 이 여자를 아름다운 성이라고 일컫는다면 이는 "성욕으로 말미암아 지성이 흐려진 남자들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아니 할 말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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