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내 생일입니다.
이미 한참 전에 회사 내 책상 달력에 빨간 글씨로 써두었던지라 그냥 지나칠 리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늘 바라보면서도, 그 날이 오늘인지는 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 제가 써놓고도 헷갈리는 표현입니다. ㅎ) 그렇게 그동안 시간은 제멋대로 가고 저도 정신없이 지냈습니다.

# 선물

아내 선물을 뭘로 살까, 고민을 했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습니다. 딱히 지금의 아내 뿐만 아니라 과거 그 누구에겐들 선물하고 감사를 표하고 칭찬을 하고... 뭐, 이런 것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아내와 가정을 이루고 산 지도 벌써 7년인데, 여전히 이런 기념일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저란 놈을 생각해 보건데, 뭐 깊게 생각할 것도 없지만서두, 능한 잡기 하나 없고 어디 감동 줄 만한 이벤트 하나 기획하지 못하는 놈입니다. 어휘로 보나 어투로 보면 (각고의 노력 끝에) 저를 경상도 놈이라고 보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이런 면을 보자면 여전히 영락없는 '경상도 보리 문디'입니다.

회사에는 여자를 대하는 것 만큼은 자타 공인 프로페셔널이 한 사람 있습니다. 곧 장가갈 총각이구요, 물론 아무 여자한테나 껄떡대지는 않습니다. 한 1년 넘게 제가 봐온 바로는 그 '공인'을 어디서 받았는지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어쨋든, 저보다는 한 수, 아니 백 수 위인 것만은 틀림 없습니다.
그 총각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 참~ 속옷을 사가래두요! 제발 시키는 대로 좀 해봐요. 손해 안 본다니까요.' 나 참, 누가 뭐랬남...

땡퇴근을 해서 집으로 오는 전철 안에서 이리저리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떤 선물이 좋을까... 정말 속옷을 사? 8호선을 타다가 내려 2호선으로 갈아타고, 다시 성북행 국철을 타고 내릴 때까지 고민... 하다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안 산다.

그리고 동네 전철역에서 내려 근처 빵집으로 갔습니다. 꽃집은 통과(집에 장미꽃 몇 송이 있는데 더 가져가봐야 처치 곤란. 그리고 오늘의 목표는 최대한 일찍 들어가는 것!).그리고 제일 작은 케익 하나 샀습니다. 케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그래서 차마 초 하나 달라고 하기도 뭣한 손바닥만한 케익을 사들고 집으로 왔습니다. (결국 초를 달라는 말은 못했습니다. 한 두개 필요한 것도 아닌데...)

아내가 문을 열고, 저는 조막만한 케익 하나 내밀며,
"이번에 선물 따로 준비 못했어. 그래도 내 맘 알지?"

"그~으럼, 어여 들어와요. 오늘 덥지?"

이것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 끝.

# 외식

어제 약속하기로는, 오늘 저녁은 나가서 근처 스파게티 전문점에서 스파게티를 먹으려 했습니다. 제가 그런 이상한(?)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아내가 자주 먹을 일이 없었던지라.
그런데 오늘따라 날씨가 유난히 덥고, 게다가 딸의 몸 상태가 그리 좋은 것 같지 않아, 피자 한 판 시켜 먹는 것으로 오늘의 外食은 偎食으로 대체.
외식도 끝.
* 偎 : 가까이할 외, 사랑할 외. 고로 偎食은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이서 먹는다. (물론 방금 지어낸 말)

# 행복한 변명

쓰고 보니 웃깁니다. 제 못난 자랑을 이렇게 배실배실 실없이 할 수 있다니. 오늘 새벽까지 봤던 고우영의 만화 속 못난이 유방처럼 그렇게 웃으면서 글을 쓰다니. 아마 맘 속으로부터 행복해서겠죠?

이 즈음해서 저를 좀 삐딱하게 바라보는 눈길이 느껴집니다. 저 위에 썼던 확인 불가능한 '공인' 총각의 눈이 그러할 것 같고, 올해 시집을 간 두 명의 회사 동료의 눈도 그러할 것 같고...

그래서 변명을 좀 할까합니다.

오랜만에 집에 일찍 들어와, 정말 오랜만에 피자 한 판 시켜 먹은 것. 그냥 마음으로 축하한다고 말한 것. 진심으로 받아 준 것. 이것이 행복합니다.

큰 자극에 익숙치 아니하여 오히려 작은 울림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우리 부부가 사는 법 #1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