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모험
이진경 지음 / 푸른숲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입니다. 이번 주에 독서노트를 처음 씁니다. 일주일 내내 독서노트를 안 쓴 적이 거의 없었는데 말입니다.
지난 주말에 고향에 다녀온 후로 시간을 통 낼 수 없었습니다. 이번 주에는 매일 저녁 사람을 만나느라 - 그리고 술을 마시느라 제대로 책 읽을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이번 주에 글을 쓰지 못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손에 잡히는 쉬운 책을 읽고 정리할 수도 있었으나 이제 글을 읽고 쓰는 데 조금 더 신중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 홈페이지를 방문해주시는 어느 분께서 제게 "無求於外 各修其內而己"를 다시 일깨워주셨습니다. 밖에서 구하지 말고 자기 내면을 닦으라는 말입니다.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으나 곁길로 샐 것 같아 이만하겠습니다. 빈 수레의 요란함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여하튼, 이번 주 내내 단 한 권의 책을 여유있게 읽었습니다.

누가 제게 "지금까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이냐?" 또는 "가장 인생에 도움을 준 책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함이 없이 《철학 에세이》라고 말합니다. 90년 여름에 처음 읽은 이 책이 저에게 준 감동은 이루 표현할 수 없습니다. 굳이 단 하나의 이유를 대라면, 저에게 처음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일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자극을 받아 '정통' 변증법적 유물론 서적을 여럿 봤으나, 《철학 에세이》만 못했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역사적 지식의 다발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내 머리로 생각하기를 배우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여타의 철학 서적은 《철학 에세이》만큼의 정신적 충격을 주지 못했습니다.
《철학 에세이》가 벌써 개정 4판이 나왔습니다. 과거에는 의식화 입문서로, 지금은 논술 참고서로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과거 저자를 보호하기 위해 '편집부 지음'으로 출판했었는데, 지금은 원 저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저자는 조성오 변호사. 조 변호사가 80년에 학교(서울대 법대)에서 제적된 후 81년부터 야학을 하면서 쓴 책입니다. (자세한 얘기는 마침 오늘자 한겨레 《한겨레 책·지성 섹션》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 바로가기)

철학책을 읽는 것은 상당히 즐거운 일입니다. 통념을 의심하고, 나의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만드는 훈련을 하게 합니다. 훈련은 곧 습관을 만드는 과정이니, 철학은 사람이 살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만드는 '좋은 습관'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좋은 책을, 한동안 전혀 읽지 못했습니다. 심적으로 너무 바빠서였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탓이겠지요.
비록 후회하지는 않지만 '실용적 글읽기'를 어느 정도 해오다 보니, 마음 한 구석에 무언가 충족되지 못한 욕구가 늘 있었습니다. 실용적 글읽기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문·사회과학서의 도움이 절실함을 느낍니다. 당분간 인문·사회과학서, 그 중에서도 철학과 역사에 대한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독서노트를 쓰는데, 정작 책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시간만 가버렸네요. 이렇게 죄송할 수가^^

이진경의 《철학의 모험》을 읽었습니다. 이진경, 하면 1987년에 그가 쓴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 떠오릅니다. 아직 한 번도 끝까지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저의 지적 토양은 척박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 책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최근에 헌 책방을 뒤져 다시 그 책을 손에 넣었습니다. 본명인 박태호보다 이진경이라는 필명이 더 많이 알려졌으며 거의 본명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문에서조차 '산업대 이진경 교수'라는 식으로 필명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이진경에 대한 소개는, 본인이 직접 소개한 http://www.transs.pe.kr/member/ljk.htm 문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철학의 모험》은 근·현대 철학 입문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근대철학과 현대철학의 대표적인 사상가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렇게 말하면 무척 따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진경의 다른 책 《철학과 굴뚝청소부》도 그러하지만, 철학이 이진경의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면, 말랑말랑해져 나옵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으로 고형분을 먹기 위해 밥 대신 이유식을 만들 듯이, 그는 철학 입문자를 위한 '철학의 이유식 전문가'입니다. 철학사를 쉽고 말랑말랑하게 풀어내는 그의 능력은 탁월합니다. 이 말을 이진경의 철학이 초보적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은 없겠죠?

책의 구성이 참 재미있습니다. 1부에서는 장자와 데카르트, 스피노자, 사르트르가 염라국에서 만나 장자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근대 철학의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장자는 2,000년 동안 천당도 지옥도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황 설정도 기발하고, 근대 철학의 주제를 알기 쉽게 풀어내는 저자의 능력은 더욱 탁월합니다.
2부에서는 우화의 거장 이솝이 등장합니다. 이솝이 우화철학의 창시를 꿈꾸며 영국의 경험주의자들과 만나 인터뷰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에 베이컨, 로크, 버클리, 흄이 등장합니다.
3부에서는 칸트의 제자가 '스스로 생각하는 로봇'을 만들기 위해, 흔히 말하는 '독일철학'의 거장들을 만나 의견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칸트, 헤겔, 포이어바흐, 마르크스가 등장합니다.
4부에서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얘기를 패러디하여 현대 철학의 주제들을 소개합니다. 후설, 프로이트, 니체가 등장합니다. 가히 '의심의 대가'들입니다.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입문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분량이 좀 되어 출퇴근길에 빠르게 '읽어치우기'에는 부담스러울지 모르겠으나, 차근차근 읽어서 결코 후회하지 않을 책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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