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나를 포함하여 우리 가족은 문화 생활을 거의 하지 않는다. TV 시청 시간은 평일에는 거의 없고 주말이라도 1시간이 채 안 된다. 영화는 일 년 내내 두 세 편 볼까말까 한다. 놀이 공원? 그렇게 복잡한 곳은 안 간다. 쉬는 날이면 그저 집에서 또는 얼마 전부터 시작한 주말 농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전부다. 이렇게 살면 집에 쫓겨난다고 걱정하지는 마시라. 나 뿐만 아니라 아내도 마찬가지다. 혹시 영화를 볼 기회를 어렵사리 만들더라도 볼만한 영화를 고르기가 만만찮다. 액션도 싫고 공포 영화는 절대로 안 되고 무섭거나 우울한 영화는 삼간다. 그러면 남는 건 단 하나, 로맨틱 코미디 정도다. 힘들게 시간 냈는데 무섭거나 우울해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게 우리 부부 생각이다. 한심하다고 욕하지는 마시라. 사람마다 사는 법이 제각각이니 그러려니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지지난 주엔가 아파트 앞 비디오 가게를 지나다가 처음으로 비디오를 빌려봤다. <그때 그사람들> <황산벌>을 빌렸다. 한 편에 500원씩. 이렇게 해서 가게가 운영되는지 괜한 걱정이 앞섰다. 기존에 있던 비디오 가게 바로 앞, 정말 몇 미터 되지도 않는 바로 앞에 큰 가게가 하나 더 생겼다. 그래서 가격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정이야 딱하지만 그날 비디오를 재밌게 본 기억이 있다.
오늘은 <말죽거리잔혹사>를 빌려봤다. 이미 볼 사람은 다 봤겠지만, 이미 말했듯이 요근래 나에게는 문화혁명 기간이나 마찬가지다. 한 번 시작하면 또 웬만큼 오래 지속할 자신이 있다. 매주 적어도 한 편씩은 봐야겠다. 그동안에는 시간이 아까워 보지 않았을 뿐, 영화 자체를 재미 없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무대는 1970년대 후반 서울 강남 말죽거리에 있는 정문고등학교다. 70년대 후반이니 유신 말기다. 영화 속의 학교는 학교가 아니라 군대다. 학생들은 교문에서부터 선배에게 '충성' 경례를 하고, 복장이 불량하여 야구 방망이로 얻어 터진다. 욕은 생활 용어이고 공부하는 학생의 모습은 없다. 도색 잡지를 빌려주고 돈을 버는 놈과 여학생을 보면서 사귀고 싶다가 아니라 '먹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놈들이 주인공들이다. 엽전, 꼴통, 쓰레기, 이 새끼, 아메바는 이런 주인공들을 대하는 교사들의 호칭법이다.
이곳에 현수(권상우)가 전학온다. 그 시대 다들 그랬겠지만 이소룔을 무척 좋아한다. 아버지는 태권도장 관장이고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온다.
대개가 그러하지만 이 영화도 남녀의 사랑 얘기가 빠질 수 없다. 현수는 은주(한가인)를 보자마자 한 눈에 반한다. 겨우겨우 용기를 내어 비오는 날 우산을 씌워주는 '역사'를 이루지만, 학교 짱 우식(이정진)은 너무 쉽게 그녀 가까이에 다가간다. 우식은 학교짱 자리를 놓고 선도부 종훈(이종혁)과 싸우고 학교를 쫓겨난다. 그리고 현수가 그렇게 좋아하는 은주와 함께 가출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현수는 이래저래 패배자다. 은주마저 자신을 배신(?)하고 사라져버린 것을 안 순간 그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드디어 '목표'가 생긴다. 이소룡의 절권도를 익히며 폭발의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어느날 선도부 종훈과 한판 대결을 벌이고 장엄하게 학교를 버린다. 1년 후 종훈과 은주는 버스에서 만난다. 짧은 대화를 나누고 그들은 헤어진다.

감독은 무얼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나의 이런 자세가 문제다. 그냥 재미로 보면 될 걸, 그리고 느끼면 될 걸, 왜 따지는가....)
나는 8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때는 저만큼은 아니었다. 영화 속의 학교는 아수라 그 자체다. 영화 속의 체벌은 사라졌고 학교 내의 군인도 이미 사라졌다. 그런데 왜 그 때 그 이야기를 하는 걸까? 껍데기는 사라졌지만 아직 아니라고?
모르겠다. 알듯말듯하다.
그러나 이런 복고풍의 드라마를 보면 한결같이 드는 생각이 있다.
지금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저 시절 저 장면, 바로 얼마 전의 현실이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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