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젊은 날의 깨달음
조정래.홍세화.정혜신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5월
평점 :
대학 다닐 때는 모든 것이 즐거웠던 것 같습니다. 일년 내내 술을 마셔도 즐겁고, 아니 술을 마실 수 있어 즐거웠고, 전공에 구애됨이 없이 아무 책이나 읽을 수 있어 즐거웠고, 제도 교육을 통해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사실과 가치에 눈을 뜰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가치있는 변곡점變曲點은 대학생활을 통해서 찍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즐거웠던 시절로부터 유래된 습관 중에서 일부를 혁신해야할 때가 됐습니다.
술에 대한 나의 태도와 습관이 그것입니다.
술은 나와 남의 '관계'를 맺어주는 데 일등공신이었습니다. 무미무취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갈수록 0에 수렴하는 데 반해, 대학에서의 기억이 가치와 재미 모든 면에서 가장 많이 남는 건 아마도 술로 맺어진 인간관계 영향이 매우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술의 즐거움이 '아는 것'의 즐거움만 못함을 느낍니다. 술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갈수록 줄어듭니다. 술이 주는 이미지의 핵심은 '인간적'이라는 것인데, '인간적'이라는 말에는 대단히 감성적인 요소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술이 주는 감성의 특징은 과장誇張입니다. 과장은 종종 현실과의 괴리乖離를 낳습니다. 그 괴리를 타인이 자주 느낄 정도가 되면, 괴리가 불신의 관계를 만듭니다. 약이 지나쳐 병을 키우는 꼴입니다. 자연 치유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습관적인 약은 의존성만 키우게 됩니다. 의존성은 나약함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여기 술에 담을 쌓고 오로지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20여년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달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겨우 세끼 밥 먹을 밑천을 장만하기 위해 젊은날을 보내야했던 소설가 조정래는, 나이 마흔에 미친듯이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유형의 땅>을 썼고, <불놀이>를 썼고, <태백산맥>을 시작했습니다. 흔적 없이 사라진 상처투성이 젊은 세월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글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인생이란 연습도 재공연도 할 수 없는 단 1회의 연극"이라고 규정한 조정래는, 그로 부터 20여년 동안 대하소설만 연달에 세 편을 써냈습니다. 20년을 술을 멀리하고 자신을 글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대하소설을 연달에 세 편씩 써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마음먹음의 실천 뿐이다. 그런 미련스러운 노력 말고 무엇이 우리 인생을 책임질 수 있고, 우리 인생에 빛을 줄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타고난 재능보다는 미련스러운 노력을 믿고자 했다."
인물과 사상사에서 펴낸 <젊은날의 깨달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외에도 정혜신, 박노자, 고종석, 손석춘, 장회익, 박홍규, 김진애, 홍세화 - 이름만 들어도 익히 알만한 이들이 젊은 날을 돌아보며, 인생을 새롭게 발견한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방면에서 홀로 일가를 이룬 이런 분들의 글을 읽으면 숙연해집니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 복판에서 조용히 열정이 끓어오릅니다. 쉽게 확 타버리는 어린날의 열정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이 돈오頓悟의 느낌인지 점오漸悟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평생을 두고 매진해야할 가치를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