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추고 사는 즐거움
조화순 지음 / 도솔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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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조화순 목사님하면 떠오르는 것이 동일방직 사건입니다. 6,70년대의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조 목사님을 빼놓고는 얘기를 할 수가 없다는 것도 잘 아실 것입니다.
여성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던 동일방직으로 시작하여 노동자들과 함께 '낮은 곳'으로만 찾아 다녔습니다. 마치 예수가 최후에는 선동가로 몰렸듯이, 그렇게 선동가로 살아가고 싶다고, 서슬 퍼런 안기부 지하실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렇게 18년을 지내온 산업 선교의 현장을 떠나 또 다른 현장, 농촌교회로 내려가 지역사회에서 교회가 할 바를 실천하고, 또 13년이 지나고 이제는 홀연히 목회도 목사라는 이름도 버린 채 강원도 봉평 태기산 자락에 있는 750m 고지, 아무도 없는 산속에 흙집을 짓고 산 지 십여 년이 되었습니다.
왜 산 속으로 들어갔냐는 물음에는 세상이 변한만큼 자신의 역할도 바뀌어야 한다고, 그래서 '더 낮은 곳'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로 대신합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늘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신 예수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살려고 흉내라도 내는 것이 목회자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그렇게 살아오다 이제 운동의 종착점으로 "땅의 문제와 환경의 문제와 생명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이 책은 불꽃같은 삶을 산, 지금은 칠순이 된 백발의 처녀가 들려주는 삶과 자연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이 글은 마치 맨밥에 상치쌈 같습니다. 말의 기교같은 양념도 없고 오로지 자신이 살아오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저 옆의 사람이 얘기하듯이 덤덤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글쓴이가 그러했듯이 이 책을 읽는 사람도 마음을 털어버려야 제대로 읽힙니다. 조미료 맛에 길들인 사람은 느끼지 못하는 상치쌈같은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침마다 죽음을 기꺼이 맞이할 주문을 외며 하루를 시작하는 그녀가 문득 수십 년 전의 일화를 떠올립니다.
산업 선교 활동을 하던, 그러니까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도록 노동현장을 누비던 그 때, 갑자기 함석헌 선생이 조 목사를 불렀습니다. 그러더니 화분 하나를 주며 잘 키우라는 말만 하더랍니다. 주위 사람이 툭 하면 끌려가고 심하면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는 판국에 화분에 물을 줄 여유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처음 가져온 상태에서 최대한 버티다가 죽었을 것이라고 회상합니다. 그런 화분을 준 함석헌 선생이 '노망이 걸리지나 않았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지금 산에 들어와 살면서, 벌써 수십년 전의 그 일이 새삼 떠올라 함석헌 선생의 그 뜻을 알 것 같다고 말합니다.
"어디 그런 사람들이 한둘이랴. 각박한 세상일수록 더 여유를 부려야하는 법이다. 그랬더라면 나와 함께 울고 웃으며 무수한 고난과 어려움들을 헤쳐 온 이들을 조금 더 사랑했을 것이고, 그들에게 조금 더 웃음을 줄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저는 제 주위를 돌아보았습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조 목사님은 요즘 "나는 오늘 죽을 수도 있다"는 말과 함께 하루를 시작합니다. 생각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입을 열어 말을 하다 보니 그 의미가 더 각별해졌다고 말합니다.
"물론 오래 살고 싶고 죽고 싶지 않은 것은 인간 본연의 모습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낙엽이 썩어 거름이 되고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듯이 자연 속에서 그런 순환을 체험하고 경험하면서 나는 점점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죽음도 삶의 한 방편이며, 그것이 남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몸으로 느끼게 되니 하루를 여는 의미가 남달라지고 일분 일초가 더없이 소중해진다고 말합니다.

책을 읽다가 그대로 소파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문득 눈을 뜨니 이른 새벽입니다.
'나는 언제쯤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불꽃처럼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이런 모습이 내게도 올까?'
책을 읽으며 내내 들었던 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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