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孔子晩而喜易 讀易…韋編三絶"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풀이하자면, 공자가 늦게 역을 좋아하여 역을 읽는데…가죽끈이 세 번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역은 《주역》을 말합니다.
사전을 들춰보니 위편삼절韋編三絶의 의미를 '독서에 힘씀'을 이르는 말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공자같은 성인도 학문 연구를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읽지 않았습니다. 엉뚱하게도 '늦게 배운 도둑줄이 밤새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생각났습니다. 뒤늦게 정말로 푹 빠질만한 무언가를 만난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리 쉽게 풀이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주역의 깊은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는 그 맛에 공자는 책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탐독했는지도 모릅니다.
공자가 미치듯이 탐독했다는《주역》의 사상을 계사전에서는 단 세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역易 궁즉변窮卽變 변즉통變卽通 통즉구通卽久" -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영복 선생의 풀이에 의하면,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질적 변화가 일어나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여는데 그것이 통通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는 의미에서 구久라는 것입니다.
사는 것은 결국, 궁窮하지 아니하고서는 변變하지 않음을 깨닫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살면서 점점 더 그 의미를 깊이 느끼게 됩니다. 저는 궁窮하다는 것은 '간절함'과 일맥상통하다고 봅니다. 간절하지 아니하고서는 궁窮에 이를 수 없고, 결국에는 변辯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선생이 최근에 낸 《강의》를 읽고 있습니다. 새겨둬야할 말들이 많이 나옵니다. 새로 읽은 문장도 많지만 예전에 한두 번은 봐왔던 명문들을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같은 문장이라도 읽는 이에 따라 그 뜻의 깊이가 달라짐을 느낍니다. 아는 것 만큼 느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문장의 표피적인 의미를 넘어, 행간의 뜻을 읽고, 그 행간의 뜻을 넘어 철학적 의미를 설명할 줄 알며, 나아가 실천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족히 수십년 동안 아니 죽을 때까지 공부해도 따라가기 힘들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딴에도 위편삼절韋編三絶과 궁窮의 의미를 나름대로 생각해 봤으나, 어디 선생의 발끝에라도 미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감히 따라갈 수 없음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글에서 나타나는 선생의 인품에 감화되어서인지 시기猜忌의 마음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생기지 않습니다. 하루의 시작을 선생의 글과 함께 시작한다는 것이 행복할 따름입니다.
오늘 하루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