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길에 지하철에서 어떤 책을 보다가 '흙 속의 진주'라는 표현이 나왔다. 그 책의 주제와는 크게 연관이 없는 그 한 문장을 가지고 갑자기 머리가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머리 속에는 '흙 속의 진주가 과연 진주인가?'라는 엉뚱한 질문으로부터 파생된 온갖 잡다한 생각들로 혼란스러웠다.

흙 속의 진주가 과연 진주인가?

유물론 관점에서 보자면 흙 속의 진주든 물 속의 진주든, 진주는 진주다.
유물론에서 말하는 '물질'이란 인간의 의식 바깥에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이다. 즉 객관적·실재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진주가 어디에 있든 진주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면 진주가 맞다.

그럼 관념론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가?(객관적 관념론인지 주관적 관념론인지 너무 자세한 건 따지지 말자) 흙 속의 진주는 진주라 하기 어렵다.
보는 사람에 따라 흙 속의 진주가 진주일 수도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치론적으로 보자면 흙 속의 진주는 관념론의 그것과 일맥상통한다.
흙 속의 진주는 진주로서 가치가 없다. (그래서 진주가 아니다,라고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돼지에 진주 목걸이'라는 속담을 보면 진주라는 말이 단순히 조개의 분비물 덩어리라는 객관적 실체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식론적으로 보자면 또 어떤가... 인식론에는 가치의 개입이 원천봉쇄된다. 그러므로 진주가 진주인지 아닌지 그것만 중요할 뿐, 진주로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관심 밖이다. 따라서 흙 속의 진주가 정말 "조개류 특히 판새류 조개의 체내에서 형성되는 구슬 모양의 분비물 덩어리로서 주로,탄산칼슘으로 이루어지는데,약간의 유기물이 함유되며 아름다운 빛깔의 광택이 나는 물체"인지 아닌지만 따지면 된다. 그게 맞다면 흙 속의 진주는 진주이고, 아니라면 진주 모양의 다른 어떤 것이 된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흙 속의 진주가 왜 나를 갑자기 혼란스럽게 만들고, 이렇게 얼토당토 않은 철학 사전에서 잠자고 있던 개념들을 끄집어 내도록 만든단 말인가...

아마 퇴근 길에 술 한잔 마신 게 화근이었던 것 같다.
이제 곧 퇴사를 앞둔 두 사람(그 속에 나도 포함된다)이 술 한잔 하면서 주고 받았던 말들이 떠올라서 그랬었나 보다.
흙 속의 진주가 과연 진주인가? - 이것이 원래 물음은 아니었다.
아까 책 속의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과연 흙 속의 진주인가?" - 라고 스스로에게 물었었다.
그런데 술 한잔 하고 오는 길이라, 애초의 그 질문은 온 데 간 데 없고 '흙 속의 진주가 진주인가'라는 이상한 물음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 때부터 내가 대학 시절 공부했던 철학 지식을 모두 끄집어 내면서까지 겨우겨우 스스로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나는 과연 흙 속의 진주인가?"

이 부분에서 나는 자신있게 말해야 한다.
나는 진주가 맞다. 내가 진주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감의 표현이다.
자신감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흙 속의 진주는 결코 진주가 아니다. 객관적으로 실재하지만 아무런 가치가 없다.
흙 속의 진주는 그것이 진주이든, 아니면 지나가던 물고기의 배설물이든 하등의 다를 바가 없다.
진주가 진주이기 위해서는 흙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진주임을 아는 사람에게 보일 필요가 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는데 막상 자세히 보니 진주더라. 그래서 진주는 眞珠다. 진짜 구슬이다. 진주에는 '진짜'라는 가치 개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부서를 옮기거나 회사를 옮기는 것도, 그 결정적인 이유는 항상 이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자꾸만 쌓여가는 내 주위의 흙을 걷어내고 싶어서였다.

흙 속의 진주는 조개의 딱딱한 배설물 덩어리일 뿐이다.
진주는 진주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비록 보다 값비싼 보석 바로 옆자리라도 말이다.

*
한없이 겸손해져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 진주라고 하다니.(쑥스~)
오해하지 마시라,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 것 뿐이다.
칸트의 친구가 와서 '이율배반'이라고 놀려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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