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전 노 대통령은 측근 최도술씨 수뢰 의혹과 관련하여 비장의 각오를 밝혔습니다.(지금 밤 12시가 넘었으니, 벌써 어제네요.) 다름 아닌 대통령 재신임을 묻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헌정 사상 처음이라고 합니다. 어디 우리나라뿐이겠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과거 프랑스에서 어떤 정책적 문제로 인해 한 번 있었다고 하는데, 그 때 아마도 재신임을 받지 못해 퇴진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밤 늦은 시간까지 회사에서 일을 하다 오니, TV 뉴스 첫 꼭지부터 마치 금방이라도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질 듯이 대통령 재신임 기사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한나라당은 비록 겉으로는 부적절한 언사라고 비판하면서도 당장 국민투표를 하자고 합니다. 부적절하지만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 한나라당에 아주 유리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나 봅니다. 부적절하면 그 말을 철회하라고 해야지, 오히려 국민들 모두 투표하자고 큰 소리 칩니다.

지금 이 시기가 어느 때보다 불리하다는 걸 잘 아는 대통령은 스스로 재신임을 묻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이미 노 대통령의 말과 기존 정치권의 반응에서 그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너무나도 가벼운 처사?

한나라당이나 잔류 민주당의 공통된 목소리입니다.
한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국가 원수가 너무나 경솔했다. 늘 그러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경솔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노 대통령은 '정치 개혁'과 '국민 참여'라는 구호를 앞세우며 태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정치 개혁'과 '국민 참여'는 현 정권의 '정체성(Identity)' 그 자체입니다.
정치 개혁을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고 있는 정권에서 측근 비리 문제가 심심찮게 터져나오고 있습니다.(물론 그 액수 면에서 보자면 한나라당과 비교도 안되지만요).
이것이 과연 쉽게 넘어갈 문제일까요? (물론 과거 정권은 쉽게 생각하여 오리발만 내놓았습니다.)

측근 비리가 터지자마자 재신임을 묻겠다는 것은, 앞으로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부정 수뢰 등의 비리는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한 의사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여나 재신임이 부결되어 안타깝게도 대통령직에 물러 나게 되더라도, 앞으로는 권력에 빌붙어 비리를 저지르는 일이 눈에 띄게 줄어들 것입니다.
측근 비리로 인해 대통령이 스스로 책임을 물어 물러나는 새 역사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만약 재신임에 성공한다면, 앞으로 더욱 단호한 비리 척결과 정치 개혁을 하라는 국민의 뜻을 안아 정치 개혁에 박차를 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가벼운 처사이며 경솔한 행동이었을까요?
온갖 비리가 생활화된 기존 정치권이나, 그런 정치권에 익숙한 국민들에게는 충격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적절하지만, 당장 국민투표하자?

한나라당과 잔류 민주당의 즉각적인 논평입니다.
왜 그렇게 경솔하냐고 꾸짖으면서, 그 경솔한 행동에 기름을 붓습니다.
"(헌법상으로 규정된 것이 없어) 재신임의 방법으로 국민투표가 적절할지 모르겠다"는 대통령의 말은 일부러 흘려 듣고, "넓은 의미로 국가 안위에 관한 문제이니 국민투표가 가능하다"고 헌법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정말 부적절하다면 그 말을 취소하고 국정에 보다 더 전념하라고 훈계해야 할 일이지, 이 참에 국민투표까지 실시해서 온 국민을 그 '부적절한 처사'의 희생양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요?

국제 신인도가 추락하여 경제가 어려워진다?

국제 신인도를 추락시킨 장본인이 누군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대통령 취급하지 아니한 것이 누군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럴 것이면, 진작부터 국제 신인도를 생각하여, 깨끗한 정치와 집값 안정을 위한 각종 정책에 협조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정책에 대해 어설픈 정책이라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정작 정치 개혁법을 뒤로 하고 부동산 가격 폭등에 가만히 팔짱끼고 있는 것이 누군지, 최소한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현 상황을 돌파하려는 특유의 승부수?

물론 승부수입니다.
일종의 배수진이지요. 물러날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물러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배수진이니까요.
대통령이 누구와 싸우기 위해 배수진을 친 것일까요?
최병렬 대표 말마따나 '아무 것도 모르는' 국민과 싸우려는 것일까요?
앞으로 남은 4년여의 국정 운영을 깨끗하게 원칙적으로 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온갖 세력들, 낡은 정치 구조와 싸우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마음만 앞서서는 안 된다구요? 좀 더 스킬이 필요하다구요?
지금은 스킬보다는 원칙이 필요합니다. 스킬이라는 스킬은 지금까지 역대 정권을 통해 다 써보았습니다.
원칙은 결코 독선이 아닙니다.



결국, 제가 보기에는, 노 대통령의 재신임 폭탄 선언은, 낡고 더러운 정치 개혁을 대통령 혼자만이 아닌, 정치권과 국민 모두의 책임으로 이관한 것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지,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는 취임 8개월만의 재신임 국민투표가 벌어질지, 그리하여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질지 아직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 사건을 대통령 개인의 '경솔한 행동' 또는 대통령 개인의 특유의 '성격' 문제로 몰아갈 때 우리의 정치 개혁은 앞으로 더더욱 요원하리라는 것입니다.

17년만에 처음으로 '호외'가 나올만한 사건임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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