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륜서
미야모토 무사시 지음, 양원곤 옮김 / 미래의창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흔히 무언가를 이룬 사람더러 ‘일가를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학문이나 예술 분야에만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분야이든지 독자적인 경지나 체계를 이룬 상태를 ‘일가(一家)’라고 합니다. 역사를 보면 일가를 이룬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삶의 지혜와 열정을 배웁니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검술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입니다. 평생 60여 회가 넘는 결투를 벌여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전설적인 무사입니다. 그것도 29살이 되기 전에 이룬 성과이며, 그 후로 천하에 적수가 없어 오직 검도를 통한 깨달음을 얻는 데만 몰두하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몇 주 전에 제자에게 불러주어 기록한 것이 《오륜서》입니다.

당시 결투는 생사를 건 싸움이었습니다. 어느 한 쪽이 불구가 되거나 죽어야 끝이 났습니다. 그러니 미야모토 무사시는 전쟁터에서 살상한 수많은 사람을 제외하고도 최소한 개인적으로 60여 명의 목숨을 빼앗거나 불구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끔찍하리만치 잔인했습니다. 결투에 임해서는 털끝만치의 용서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배울 게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눈으로 과거를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 많은 무사들이 그와 비슷한 삶을 살았습니다. 누구나 허리에 칼을 찼으며 결투를 요청하면 응해야했고 둘 중 하나가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시대입니다. 시대 자체가 야만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륜서》에는 사람을 죽이기 위한 기술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날 《손자병법》이 전투를 앞둔 군인들에게만 읽히는 게 아니듯이 《오륜서》 또한 눈앞의 사람을 칼로 베기 위해 읽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중세의 전투 상황과도 같은 현실을 사는 데 필요한 지혜를 얻기 위해 읽습니다.  





미야모토 무사시가 살던 시대에는 전국을 떠돌며 무예 수련을 하는 낭인(방랑무사)이 많았습니다. 말이 ‘사무라이’지 실은 일자리를 잃은 떠돌이 검객이었습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가 되자 지방 군벌들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평화의 시대가 되니 많은 수의 사무라이들이 일자리를 잃고 전국을 떠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지방 영주의 눈에 띄면 운 좋게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미야모토 무사시도 처음에는 크게 이름을 얻어 좋은 일자리를 얻으려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기 위해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습니다. 술도 마시지 않고 아내도 얻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천일 동안의 연습을 ‘단(鍛)’이라 하고, 만일 동안의 연습을 ‘련(鍊)’이라 한다.”

마침내 그는 하늘 아래 겨룰 자가 없는 경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주역을 보면 궁즉변(窮卽變), 변즉통(變卽通), 통즉구(通卽久)라는 말이 나옵니다. 흔히 하는 말로 ‘궁하면 통한다’는 말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핵심은 ‘궁’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궁’은 ‘곤공하다’는 의미의 궁이 아닙니다. ‘다하다’, ‘궁구하다’는 의미의 ‘궁’입니다. 궁구하다는 말은 속속들이 파고들어 깊게 연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최선을 다하고 속속들이 파고들어 깊게 연구해야 변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변화가 있은 연후에 ‘통’함이 있고, 그 ‘통’함이 오래도록 지속된다는 말입니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진실로 ‘궁(窮)’했습니다. 그리하여 천하제일의 검객으로 ‘변(變)’하고 세상의 이치를 ‘통(變)’했으며, 그것을 《오륜서》로 남겨 오늘에 이르기까지 ‘구(久)’하였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일상이 지루하고 지친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늘 술자리의 푸념으로만 그치고 일상에 변화가 없습니다. 아직 ‘궁’하지 않은 게 아닐까요?





■  《오륜서》를 읽으며 밑줄 그어 놓았던 부분입니다.
  • 병법의 도에서 말하는 마음가짐이란 곧 평소와 다름 없는 마음이다.
  • 몸을 움직이지 않고 쉬고 있을 때라도 생각은 멈추지 아니하며, 몸을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에도 마음은 평온하게 유지한다.
  • 사물을 보는 눈은 '관(觀)'과 '견(見)'의 두 가지 눈이 있다. '관의 눈'이라 함은 상대방의 생각을 간파하는 마음의 눈을 말하며, '견의 눈'이라 함은 육안으로 상대의 현상을 보는 것을 이른다. 싸울 때는 '관의 눈'을 크게, '견의 눈'을 작게 뜨고서 먼 곳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가까운 곳의 움직임을 통하여 대국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 다치(太刀)를 쥐고 싸우든 맨손으로 싸우든 전투에 임해서는 멈칫해서는 안 된다. '멈칫'하는 자세는 죽는 수법이며, '멈칫'하지 않는 것만이 살아남는 수법이다.
  • 겨눔 자세에는 이 다섯 가지밖에 없다. 어느 자세든 자세를 취한다 생각하지 말고 적을 벤다고 생각하라.
  • 이런 까닭으로, 자세는 있되 자세가 없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우선 다치를 손에 들고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지 적을 베는 것이 제일의 목적이다. 만약 나를 베려고 달려드는 적의 다치를 받고, 치고, 찌르고, 감아 치고, 스쳐 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모두 적을 벨 기회임을 알아야 한다. 받거나 치거나 부딪치거나 또는 달라붙거나 스친다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을 집중하여 적을 벨 수 없는 것이다. 모든 행위는 적을 베기 위한 수단이라 생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천일 동안의 연습을 ‘단(鍛)’이라 하고, 만일 동안의 연습을 ‘련(鍊)’이라 한다.
  • 검술의 진정한 도는 적과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며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 사람을 공격하는 방법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혼란스럽다. 결국 사람을 공격하는 일은 모두 같다. 병법을 아는 사람, 알지 못하는 사람, 여자, 어린이를 다치로 내려치는 방법은 결국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 적을 공격하는 것이 병법의 길이기 때문에 그 방법은 많지 않다.
  • 다치의 고정된 자세를 최고로 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고정된 자세'는 적이 없을 때에나 적용된다.
  • 무슨 일이든지 능숙한 사람이 하는 행동은 서두른다는 느낌이 없고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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