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창비시선 279
정호승 지음 / 창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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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한 권 사기가 그 서너 배 값을 하는 경영서 한 권 사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시집 한 권 읽기가 두터운 인문서 읽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600쪽이 넘는 책도 3~4일이면 족하지만 얇은 시집 한 권 읽는 데 일주일이 넘게 걸립니다. 시 한 편 한 편이 정거장입니다. 시 읽기는 마치 가다 서고 가다 서야만 하는 정거장 많은 시골길 같습니다.

다른 책에 비해 시집은 거의 사지도 읽지도 않는 편인데 오늘 보니 정호승의 시집은 그래도 몇 권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샀던 것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인데 그게 벌써 10년 전입니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 <내가 사랑하는 사람> 中에서
문득 10년 전의 제 모습을 그려 봅니다. 그 때 저는 어느 회사에서 나의 몸을 불사르고 있었습니다. 2년 여를 휴일 없이 일을 했고 거개가 별을 보고 퇴근하던 때였습니다. 아내를 만나 결혼한 것도 그 즈음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무작정 회사를 나오게 되었고, 우연히 회사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눈은 작고 간만 유난히 컸던 저는 자본금 7억 원을 1년 만에 날려버렸고, 그제서야 돌아오는 어음을 막고 회사를 살려보려 총판을 돌며 돈을 구걸하기도 했었습니다. 사장이라는 직업은 나에게 과분했습니다. 너무나 일찍 주어진 기회를 그렇게 너무 일찍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과욕하지 않는 법을 배웠으니까요. 그 이후로도 줄곧 좋은 사람을 만나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사람을 알고 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나를 가르치기 위한 학교였고 저는 그 학교에 다니는 것이 늘 행복했습니다. 넘어짐도 일어서기 위함이고 넘어지려 하지 않으려 발버둥칠수록 더 넘어진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넘어짐도 일어섬도 나를 위한 수양의 과정이었습니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만 꼭 넘어진다
    오히려 넘어지고 있으면 넘어지지 않는다
    넘어져도 좋다고 생각하면 넘어지지 않고
    천천히 제비꽃이 핀 강둑을 걸어간다

    (...)

    아직도 넘어질 일과
    일어설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일으켜세우기 위해 나를 넘어뜨리고
    넘어뜨리기 위해 다시 일으켜세운다 할지라도

    - <넘어짐에 대하여> 中에서
넘어지는 것은 사람만이 아닙니다. 때로는 하늘도 실수하는 법입니다.


    살얼음 낀 겨울 논바닥에
    기러기 한 마리

    떨어져 죽어 있는 것은
    하늘에
    빈틈이 있기 때문이다.

    - <빈틈> 전문
그러니 우리가 아프고 힘든 것은 너무나 당연한 과정입니다. 상처 입고 부러지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뚝뚝 부러지는 것은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는 새들을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뭇가지로 살아남는다면
    새들이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 <부러짐에 대하여> 中에서
하늘에도 빈틈이 있고 사람들은 늘 넘어지고 부러지는 존재입니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볼 때 비로소 낙관(樂觀)이 생깁니다.


    어떤 이의 운명 앞에서는 신도 어안이 벙벙해질 때가 있다
    내가 마시지 않으면 안되는 잔이 있으면 내가 마셔라
    (...)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지 말고 가끔 저녁에 술이나 한잔해라
    산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을 내려와야 하고
    사막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깊은 우물이 되어야 한다.

    -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中에서
오늘도 모두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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