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 시대를 초월한 지혜의 스승
칼릴 지브란 지음, 박철홍 옮김 / 김영사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유대교에는 예언자(prophet) 전통이 있습니다. 이들은 영적 지도자입니다. 아모스,호세아,이사야,예레미야,에제키엘 등이 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마호메트가 최후이자 최고의 예언자로 알고 있는 듯합니다. 기독교의 예수도 유대교 입장에서 보자면 수많은 예언자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타락한 유대교를 다시 세우려 했던 예언자 중의 한 사람.

20세기에 또 한 사람의 예언자가 있습니다.

    신의 사랑을 받은 자요
    신의 택함을 입은 자이며
    이 시대의 희망의 새벽빛인
    알무스타파!
칼릴 지브란은 《예언자 The Prophet》에서 알무스타파라는 예언자를 창조했습니다. 스스로 "가슴의 반쪽에는 예수를, 다른 반쪽에는 마호메트를 품고 있었다"는 칼릴 지브란이 왜 '예언자'를 만들었는지 궁금합니다. 위대한 예언자 예수와 마호메트를 가슴에 품고 있던 그가 왜 또 한 사람의 예언자를 만들었는지.

20여 년 줄잡아 백 번도 넘게 《예언자》를 읽었다는 박철홍 교수는 "《예언자》는 시적인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권위적인 해석을 중시하는 종교의 경전과는 달리 독자들에게 무한한 상상과 재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치 예언자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형식으로 인해 경전과 유사한 권위가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무한한 사색과 상상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이 《예언자》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합니다.

성현의 지혜는 넘쳐나지만 자신의 경험과 사색을 통해 내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이상 그것은 오래된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예언자》는 칼릴 지브란의 종교적 철학적 사색의 결과입니다. 그 사색의 결과를 가장 잘 전달하기 위해 원고를 완성하고도 4년을 더 수정하고, 단어 하나에서 문장 하나에 이르기까지 가장 적절한 어휘를 구사하고 적합한 문장을 만들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칼릴 지브란의 깨달음일 뿐, 우리는 《예언자》를 통해 우리의 깨달음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요즘 자녀 교육서를 집중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부모 역할 훈련》, 《부모와 아이 사이》 등 대표적인 부모 교육서와 우리나라의 많은 자녀 교육서에서 말하는 자녀 교육의 핵심은, 아이를 '인격체'로 대우하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상황별 대처 방법이나 대화법도 결국은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여길 때 가능한 방법입니다. 가끔 이러한 근본 전제를 도외시하고 지나치게 사례 위주로 설명한 함량 미달의 책도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될 자녀 교육서 리뷰에서 짚어 드리겠습니다.

예언자는 아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의 아이라고 해서 아이들을
    그대들 마음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그대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왔을 뿐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준다고 해서
    생각까지도 억지로 심어 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가진
    살아 있는 인격체다.
    아이들에게 육체의 집을 마련해 준다고 해서
    영혼의 집까지 지어 주려고 하지 말라.
    (...)
    그대들이 현명하다면
    아이들을 그대들과 똑같이 만들려 하지 말고
    그대들 자신이 아이와 같게 되려고 노력해야 하리라.

    (<아이에 대하여> 중에서)
제가 자녀 교육서를 읽으며 느꼈던 핵심적인 내용이 이 짧은 시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아무리 대화법이니 자녀 교육법이니 수많은 상황별 대처방법을 외운다한들 그 근본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언제 무너질지 모를 모래탑에 불과합니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 때 오히려 아이에게 큰 혼란과 갈등을 초래한다는 것도 여러 사례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이의 마음을 짓밟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가 아니라 '자주' 그러합니다. 예언자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베푸는 그대들은 어떠한가?
    베풂을 받는 사람들의 가슴에
    부끄러움의 못을 박고
    받는 이의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지는 않는가?

    (<베풂에 대하여> 중에서)
어쩌다보니 오늘 너무 일찍 일어났습니다. 지난 두 주 내내 술자리가 끊이질 않아 몸이 많이 지쳐 어제는 낮잠까지 늘어지게 잤습니다. 그리고 딸과 함께 9시 뉴스할 때쯤 잠을 청했는데, 그랬더니 밤 12시에 눈이 떠졌습니다. 다시 자려 했으나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일어나서 어제 읽다 만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를 마저 읽었습니다. 이런 책은 새벽에 읽어야 제맛입니다.

박철홍 교수가 번역한 《예언자》는 참 읽기 쉽습니다. 《예언자》 번역본이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 이 책이 가장 읽기 쉽습니다. 다른 번역서들이 영어 원문을 가급적 직역하듯 번역하여 시적 느낌은 더할지 모르겠으나 난해한데 반해 이 책은 길게 풀어 써 그 뜻이 비교적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오늘 읽은 것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은 <가르침에 대하여>입니다. 전문을 그대로 옮깁니다.

    이번에는 한 교사가 간청했습니다.
    저희에게 가르침에 대하여 말씀해 주소서.
    그러자 예언자는 대답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깨달음의 새벽을 향하여
    이미 반쯤 깨어 있는 것 이외엔
    아무 것도 가르쳐 줄 수 없다.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사원의 그늘 아래를 거니는
    현명한 스승이라 할지라도
    깨달음을 향한 신념과 사랑을 줄 수는 있으나
    깨달음의 지혜 그 자체를 전해 줄 수는 없다.
    그가 진실로 현명하다면
    자신의 지혜의 집으로 들어오라고
    명령하지도 않으리라.
    오히려 그대들로 하여금 그대들 자신의
    마음의 문으로 걸어가게 하리라

    천문학자는 우주에 대한 지식을
    말해 줄 수는 있어도
    우주의 신비에 대한 황홀한 감동을
    그대로 전해 줄 수는 없다.
    음악가는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아름다운 리듬을
    노래해 줄 수는 있어도
    그 리듬을 포착하는 귀마저
    그것을 울려 내는 목소리까지 줄 수는 없다.
    수학자는 무게와 길이의 세계에 대해서는
    가르쳐 줄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속에서 사는 삶의 기쁨을 전해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깨달음이란
    자신이 직접 터득해야 하는 것이지
    타인으로부터 그 날개를 빌릴 수는 없기에.
    그리하여 그대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홀로 신을 대면해야 하듯이
    그대들 한 사람 한 사람은
    홀로 신을 깨닫고
    홀로 대지를 이해해야만 하리라.

    <가르침에 대하여>, 칼릴 지브란, 박철홍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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