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려올 때 보았네
이윤기 지음 / 비채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어제 아침 신문에서 <강기훈씨 '유서대필 누명' 벗는다>는 머릿기사를 봤습니다. 유서대필이라니? 그 때의 일을 모르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1991년 4월 26일 금요일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집니다. 이를 계기로 대학생들과 재야 인사들의 항의 분신이 잇따릅니다. 소위 '죽음의 굿판(김지하씨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표현)'으로 거의 1주일에 한 명씩 11명의 학생, 노동자, 빈민의 분신이 잇따랐고 2,000회가 넘는 항의 집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강경 진압을 계속했습니다. 5월 25일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는 토요일 오후 서울 퇴계로에서 시위 도중 당시 성균관대 학생이었던 김귀정이 질식사하는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공권력은 두 학생을 죽음으로 몰고 수많은 사람들을 스스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팔랐던 시위 정국의 결말은 참으로 엉뚱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11명 중의 하나인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가 분신해 숨지면서 남긴 유서를 같은 단체 총무부장 강기훈씨가 대필했다고 시끌벅적하더니 정원식 총리 서리의 밀가루 투척 세례로 막을 내렸습니다. 당시 신임 총리 서리였던 정원식 전 문교부 장관이 외대에서 무리하게 강의를 진행하다가 흥분한 학생들에게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받았습니다(정 전 총리는 100만권 이상이 팔린 베스트 셀러 《인간과 교육》, 《교육환경론》 등을 저술하고 카운슬링의 개념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하는 등 교육학자로서 명성과 업적을 쌓았으나 전교조가 출범한 해인 1988년부터 2년간 문교부 장관을 맡아 1000명 이상의 전교조 교사를 해직시키는 등 악역을 맡은 바 있습니다).
당시 동행했던 기자들에 의해 계란과 밀가루 범벅이 된 정원식씨가 마치 집단 구타를 당한 뒤의 모습인양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1면 톱으로 실렸습니다. 외대생들은 일순간 스승도 알아보지 못하는 '패륜아'가 되었고, 학생들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돌아서버렸습니다. 스승을 저리 무참히 만드는 학생들의 민주화 구호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면서……. 그날 이후 아무도 그해 5월을 입에 담지 않았습니다.
정원식 총리 사건 전에 언론은 끊임없이 김기설씨의 유서를 강기훈씨가 작성했다는 경찰의 논리를 적극 알렸습니다. '운동권은 죽음을 조장하고 유서 대필도 서슴지 않는다'며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 세력 전반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정원식 총리 일이 터지면서 민주화 세력은 정권의 의도 대로 패륜아 집단으로 내몰리며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유서대필 사건은 결국 유죄를 선고받아 강기훈씨는 3년간 형기를 채우고서야 출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운동권은 이 사건을 끊임없이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의혹을 제기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국과수가 분신한 김기설씨의 유서는 본인이 직접 작성했다고 16년만에 필적 감정을 번복한 것입니다.
어제 아침 그 기사를 보고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잊혀진 기억, 아무 생각 없이 살았던 일상의 삶이 순간 휘청, 흔들렸습니다. 그러다가 이윤기 선생의 신작 산문집 《내려올 때 보았네》를 읽다가 또 한 번 휘청,하였습니다.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 말에.
2차 대전 중 독일의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 있으면서 유태인 학살에 깊이 개입한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봤던 한나 아렌트라는 독일 출신 작가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보았던 모양입니다.
아렌트의 눈에 비친 아이히만은 악당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시간 같아 보였다. '악의 평범성'에 대해 아렌트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생각 없이 사는 일상의 삶, 그것이 바로 악의 근원이다." (p.89)
이윤기 선생이 받은 충격 못지 않게 저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생각 없이 사는 일상의 삶, 그것이 바로 악의 근원이다."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때마침 어제 저녁에 이윤기 선생을 직접 뵙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내려올 때 보았네》는 고은 선생의 시 <그 꽃>에서 제목을 빌려왔습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중견 작가이자 탁월한 번역문학가이며 신화 연구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글을 쓰고, 여행을 하고, 나무를 심고, 삶에 대해 사유하는 진정한 자유인이자 영원한 청년 이윤기 - 어제 만난 이윤기 선생은, 이러한 소개글이 딱 어울리는 영원한 청년이었습니다. 열정이 끓어 넘치고, 못다한 일들이 너무나 많아 쉽게 늙을 수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선생은 어림잡아 지금까지 300여 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 합니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했듯이 그는 지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꽃처럼 좌중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습니다.

말솜씨 이전에 그의 글솜씨는 맛깔스럽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너무 좋다못해 읽다보면 주눅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오히려 주눅 들지 말고 글을 쓰라고 충고합니다. 명창들 앞에서 나의 노래를 부르라고 말합니다.
나는 가수 조영남 앞에서도 겁 없이 노래를 부른다. 그가 음반으로 만들어낸 노래는 부르지 않는다. 그의 노래는 누구 말마따나 들으면 좋은데 불러보면 욕만 나온다. 도저히 흉내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기야 음악대학에서 성악을 수련한 그의 내공, 아마추어에게는 시늉조차 언감생심이다. 그래서 그와 어울리는 자리에서는 일본 노래나 몽골 노래나 베트남 노래로 빠진다. 천하의 명가수라는 조영남도 여기에 이르면 속수무책이다.
조영남은 내가 암수를 쓰는 것을 괘씸하게 여기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로부터는 노래를 잘 부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내 노래에 관한 한 그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p.247)
글 또한 그렇다. 직업적으로 글 쓰는 사람들을 두고 '글발 좋은 사람들'이라고 한 모양인데, 그 사람들 시늉할 것 없다. '나'의 글을 쓰면 된다. '나'의 심정을, 말하듯이 소박하게 진정성에 실어 보내면 그뿐이다. (p.8 머리말에서)
또 용기를 얻습니다. 아직 제대로 된 글을 쓸만한 내공이 없어 맨날 남의 책을 소개하면서 은근슬쩍 내 생각 살짝 얹어 보내는 저에게 참으로 용기를 주는 말입니다. 내공이 부족하니 암수를 쓸 수밖에요, 그러나 십수년의 수련 끝에 혹 제가 졸저라도 하나 써낼 수 있다면 그때 고마워해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 중에 오늘 이윤기 선생의 이름도 올려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