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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 8 - 도사 영웅대회
김용 지음, 임홍빈 옮김 / 김영사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태왕사신기>를 보고 속으로 험담했습니다. 어찌 이따위 드라마에 감히 광개토대왕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느냐고. 지난 10월 초의 [독서유감]에서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판타지 사극이라 스스로 칭한 <태왕사신기>도 있으나 이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이 1% 정도 가미된, 주인공이 광개토대왕이라는 사실 외에는 모두 허구인지라 별 재미가 없습니다. 아니, 10대 때부터 궁궐보다는 전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광개토대왕을 왕위쟁탈에 목숨을 건 나약한 임금으로 그리고 있으니 재미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속이 상합니다. 저렇게 만들 걸 왜 하필 주인공이 광개토대왕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드라마입니다. (2007년 10월 1일자 [독서유감461] <왕을 낳은 후궁들> 편)
이것이 저의 한계입니다. 태왕(광개토대왕)과 그를 지키는 네 명의 신(四神)의 이야기인 <태왕사신기>는 단순히 리얼리티만으로 따질 수 없는 작품입니다. 애초에 사극 판타지라는 생소한 장르를 선포했을 때 좀 더 순수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설픈 정수기가 물 속의 미네랄까지 모조리 걸러버리듯이 리얼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의 필터는 상상력마저 아낌없이 여과시켜 버립니다. 제게 '판타지'는 허황함과 유치함의 다른 이름이었을 뿐입니다.
어렸을 때 어디선가 들었던 4신 -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은 어차피 상상 속의 동물(?)입니다. 고구려 벽화에도 등장하는 이 4신은 아마 동아시아 전설의 공통 요소일 것입니다. 상상 속의 4신을 인격화하여 그리고 있으니 <태왕사신기>는 처음부터 리얼리티를 따질 수 없는 드라마였습니다.
<태왕사신기>의 사신은 이러합니다. 사신의 우두머리로 현무·우사의 환생인 거믈촌 촌장 현고(오광록), 백호·풍백의 환생으로 쇠를 부리는 능력을 지닌 주무치(박성웅), 청룡·운사의 화신 처로(이필립), 웅족의 여인 새오의 환생으로 환웅에 의해 불의 힘을 갖게 된 주작 수지니(이지아). 그들은 태왕(배용준)을 수호합니다. 이들을 하나로 엮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상상력입니다. '쥬신'이라는 나라(?)로 등장합니다. 조선 또는 숙신의 재설정음 같은 '쥬신' 역시 근거는 희박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가 아니니 <태왕사신기>에서 마르고 닳도록 거론되는 옛 나라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쥬신은 몽골, 만주, 한반도에 걸쳐서 분포한 민족 전체를 일컫는 말이라고도 합니다. 심지어 현재의 일본 열도까지. 상상력이 심히 부족한 저에게 상상 속의 나라와 상상 속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태왕사신기>가 처음에 제대로 보였을 리 만무합니다. 부끄럽습니다.
주말에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을 보았습니다. 다소 오래된 작품이라 TV에서도 몇 번 방영됐습니다. 저도 띄엄띄엄 보았는지라 대나무 숲 위에서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리며 검술을 겨루는 장면을 보고 혀를 끌끌 찬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리얼리티 필터가 자동으로 가동된 것입니다. 리얼리티 필터를 거쳐나온 <와호장룡>은 한마디로 허황된 이야기였습니다. 저에게 '무협'은 철학을 담을 수 있는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다시 보며 또 부끄러워졌습니다. <와호장룡>은 그야말로 감동이었습니다. 이런 작품이 그저 허황한 이야기로만 비친 제 눈이 실망스러웠습니다. 이미 스승이 가르쳐준 도의 경지를 넘어선 이무백(주윤발)과 그를 사랑하는 수련(양자경), 이들은 이미 인간의 욕망을 다스릴 줄 아는 고수들입니다. 반면 강호의 세계를 동경하는 철부지 소룡(장쯔이)는 욕망에 아주 충실한 캐릭터입니다. 고위 관료의 딸로 등장하고 성격 또한 만만찮은 것이 마치 <의천도룡기>의 조민과 비슷합니다. 대나무 숲의 현란한 와이어 액션도 결국은 깨달음과 현실 사이의 긴장감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고 보니 아마 저의 리얼리티 필터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태왕사신기>도 그러하고 <와호장룡>도 그러하고, 어느 순간 저의 리얼리티 필터가 망가진 것 같습니다. 추측컨데 이 모든 것이 아마 최근에 열독한 <의천도룡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드디어 <의천도룡기> 7,8권을 모두 읽었습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어설픈 저급 리얼리티 필터를 교체할 기회였습니다. 진작에 이러한 경험을 했더라면 영화 <매트릭스>를 보면서 비록 '시뮬라시옹'의 철학을 간파하지는 못했다손 치더라도 최소한 저급한 리얼리티 필터로 깔아뭉개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무협에 대한 편견이 깨졌습니다. 무협에도 역사와 철학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물론 그것이 신필 김용이었으니 가능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나중에 시간을 내어 사조삼부곡의 앞의 두 편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도 읽어봐야겠습니다. 역사와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무너진 흥미로운 경지에 또 한번 빠져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