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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 없이 생뚱맞게 튀어나오는 언어처럼 신선한 영화가 주는 감흥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어쩐지 불쾌감을 주는 제목부터가 심상치가 않았더랬는데 그건 리뷰를 읽었을 때나 영화를 보고 확인하는 절차에서 가진 일관적인 불편함이었다. 문학 용어로 치면 일상화된 인식을 깨뜨리며 사물의 본질을 알려주려는 데 목적이 있는 '낯설게 하기' 정도 될까. 조명이 꺼져 있는 연극 무대를 보는 듯한 배경과 챕터 형식의 구성이 그러했고, 인물들의 치부를 드러내려는 감독의 의도가 마치 눈 앞에서 개 흘레 붙는 걸 봐버린 것처럼 멋적고 껄끄러웠다. 

 도그빌은 평범하지만 자신의 평범함을 경멸하고 조롱하기까지 한다. 인물을 보면 그들은 절망에 가까운 실낱같은 소망들이 있지만 개선 의지가 결여되었거나 부재하므로 무료하기 짝이 없다. 톰은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연금에 기생하며 시간을 죽이지만 작가가 되기 위한 자료를 소중하게 보관한다는 점에서 재능 없는 자신을 기만한다. 마을을 벗어나고 싶지만 여의치 못해 남자들의 끈적한 시선을 감내하는 젊은 여자의 삶 또한 시시하긴 마찬가지다. 시각 장애가 있으나 남들의 눈을 속이려는 노인이나, 정욕 때문에 창녀촌을 찾으면서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남자도 남들에게 자신의 속살을 보이길 꺼려 한다. 즉 단절되어 소통되지 않은 조용한 마을안에 한 마리의 먹잇감이 뛰어든 것이다. 그들만의 개, 그레이스. 나약한 것들은 쉽게 위험한 존재가 된다.

그들 앞에서 수용을 가르치려던 톰이나 다른 인간들에게 자신의 심리를 들킬까 마지못해 참석하는 회의에서 불만스럽던 실례였던 그레이스가 짐승 취급을 당하며 난교를 당하는 일은 낯선 것들을 사납게 경계하며 한편 전전긍긍하는 맹수의 본능과 너무나 닮아 있다.  권력자에게 힘을 부여 받고 인간의 본능적인 나약함과 두려움, 이기심을 응징하는 그레이스 또한 새로운 권력의 범주 안에 들게 되고, 종국엔 경멸해 마지않던 이들과 융화된다.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 씨의 병처럼 끝없이 물고 뜯는 권력의 카테고리에서 양심을 지키려는 인간의 의지가 이렇듯 허약한 것인가. 

권력자나 권력을 마지 못해 따르는 자와 그에 맹종하는 자의 차이가 과연 뭘까 생각해 본다. 개 목걸이를 채우려는 자는 더욱 잔인해지고 개 흉내를 내는 자는 더욱 비참하게 굴종하게 되는 건 아닐지. 누구나 개 목걸이를 찬다면 비슷해질 게 뻔하다는 생각에 두려움에 휩싸인다. 개를 한 번 때리기 시작하면 습관처럼 손이 올라가는 일처럼. 뼈다귀와 사소한 관심을 위해 주인의 눈치를 보는 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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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학교 다닐 때 문화 교실이란 게 있었다. 작은 영화관에 몇 학급의 아이들을 몰아 넣고 그에 걸맞는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던. 반공주의라는 미명하에 말이다. 무엇을 상영했는지는 자세히 기억이 안 나지만, 그때 영화는 오락물 몇 가지와 더불어, 이승복 어린이의 영웅담 같은 다분히 목적성 짙은 교육용 매체의 역할을 다분히 했었던 것 같다.

그런 방화를 보며, 동시에 만화 '똘이 장군'을 떠올리곤 했는데, 당시 무슨 무슨 날이 되면 티브이에서 방영해주던 그 만화영화의 결말 부분에 대해 신기해하곤 했다. 뭔고 하니 북한의 김일성 부자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늑대였고 똘이장군의 통쾌한 표적감이 되었으며, 종국에는 늑대의 탈을 뒤집어쓴 새끼 돼지였다,는 설정 말이다. 어린 나이에도 물론 그게 사실일 거라는 확신은 하지 않았지만 왜 인간으로 표현이 안 되었을까 심각하게 생각해 보곤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육도 마찬가지여서, 교과서에는 북한 체제보다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우월성을 사회나 도덕책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건 우리가 자랑스러운 한민족이며 단일 민족이라는 사실보다 더 확고부동해 보였다. 당시 군부체제가 이끄는 나라가 반공주의를 표방함이 당연했으나, 요즈음은 남북한의 화해 무드 때문인지 상호 불신 조장을 하는 내용은 교과서에도 싸그리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쨌든 후로 내가 생각한 건 시선이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는 정도,였다. 그것이 비록 남루한 현실일지라도.

  나를 영화관으로 이끈 것은 사상 초유의 제작비를 들여 만든 영화라는 소문에 대한 호기심반, 역사물에 민감해야 한다는 일종의 국민으로서의 의무감 반이었던 것 같다. 영화를 보며 마치 전장에 든 듯한 효과음이나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 튀기는 영상에 나 역시 눈이 휘둥그레지기에 충분했다. 전투신 같은 장면 묘사가 극히 사실적이었다는 건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또한 감독이 말하려던 시대나 상황을 초월하는 가족애는 공감가는 것이었고, 그걸 표현하기 위해 남한군의 심리 묘사에 치중했다는 것, 그리고 형제는 다름 아닌 우리 민족을 상징한다는 것까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엔딩 자막이 올라가면서 나는 어쩐지 정체모를 횡횡함을 느껴야 했는데 그건 '뭔가 이프로 부족해' 하는 뜬금 없는 상실감이었다.

작가가 사건의 구성이나 인물을 형상화 할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필연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동생(진석)의 심리가 급작스럽게 변한데 대한 개연성이 부족했었던 것 같다. 형의 말에 순종적이며 반기를 들때도 제풀에 화를 내고 가버리는 유약한 캐릭터가 갑자기 피튀기는 전쟁터에 자원하고, 형을 찾기 위해 적진을 스스로 뛰어 드는 모습은 낯설었다. 그가 정말 형을 원했다면, 형이 권할 때 제대를 하고 가족을 부양했어야 할텐데, 형에 대한 단순한 반항심 때문에 극한의 현장인 전장에 남는다는 이야기,는 사건의 동기 부여가 부족했었던 같다. 또한 마지막 전투에서 형제가 가까스로 만난다는 설정 또한 우연적인 면이 강하다는 느낌.무슨 고대 소설도 아닐 진대 넓은 전장에서 오래지 않아(다 망가진 모습이긴 하지만) 만난다는 필연은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오히려 서로가 머지 않은 자리에서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이 되었다고 하면(가슴은 아프지만) 이야기에 신뢰성을 부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의 잔인함을 머리론 알지만, 폐부까지 깊숙히 느끼지 못함은 당대를 살지 못했던 사람들의 피상적인 아픔일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로 그것은 사람들이 이 모씨가 자신의 몸으로 전쟁의 희생자를 표현하려던(?) 사진들을 얄팍한 동정과 다름아니게 받아들이며 모멸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더군다나 그 시선이 상술로 온통 왜곡되었음에랴.)

강제규 감독이 어떤 의도로 전쟁을 표현하려 했는지를 생각해 본다. 그는 초유의 한국형 블랙버스터 영화를 만들고자 했고, 동시에 전후 세대들에게 전쟁의 아픔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감독은 그만큼의 감동과 더불어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면 된 것일까. (여기서 그렇다고 하면 더 할말이 없을 듯 싶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그것을 위해 애써 가족주의에 편중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전쟁 후에도 피폐하고 헐벗은 거리의 모습대신 따스하게 바라보려는 감독의 시선은 가족 상봉에 대한 따뜻한 메시지를 담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 그건 전쟁을 겪지 못한 자의 피상적인 감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던 건 왜일까.(다른 영화이지만 '실미도'에서 군인들의 버스 폭파 장면에서 피로 전우애를 다짐하는 부분 역시 그러했다. 감독이 '이 장면에서 필시 관객들이 울어야 해'그렇게 주문을 하기라도 한듯 불필요하게 많은 감정적 대사들은 영화의 사실성을 떨어뜨렸다는 생각이다. 정서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려는 무리한 요구 때문에.)   물론 아직도 민감한 문제인 이데올로기를 진지하게 바라보기엔 시기 상조일 수도 있고, 상업성과 무관하지 않을 분야인 영화로 만들어 관객 동원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반공주의로 돌아가기엔 시대 착오적인 일이 될 테다.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던 시대는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실적인 면보다 극한의 감정으로 일관하는 영화는 기실 시나리오는 허구에 기반한다는 명제를 새삼 떠올리게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불만을 품었던 건 영화의 플롯이었지, 나 역시 눈물을 닦고 극장문을 나선 사람중에 하나이다. 분단의 아픔은 어떤 식으로든 형상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를 만든 분들의 노고에 어쨌든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 영화로든 다른 분야로든 이러한 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망각하지 않도록, 다시 한번 현실을 직시하는데 도움을 주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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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읽었다. 아주 늦었다고 해야겠다. 텍스트는 지루하고도 흥미롭게, 날카롭고도 아름답게 읽혔다. 그리고 자연스레 조나단 스위프트의 환상을 떠올렸다. 환상이 필요하다는 말은 현실에서의 좌절로 인한 도피에 기인한다. 18세기를 산 조나단 스위프트 또한 활자에서 그러한 공간을 확보하고자 했다. ‘걸리버’가 소인국이나 대인국, 라퓨타, 후이님의 나라를 여행하면서 겪은 일들은 인간 내면의 이중성이나, 부조리한 현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즉 우화를 통해 스위프트는 당대의 영국 사회의 부패를 직접 설파하지 않음으로써 풍자의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그런 점에서 ‘난쏘공’과는 우화를 차용한 사실주의라는 점에서 공통의 맥락이겠다. 또한 그것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미학적인 관점에서도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현실 참여 문학은 특성상 나긋나긋하고 유연한 어조로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구호적인 나열에 경도된다면 그 역시 문학이라는 옷을 스스로 벗어내는 꼴이니 적당한 방법론이 필요하다.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시궁창을 시궁창 그대로 그리는 데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며, ‘시궁창에 꽃을 던지는 행위’에서도 나올 수 있다.

부박한 읽기라 해도 할 말이 없지만 우선 눈에 들어왔던 점은 소설의 구조적인 면이었다. 들여다보면 전체는 12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도입부에는 교사의 질문을 통한 전체 이야기의 암시가 있으며, 그 안에 난장이(앉은뱅이, 꼽추)의 우화가 들어 있다. 세부적으로 다시 난장이일가(난장이, 난장이 아내, 영수, 영호, 영희)의 이야기가, 또 그의 주변부에서 난장이를 바라보는 제삼자의 시선(윤호, 지섭, 신애 엄마)과 난장이를 억압하는 환경(세상, 작게는 은강 그룹)의 이미지가 있다. 또한 그 이야기를 싸고 있는 카테고리는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 씨의 병처럼 경계를 지우려는 자와 경계를 허물어 보려는 자가 대치되어 있다.


현실이라는 우화


인물들은 서로가 낯설다. 난장이를 바라보는 거인이나 거인을 바라보는 난장이나 말이다. 난장이는 낡은 허드레 공구로 온갖 허드레 일을 한다. 하지만 현실을 개탄하기에 너무나 억압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그나마 지친 몸을 끌고 돌아갈 집이 헐릴 때 그는 다만 중얼거린다. ‘그들 옆엔 법이 있다’고. 여러 번 밟히면 억울함에 나오는 눈물도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으로 인식되어 버린다. 난장이의 아내 또한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현실의 어떤 점이 문제이며, 그 근원을 밝히기에는 자신의 무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노동 수첩’을 읽는 아들 ‘영수’에게 왜 다른 공원들처럼 잠자코 공장을 다니지 못하느냐고 슬퍼하는 정 많은 소시민의 전형이다. 하지만 그러한 난장이에게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죽어서까지 지키고 싶은 희망이 있다. 그 곳은 감히 존재하는지조차 모를 달나라이며, 머리카락 성좌이다. 소설은 터무니없이 긍정적이며 이러한 인간과 세계의 모순은 언제나 그랬듯 현실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그래서 그의 실낱같은 희망들은 죽음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난장이 아버지의 이름이 김불이(金不伊)인 것이나 자식인 영수, 영호, 영희는 이름부터 일상성을 띈다. 그들은 인쇄판에 찍어야 할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야 겨우 학습을 할 수 있으나 팬지를 만지작거리거나 기타를 퉁기기를 좋아하는 소박한 아이들이다. 하지만 난장이처럼 그들은 권력의 바퀴에 끼어 무참히도 좌절된다. 그들은 결국 현대라는 기계의 나사못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점은 영희가 가진 자의 집에 들어가 그의 향락의 피해자가 되는, 손 안에 있던 것조차도 빼앗겨 우는 현실의 창녀가 됨에 다름 아니다.

은강시는 잿더미가 된 철거된 행복동과 다를 바 없는 공간이며, 오히려 언제나 안개로 뒤덮여 있고, 검은 폐수로 바다가 오염되어 있다. 하지만 은강 그룹의 회장은 환경 문제가 자신의 공장에서 나온 오염원 때문임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더라도 그리 큰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 곳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주택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자의 입장에서 보면 ‘아홉 시간 삼십 분’의 노동과 ‘한 시간 반의 시간 외 근무’가 있었다 하더라도 노동조합을 결성해 단결하는 행위는 용납되지 못하는 범죄이다. 요컨대 그 어디에고 ‘분배’를 자진 허용하는 사용자는 없었다는 이야기다. 다만 묵묵히 받아들이며 ‘안 돼요’라고 말하지 않는 대다수의 눈먼 근로자가 필요할 뿐이다.


소설은 권력 구조와 억압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억압은 소설에서나 현실에서 전혀 새로운 소재가 아니며 소설에서도 ‘김불이’의 선대의 삶이 노비로서 매매, 공출, 증여, 상속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근대 사회에서 비록 노비의 개념은 사라졌지만 부당한 구속과 억압은 선대나 70년대에서 끝나 버리진 않았다는 이야기다. 어디 물가 상승과 발맞추어 서민들의 임금 인상이 제때 이루어진 적이 있었던가. 감히 생각컨대 이는 근로자의 부당 해고와 생계비 문제를 이야기할 때 거인들은 소인들을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으려는 특수 계급으로 보기 때문은 아닐까. 혹은 경제적 핍박은 배운 대로 즉 추상적 개념으로 인식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소인들은 ‘정 억울하면 너도 돈 벌면 되지 않냐’는 식의 자조적인 논리를 펼밖에는 없는 건 아닐까.

행복의 부재이든, 금전의 부재이든 없는 자는 천국을 알 수가 없다. 다만 동경할 뿐이다. 그곳은 릴리푸트가 되든 달이 되든, 머리카락 성좌가 되든, 클라인 씨의 병 안이 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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