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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정혜

얼마간의 기대를 하고 본 영화였기에 아쉬움과 반가움이 반반이었다. 소설다운 격한 반전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듯 천천히 일상을 이동하는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이 작품이 영화가 아닌 소설이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싶었다. 그리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들여다보며 다소 불쾌감을 느꼈는데 그것은 나의 삶이고 주위 어느 누군가의 삶이었기 때문이었고 그것들이 새삼 적나라하게 나열되고 이야기된다는 것에 낯설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여자가 되는 이유.

를 떠올렸다. 감독이 말하기를 제목에 붙은 여자, 라는 수식어는 딱히 이유가 없었다지만. 지루하다시피 나열되는 주인공의 행동을 보자니 어떤 경험을 떠올렸다. 빙글빙글 돌다가 멈추면 주위가 반대 방향으로 되었던 기억을 말이다. 달팽이관 같은 전정기관이 우리 몸의 위치 감각이나 평형감각을 담당한다면, 정혜라는 주인공은 어떤 경로로 인해 그게 손상되었을지 모르겠다고. 그리하여 비틀비틀 세상과 소통하려 하지만 그녀에게 진심으로 손 내밀려는 사람은 드물어 보인다. 같이 일하는 우체국 직원들의 관심사는 남편 몰래 피는 담배나 소소한 맥주 안주거리 같은 삶이고, 또한 그에 안주하려는 삶이다. 그래서 옛 연인이나 친척이나 동료들에게 혹은 구둣가게 점원에게 그녀는 ‘이상한 사람’이 돼버린다. 아마 그게 제목에 여자가 들어가는 당위인지도 모르겠다. 감독은 캐릭터에 여성성을 부여하는 것뿐 아니라 지병처럼 늘상 마음 한 언저리가 아픈 사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진부한 상징이지만.

칼은 본래의 효용도 있지만 상해의 용도로도 쓰인다. 상처에 쉽게 노출되는 인간은 동류의 인간을 쉽게 알아본다. 그것은 정혜가 술집에서 데려온 남자를 위로하는 장면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남자가 과도를 바로 잡지 못해 안타까워하듯 그녀 역시 칼날에 쉽게 베이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일상적이었다가 역시 일상으로 환원된다. 중간 중간 삽입되는 회상 장면은 심리의 원인을 캐내려기보다는 슬쩍 보여주는데 그친다. 아마 그것은 주인공에게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는 게 아니라 의식 깊숙이 있는 떼내지 못하는 또 하나의 그녀이며, 그런 점에서 긍정을 암시하는 듯 보이는 결말도 옛폭행의 앙금을 쉽게 상쇄하진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아마 주인공이 어느 날 사과칼을 들고 다시 삼촌을 찾아가더라도 지금 그녀는 남자를 식사에 초대하고 싶어하고, 홈쇼핑에서 김치를 배달해 먹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비록 사회의 편견에 적극적으로 맞서지도 못하며, 강한 메시지도 불쑥 내밀지 않지만 삶을 긍정하고 싶어하는 ‘여자, 정혜’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참 착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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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과학도에게 그날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상대성 이론을 일반인에게 어떻게 설명하실래요?”

그랬더니 그는 쌍둥이 이론을 펼쳐보였다. 하지만 내게는 그 설명이 뭔가 추상적이면서도 장황히 느껴졌는데, 이유는 본인이 지극히 평범한, 과학의 문외한이었음에 다름 아니겠다.

그런 나 역시 영화를 보기 전에도 ‘나비 효과’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도 개념 정도는 이해했지만, 그건 어쩌면 ‘카오스 이론’이나 ‘상대성 이론’을 인지하는 것만큼이나 피상적일지 모른다.

요컨대 '나비 효과'의 기본 플롯은 가정과 선택의 문제이다. 이러한 점은 ‘슬라이딩 도어즈’를 연상시키지만 그닥 해피엔딩을 애써 추구하려하진 않는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며, 회상을 통한 기록으로 실마리를 찾아나가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메멘토’를 떠올리게도 한다. 스스로에겐 그만큼 머리를 쓰게 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고마운(?) 영화였으며, 다큐멘터리가 아닐 바에야 영상물의 기본 자질이 재미라면 상당히 흥미롭게 본 작품이기도 했다.

인생을 다시 쓸 수 있다면 어떨까. 이러한 의문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가령, 정신병자가 아닌 평범한 대학생이었다면? 어린 시절의 추한 기억들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현재가 아닌 그녀와 한번이라도 사랑을 나눌 수만 있다면?

이런 의문들은 각자의 상황에 맞게 엄청난 파급으로 다가온다. 행복한 대학생이 또다른 인생의 방해꾼을 만나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으며, 포르노를 찍는 나쁜 어른에게 일침을 가할 수는 있어도 이미 연인은 죽게 돼버리는 식이니까 말이다. 혹 연인을 구할 수는 있어도 자신이 희생자가 되어 불구의 삶을 산다거나 친구에게 여자를 빼앗겨버리는 식이다. 이 얼마나 부조리한 현실인가. 완전한 해피엔딩은 고전 소설이나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은 허무하다.

인생의 정점에서 돌아볼 때 과연 얼마나 행복을 자각할 수 있을까. 아마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 허나 미각을 느끼는 인간의 미뢰가 짠맛만 희미하게 감지하는 노년에도 인생의 굴곡을 바꾸려 몸부림 친 젊은 날을 과연 거시적으로 성찰하게 될까, 하는 부분에선 회의적이다.

아니, 오히려 작은 단맛들을 무미하게 지나치게 되고 말지는 않을까.

그러나 나는 주인공처럼 허겁지겁 현재를 일기장에 기록하지는 않겠다.쓰레기와 같은 현재 때문에 미래를 바꾸려 안간힘 쓰다가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정신 병자가 되어 방치될지 모를 일이다.

쓰레기는 본인이 손수 치워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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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가 등장한다. 제목대로 쥴이라는 독일인 남자와 짐이라는 이름의 프랑스인의 이야기다. 영화를 느끼기 전에 먼저 프랑스어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구사되는 언어란 걸 통감했다. - 덕분에 자막을 따라 가지 못해 되감기를 몇 번을 해야 했다. - 통념적으로 프랑스 영화는 어렵다는 고정관념이 있긴 하지만, 영화는 형이상학적이거나 그닥 어렵게 다가오지 않는다. 시종일관 이어지는 제 삼자의 나레이션 때문일까. 어떠냐하면 밥 먹고 물 마시듯 자연스레 술술 이야기하는 식이다. 오히려 좀 통속적인 내용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 사랑을 영화는 다루고 있다. 덧붙이자면 오래된 흑백영화이며 누벨바그를 표상한 영화라 한다. 누벨바그는 자유롭게, 혹은 제멋대로 흔들리는 카메라와 거친 편집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프랑스의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평론가로 활약하던 장 뤽 고다르, 프랑스아 트뤼포 등이 대표적인 감독이다. 여기서 내가 흑백이란 것을 굳이 명시하는 이유는 화면색이 주는 명징한 간결함, 혹은 맹목성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스크린이 흑과 백으로밖에 표현되지 못했듯 주인공의 - 특히 여자주인공의 삶을 대하는 맹목성, 혹은 사랑이라는 정의 내리기 불명확한 명제를 보는 맹목성이다.

극단적인 열정을 경계하면서도 은밀히 동경하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라면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의 캐릭터에 거부감을 느끼겠지만 또한 그 만큼 공감하리라 본다.

어쨌든 칼라로 편집되었다면 이러한 생각의 공백 없이 오히려 밝고 경쾌하게 느껴졌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말은 주인공 둘의 죽음으로 끝나긴 하지만.

일차세계대전이 발발할 시기를 배경으로 친구 쥴과 짐은 조각상을 닮은 여인 까트린을 사랑하게 되고 까트린은 쥴과 결혼해 아이를 낳지만, 정체되고 고인 것을 싫어하는 까트린은 다른 남자와 사랑을 끊임없이 찾는다. 둘 사이에 나타난 짐은 그녀와 사랑을 약속하지만 질투와 함께 동반되는 증오로 서로는 믿음을 잃게 된다. 지겨울 정도의 질시와 애증을 반복하는 둘 사이를 나약하게 바라보는 쥴, 셋은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나지만 쥴은 짐과 까트린을 실은 차가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광경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게 된다.

자막이 다 올라간 뒤에도 멍해 있었다. 도대체 감독은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인가 답답했다. 앞서 내용이 어렵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리 만만하게 볼 영화도 아니었다.




(자유로운) 사랑은 존재하는가


여주인공인 까트린은 사회나 개인에게 가해지는 구속과 억압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여자다. 셋이서 자유연애에 관한 연극을 보고 쥴이 소위 결혼한 여자의 정숙함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에서 '볼테르는 말했지. 여자는 자연스러워서 지겹다고. 젊은 여자는 괴물, 예술의 살인자, 작은 요부, 멍청함과 타락함의 결정체'란 말을 하자 반발하듯 보여지는 까트린의 행동이 이를 증명한다. 그녀는 두 남자의 구태의연함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갑자기 강물에 뛰어드는 대담함을 보인다. 그녀의 결혼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쥴과 결혼했어도 그는 그녀를 진정 소유하지 못하며, 까트린 역시 다른 남자와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맨다.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의 행동은 오히려 당연한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지극히 유교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산 우리 관점에서 볼 때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음을 역시 인정해야 한다.

한편 그녀가 삶에서 사랑의 부재를 못견뎌 하는 참을성 없는 광인이라 쳐도, 우리 자신을 관조해 본다면 무의식적이든 자의든 머릿속에 차고 들어앉은 관념이 한둘 있을 것이고, 그 중 하나가 사랑임을 말하는 데 감히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삶의 순환과 그 가벼움


영화 중간쯤 까트린이 노래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소용돌이'라는 노래 제목처럼 카메라로 세 주인공을 번갈아가며 빙글빙글 잡아준다. 또한 그 노래말에서 나타난 삶은 - 혹은 인간이 산다는 것은 - 가볍게 얼크러져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녀는 반지를 끼지 않은 손이 없었네. 팔찌도 몇 갠지 셀 수가 없어. 그래도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난 마법에 걸린 듯 했어. 그녀의 눈동자는 오팔. 날 매혹했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타원형. 운명적인 여자. 우린 키스로 만났어. 그리곤 모든 게 엉망이 됐지. 행복하지 않았어.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지. 각자 서로의 길을 간 거야.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 난 또다시 그녀를 만났어. 여전히 아름답고 매혹적이었어. 난 한참을 보고야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어. 그녀의 신비한 미소를 보고서야. 예전보다 더 많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어. 난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셨어. 알콜이 들어가자 긴장감이 사라지더군. 난 너무 많이 마셨어. 난 그녀의 손길에 잠을 깨었어. 우린 키스로 만났어.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 그래도 우린 다시 시작했어. 난 다시 한 번 그녀를 보았어. 역시 그녀의 미소는 빛이 났어. 당신이 키스할 때도 왜 난 당신이 그리운가. 당신이 돌아오면 왜 싸늘해지는가. 우린 함께 우리의 길을 간다네. 인생이란 소용돌이 속에. 우리는 돌고 돌아. 만났다 헤어지고. 만났다 헤어진다네.'


세 명의 주인공들은 각자의 궤도에 따라 순환한다. 엇갈리지만 이는 조율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쥴은 까트린을 놓지도 잡지도 못하며, 짐은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적이고 평이한 연인을 택한다. 까트린, 그녀는 가눌 수 없는 열정을 안고 그 대가로 짐과의 죽음을 선택한다. 그녀의 방식대로라면 삶은 창조할 가치 있는 그 무엇이며, 사랑 또한 쉬임 없이 돌아야 마땅한 것이겠다. 마치 영화 곳곳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배경으로 시원스레 굴려 가는 은륜처럼.

펄떡대는 순수한 광기들의 죽음. 낡고 퇴색해지는 삶의 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음은 아집일까. 비록 삶이 그렇다는 걸 묵인하면서 말이다.

다시 보는 이 영화, 그래서 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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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영화를 주관적인 관점에서 만들 때(볼 때도) 오류는 상당한 편견이 작용한다는 점일 것이다. 원작은 누가 뭐래도 원작이다, 라는.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1960년)와 ‘리플리 The Talented Mr. Ripley’(2000년)은 패트리사 하이스미스의 소설「The Talented Mr. Ripley」를 원작으로 했다 한다. 주인공 이름이 같고 전체적인 플롯도 비슷하지만 르네 끌레망과 앤소니 밍겔라 감독의 눈은 사뭇 달랐던 듯 보인다. 두 편의 영화를 보고 원작을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감독들의 각색의 정도의 의문도 있지만 영화를 볼때 우선 이야기 구조를 살피는 습성 탓에 말이다. 시간이 나면 읽어봐야겠다.


비디오 예고편에서 눈길을 끌어 골랐던 리메이크 작품 [리플리]이야기를 먼저 할까 한다. 나는 보다가 이 영화의 엄청난 구라(?)에 눈이 돌아갈 뻔 했다. 수많은 조작과 사건의 우연성을 어쩜 그리 남발하는지. 원작이 쓰여진 게 50년대라 하지만 그래도 영화를 각색할 땐 스토리의 개연성에서 관객이 납득이 가게끔 해야 할 것 아닌가. 원작이 쓰였던 50 년대조차 전근대적인 수법이 먹히는 시기가 아니며,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닉 호가 당대에 우주를 날아다녔다는 사실을 밍겔라 감독은 망각한 게 아닐까. 생각해보니 이 감독의 전작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아름다운 영상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닥 내킨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먼저 주인공 [리플리]에서의 톰 리플리가 석유 재벌 아들인 디크 그린리프를 찾아 프랑스로 떠나는 설정부터 내키지 않았다. 모든 걸 소유한 아버지가 아들을 찾고 싶다면 여러 방법이 있었을 텐데 굳이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거금의 돈을 들려 보낸 점은 아무래도 작위적이다.

둘째, 재벌 아들 디키 또한 대학때 친구라는 말에 쉽게 그와 동화되었다는 점은 그렇다 쳐도 플롯의 허점은 후에 톰이 살인을 한 후 그 수사과정에서도 난무한다. 범죄에 쓰여진 차에 지문 조회는 왜 못하며, 디키의 사체를 버린 섬 근처를 샅샅이 뒤져보는 최소한의 수고로움은 절차조차 생략되어 있다. 그러므로 쉽사리 이루어지는 여권 조작이나 수표 조작처럼 엄청난 결함은 딴지 걸 의욕을 잃어버린다.

개인적인 아쉬움은 디키 역의 주드 로가 리플리 역에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고 (캐릭터의 특성인진 몰라도 맷 데이먼이 너무 수줍은 연기를 한 탓이다.) 반면 이 영화에서 좋았던 점은 또 다른 살인을 암시하는 열린 결말로 끝맺는 설정은 특이하고, 전작엔 흐르지 않는 재즈 선율이 나른하다.


 후에 본 ‘태양은 가득히’는 좀 자조적인 심정에서 봤다. ‘뭐 그 내용이 그 내용 아니겠냐’ 싶은데도 꼭 봐야 할 것 같은 궁금증 때문에. 하지만 천만의 말씀. [올드보이]를 영화로 먼저 보고 그 다음에 만화를 봤을 때처럼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걸 통감해야 했다. [태양의 가득히]의 톰 리플리는 매력적이지만 냉혈한으로 그려진다. 예고된 잇다른 살인을 하면서도 시체 옆에서 태연히 식사를 하고, 거리낌없이 친구의 애인을 유혹하는 식이다. 그러므로 [태양은 가득히]의 톰은 인간적이라기보단 치밀하고 특이한 캐릭터에 속한다. 흥미로운 캐릭터였고 사건 전개도 공감이 갔다. 특히 수사관을 피해 끊임없이 도망치는 장면이나 애인을 잃어버린 마르쥬를 유혹하는 장면에서 톰은 더할 바 없이 매력적이었다.(이건 순전히 알랭들롱의 조각상 같은 외모탓일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주머니가 된 분들이 육십년대 왜 그토록 그에게 열광했는지 비로소 난 이해했다.)

비록 두 작품 다 주인공들의 살인은 우발적이었지만 감독의 의도는 그 동기에서 극명한 차이가 있다. [리플리]에서는 주인공이 동성애 캐릭터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톰 역인 맷 데이먼은 디키의 연인으로 분한 마지 역의 기네스 펠트로보다 미남이고 매력적인 디키(주드 로)를 사랑하는 역할이다. 자신을 지루해하고 경멸하는 디크를 죽이고, 어쩔수 없이 하는 살인은 차라리 인간적인 면이 있다. 그러니 [리플리]에서의 톰은 유약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을 방치하는 비열한이다. [리플리]에서 살인 동기는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다 좌절하는 인간적인 고뇌에, [태양은 가득히]는 부유함을 동경하는 자의 자조에 가깝다고 느꼈다.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기가 되는 것은 하찮은 욕망에서 비롯된다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그게 밥이든,색이든, 재물이든, 학문이든 간에. 사회 제도가 허락하는 한 사람들은 그것들을 추구할 것이고 또다른 [태양은 가득히]들은 끊임 없이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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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 없이 생뚱맞게 튀어나오는 언어처럼 신선한 영화가 주는 감흥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어쩐지 불쾌감을 주는 제목부터가 심상치가 않았더랬는데 그건 리뷰를 읽었을 때나 영화를 보고 확인하는 절차에서 가진 일관적인 불편함이었다. 문학 용어로 치면 일상화된 인식을 깨뜨리며 사물의 본질을 알려주려는 데 목적이 있는 '낯설게 하기' 정도 될까. 조명이 꺼져 있는 연극 무대를 보는 듯한 배경과 챕터 형식의 구성이 그러했고, 인물들의 치부를 드러내려는 감독의 의도가 마치 눈 앞에서 개 흘레 붙는 걸 봐버린 것처럼 멋적고 껄끄러웠다. 

 도그빌은 평범하지만 자신의 평범함을 경멸하고 조롱하기까지 한다. 인물을 보면 그들은 절망에 가까운 실낱같은 소망들이 있지만 개선 의지가 결여되었거나 부재하므로 무료하기 짝이 없다. 톰은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연금에 기생하며 시간을 죽이지만 작가가 되기 위한 자료를 소중하게 보관한다는 점에서 재능 없는 자신을 기만한다. 마을을 벗어나고 싶지만 여의치 못해 남자들의 끈적한 시선을 감내하는 젊은 여자의 삶 또한 시시하긴 마찬가지다. 시각 장애가 있으나 남들의 눈을 속이려는 노인이나, 정욕 때문에 창녀촌을 찾으면서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남자도 남들에게 자신의 속살을 보이길 꺼려 한다. 즉 단절되어 소통되지 않은 조용한 마을안에 한 마리의 먹잇감이 뛰어든 것이다. 그들만의 개, 그레이스. 나약한 것들은 쉽게 위험한 존재가 된다.

그들 앞에서 수용을 가르치려던 톰이나 다른 인간들에게 자신의 심리를 들킬까 마지못해 참석하는 회의에서 불만스럽던 실례였던 그레이스가 짐승 취급을 당하며 난교를 당하는 일은 낯선 것들을 사납게 경계하며 한편 전전긍긍하는 맹수의 본능과 너무나 닮아 있다.  권력자에게 힘을 부여 받고 인간의 본능적인 나약함과 두려움, 이기심을 응징하는 그레이스 또한 새로운 권력의 범주 안에 들게 되고, 종국엔 경멸해 마지않던 이들과 융화된다. 뫼비우스의 띠나 클라인 씨의 병처럼 끝없이 물고 뜯는 권력의 카테고리에서 양심을 지키려는 인간의 의지가 이렇듯 허약한 것인가. 

권력자나 권력을 마지 못해 따르는 자와 그에 맹종하는 자의 차이가 과연 뭘까 생각해 본다. 개 목걸이를 채우려는 자는 더욱 잔인해지고 개 흉내를 내는 자는 더욱 비참하게 굴종하게 되는 건 아닐지. 누구나 개 목걸이를 찬다면 비슷해질 게 뻔하다는 생각에 두려움에 휩싸인다. 개를 한 번 때리기 시작하면 습관처럼 손이 올라가는 일처럼. 뼈다귀와 사소한 관심을 위해 주인의 눈치를 보는 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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