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남자가 등장한다. 제목대로 쥴이라는 독일인 남자와 짐이라는 이름의 프랑스인의 이야기다. 영화를 느끼기 전에 먼저 프랑스어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구사되는 언어란 걸 통감했다. - 덕분에 자막을 따라 가지 못해 되감기를 몇 번을 해야 했다. - 통념적으로 프랑스 영화는 어렵다는 고정관념이 있긴 하지만, 영화는 형이상학적이거나 그닥 어렵게 다가오지 않는다. 시종일관 이어지는 제 삼자의 나레이션 때문일까. 어떠냐하면 밥 먹고 물 마시듯 자연스레 술술 이야기하는 식이다. 오히려 좀 통속적인 내용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 사랑을 영화는 다루고 있다. 덧붙이자면 오래된 흑백영화이며 누벨바그를 표상한 영화라 한다. 누벨바그는 자유롭게, 혹은 제멋대로 흔들리는 카메라와 거친 편집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프랑스의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평론가로 활약하던 장 뤽 고다르, 프랑스아 트뤼포 등이 대표적인 감독이다. 여기서 내가 흑백이란 것을 굳이 명시하는 이유는 화면색이 주는 명징한 간결함, 혹은 맹목성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스크린이 흑과 백으로밖에 표현되지 못했듯 주인공의 - 특히 여자주인공의 삶을 대하는 맹목성, 혹은 사랑이라는 정의 내리기 불명확한 명제를 보는 맹목성이다.
극단적인 열정을 경계하면서도 은밀히 동경하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라면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의 캐릭터에 거부감을 느끼겠지만 또한 그 만큼 공감하리라 본다.
어쨌든 칼라로 편집되었다면 이러한 생각의 공백 없이 오히려 밝고 경쾌하게 느껴졌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말은 주인공 둘의 죽음으로 끝나긴 하지만.
일차세계대전이 발발할 시기를 배경으로 친구 쥴과 짐은 조각상을 닮은 여인 까트린을 사랑하게 되고 까트린은 쥴과 결혼해 아이를 낳지만, 정체되고 고인 것을 싫어하는 까트린은 다른 남자와 사랑을 끊임없이 찾는다. 둘 사이에 나타난 짐은 그녀와 사랑을 약속하지만 질투와 함께 동반되는 증오로 서로는 믿음을 잃게 된다. 지겨울 정도의 질시와 애증을 반복하는 둘 사이를 나약하게 바라보는 쥴, 셋은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나지만 쥴은 짐과 까트린을 실은 차가 강물 속으로 뛰어드는 광경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게 된다.
자막이 다 올라간 뒤에도 멍해 있었다. 도대체 감독은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인가 답답했다. 앞서 내용이 어렵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리 만만하게 볼 영화도 아니었다.
(자유로운) 사랑은 존재하는가
여주인공인 까트린은 사회나 개인에게 가해지는 구속과 억압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여자다. 셋이서 자유연애에 관한 연극을 보고 쥴이 소위 결혼한 여자의 정숙함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에서 '볼테르는 말했지. 여자는 자연스러워서 지겹다고. 젊은 여자는 괴물, 예술의 살인자, 작은 요부, 멍청함과 타락함의 결정체'란 말을 하자 반발하듯 보여지는 까트린의 행동이 이를 증명한다. 그녀는 두 남자의 구태의연함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갑자기 강물에 뛰어드는 대담함을 보인다. 그녀의 결혼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쥴과 결혼했어도 그는 그녀를 진정 소유하지 못하며, 까트린 역시 다른 남자와 다른 사랑을 찾아 헤맨다.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의 행동은 오히려 당연한 듯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지극히 유교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산 우리 관점에서 볼 때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음을 역시 인정해야 한다.
한편 그녀가 삶에서 사랑의 부재를 못견뎌 하는 참을성 없는 광인이라 쳐도, 우리 자신을 관조해 본다면 무의식적이든 자의든 머릿속에 차고 들어앉은 관념이 한둘 있을 것이고, 그 중 하나가 사랑임을 말하는 데 감히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삶의 순환과 그 가벼움
영화 중간쯤 까트린이 노래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소용돌이'라는 노래 제목처럼 카메라로 세 주인공을 번갈아가며 빙글빙글 잡아준다. 또한 그 노래말에서 나타난 삶은 - 혹은 인간이 산다는 것은 - 가볍게 얼크러져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녀는 반지를 끼지 않은 손이 없었네. 팔찌도 몇 갠지 셀 수가 없어. 그래도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난 마법에 걸린 듯 했어. 그녀의 눈동자는 오팔. 날 매혹했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타원형. 운명적인 여자. 우린 키스로 만났어. 그리곤 모든 게 엉망이 됐지. 행복하지 않았어.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지. 각자 서로의 길을 간 거야.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 난 또다시 그녀를 만났어. 여전히 아름답고 매혹적이었어. 난 한참을 보고야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어. 그녀의 신비한 미소를 보고서야. 예전보다 더 많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어. 난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셨어. 알콜이 들어가자 긴장감이 사라지더군. 난 너무 많이 마셨어. 난 그녀의 손길에 잠을 깨었어. 우린 키스로 만났어. 인생의 소용돌이 속에. 그래도 우린 다시 시작했어. 난 다시 한 번 그녀를 보았어. 역시 그녀의 미소는 빛이 났어. 당신이 키스할 때도 왜 난 당신이 그리운가. 당신이 돌아오면 왜 싸늘해지는가. 우린 함께 우리의 길을 간다네. 인생이란 소용돌이 속에. 우리는 돌고 돌아. 만났다 헤어지고. 만났다 헤어진다네.'
세 명의 주인공들은 각자의 궤도에 따라 순환한다. 엇갈리지만 이는 조율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쥴은 까트린을 놓지도 잡지도 못하며, 짐은 사랑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적이고 평이한 연인을 택한다. 까트린, 그녀는 가눌 수 없는 열정을 안고 그 대가로 짐과의 죽음을 선택한다. 그녀의 방식대로라면 삶은 창조할 가치 있는 그 무엇이며, 사랑 또한 쉬임 없이 돌아야 마땅한 것이겠다. 마치 영화 곳곳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배경으로 시원스레 굴려 가는 은륜처럼.
펄떡대는 순수한 광기들의 죽음. 낡고 퇴색해지는 삶의 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음은 아집일까. 비록 삶이 그렇다는 걸 묵인하면서 말이다.
다시 보는 이 영화, 그래서 좀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