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서 밀러의 책은 오래전부터 가슴에 묻고 언제고 읽어보리라 생각했었다. 동시대의 작가인 유진 오닐이나 테네시 윌리암스의 극들은 책으로나 연극으로나 접했지만, 그는 처음이었다. 명성대로 일상적인 사건의 배열과 대사들은 틀니처럼 사실적이면서 치밀했다.

주인공인 세일즈맨 윌리 로먼은 하루를 고단히 일하고 자식을 바라보며 사는 소시민이다. 소설의 비극적 현실은 미국의 대공황(1929년)이라는 배경도 있지만, 인간 내면의 비열함에 근거하기도 한다. 주인공은 큰 아들 비프의 어린 화자와 몽상속에서 끊임 없이 대화하면서 젊은날의 치부를 들킨 자신을 도피시킨다. 동시에 그의 기억 속에 행복했던 과거의 어린 아들 화자 뿐 현실의 무능한 아들은 인식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은 연민과 동시에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남은 것은 구직 실패에 따른 자괴감이다.

모래알처럼 손아귀에서 사그러져가는 꿈을 아들 세대는 근거 없는 낙관으로, 아버지 세대는 현실 부정으로 버티는 것.
참 낯익다.
가스관을 물거나 보험금을 타기 위해 사고를 내는 행태는 비단 20세기를 살아간 미국인의 삶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는가. 그 고단함에서 현대인의 삶과 어떤 차이점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다.

20세기초 우리 나라에도 '산돼지' 같은 사실주의 극이 있었지만, 사실주의든 사회주의를 표방하든 세대를 아우르는 문제는 쉽지가 않다. 가난과 거기서 파생된 삶의 애환을 구호의 나열 없이 냉철히 바라본다는 것은 상당한 작가의 역량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삶은 모르겠지만, 일상은 그리 많은 사건과 대화를 요구하진 않는다. 보편적인 사건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데 이 극의 얼개 또한 아버지라는 어려운 존재, 세대간의 피할수 없는 갈등, 빈부차에 따른 괴리와 열등감 같은 양념들이 맛깔나게 어우러져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달콤한 빵들이 있는 그 곳

'위저드 베이커리'를 읽다보면 문득 갓 구운 따뜻한 빵이 먹고 싶어진다. 어떤 빵들이든 그 맛뿐 아니라 마법의 효능까지 있다면 얼마나 신기할 것인가. 마법은 현실의 바람을 압축해 놓는 장치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들이 마법을 통하면 평범한 소녀들은 빨간 구두를 신고 화려한 무도회에서 춤추고, 호박과 쥐가 마차와 마부가 되니까. 현실에서는 마법이란 게 없기에 소설은 판타지의 형식을 취하지만 내게 책은 할 말을 꽤 압축해 놓은 양갱처럼 느껴졌다. 달콤하고 진득한 사유의 양갱을 베어문 채 한장 한장 읽어가다 보면 위저드 베이커리가 보인다. 이 마법사 빵가게에는 응당 마법사를 축으로 갖가지 다양한 빵 레서피들이 이야기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동화에 담긴 현실

서양 대부분의 동화 원작이 그리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만은 아닌 것처럼 이 이야기도 어린이를 비롯한 어른들에게 단순한 꿈과 희망을 주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예컨대 '나'가 빵을 끔찍이도 싫어하게 된 발단은 가정의 불화이다. 즉 의붓어머니가 집에 오면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화 즉 의붓동생을 강간했다는 죄명으로 집에서 쫒긴다든가, 그 범인이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였다든가, 의붓어머니가 나를 죽이려고 부두 인형을 빵가게로부터 주문한다든가 하는 현실은 추악하다. 

그러고보니 동화 또한 이야기다보니 현실이 완전히 배제되진 않아왔다. 즉 동화에는 인간이라면 누구가 맞이하게 될 죽음의 문제가 등장한다. 백설공주 이야기에도 그렇고 인어공주도(디즈니영화는 해피엔딩이지만) 우리의 이야기인 효녀 심청도 부활하긴 하지만 눈먼 아비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하고 바리데기도 병든 아비를 위해 지옥을 경험한다. 
 
또한 새엄마로 인한 역경 모티브도 참으로 무수하다.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헨젤과 그레텔, 우리나라의  심청이 또한 그렇고 동화는 아니지만 김동리의 '등신불' 또한 그렇다. 새엄마가 그리도 악녀로 그려지는 것은 사랑의 배분문제 때문이 아닐까 한다. 똑같이 정을 주어도 남들과 자녀들이 보기엔 공평하게 비추어지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 그래서 이야기속에 무수한 새엄마들은 악녀의 이미지를 탈피하기 힘든 것 같다. 사실 그녀들 또한 삶이 고단하지 않을까. 의붓 자식들이 말을 듣나, 같은 사랑을 주고 싶지만 인간이기에 차마 공평해지지 못하는 심정도 있을 것이고, 남들의 이목과, 아비가 주는 사랑이 전처자식들에게 치우칠까 전전긍긍해야 하고. 남편 애정이 자신만 바라보도록 미모도 가꾸어야 하고 그녀들도 사실 삶이 피곤하긴 매한가지일 게다.

그럼에도 동화는 행복한 결말이 당위이다. 심청이 왕과 결혼하여 왕후가 된다든지, 무수한 불행했던 공주들이 왕자와 결혼하는 설정은 행복을 쉽고 편하게 결론내려 버린다.  


욕망의 문제

책은 인생이 동화처럼 아름다운가 묻고 있다. 주인공 '나' 어린 시절 맛본 대보름빵은 아픔과 회한과 상처와 그리고 사랑이 범벅된 맛이다. 용산역에서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엄마로부터 버려지며 맛보았던, 그러나 그 맛은 비할 수 없이 감미로웠던 기억으로 '나'를 괴롭힌다. 어린 '나'는 조금씩 뜯어먹었던 그 맛을 추위와 공포로 결국 다 게워버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커가며 그 맛을 찾아 헤맨다. 더불어 꿈에서 만나는 엄마 또한 그러한 달콤한 고통으로밖에 만나지 못한다.

이야기에는 타인의 마음을 살 수 있는 프레첼과 상대를 해할 수 있는 부두인형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타임리와인더 쿠키가 나온다.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빵이나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과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좀 더 잘했더라면, 그 일을 그렇게 처리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누구나 과거를 후회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상대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빵이지만 주문자 또한 비슷한 응분의 대가를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이밖에도 사업상 행운을 주는 에그 머핀, 잠재의식을 일깨워주는 메모리얼 아몬드 스틱, 상대를 추억하게 만드는 만주, 도플갱어를 만들어 주는 피낭씨에 등이 있다.

이런 과자의 효능들은 인간의 무수한 욕망을 대변해주는 듯 하다. 사랑을 받고 누리고자 하는 욕망과 기억하기조차 끔찍한 의식을 회피하고자 하는 욕망, 사랑이 변질되어 상대를 죽이고 싶다는 욕망은 인간이라면 한번쯤 가져봄직 하다.

자, 어떤가. 이러한 과자들이라면 당신의 양심을 한번쯤 속이고 베이커리에 들어서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과자의 마지막에는 아래와 같은 경고문이 붙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긍정이나 부정, 자기가 바라던 어느 쪽의 변화든 간에 물질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계의 질서에 변화를 일으키는 일입니다. 따라서 모든 마법의 이용 시 그 힘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라'고 말이다.

 
P.S.

열린 결말은 상상의 재미가 있지만 무책임하다. 이 이야기에서도 경우의 수로 결말지어 놓았다. 하나는 아버지가 강간범으로 잡혀들어가고 내가 꿋꿋하게 살아가든가, 다른 하나는 불행의 근원이었던 의붓어머니를 선택하게 않게 된 답지를 선택하도록 말이다. 어떤 선택지를 고르든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경험들이 쌓여가며 우리는 이른바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니까.

제과점에서 어떤 빵을 고르든 상관없는 것처럼 어떤 삶이든 선택할 수 있는 답지가 우리의 삶에는 존재한다. 다만 빵맛이 어떠하든 그 선택을 한 자신을 책임질 수만 있다면, 오늘 당신에게 위저드 베이커리에 한번 방문해 보길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 영원히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문화심리학
김정운 지음 / 쌤앤파커스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인터뷰 내용을 보고 혹해서 사게 된 책이다. 솔직히 리뷰어로서 책에 대해 좀 더 할 말이 많자면 나는 기혼자가 되었어야 했나 보다.

톨스토이는 두 번 읽지 않을 책은 읽지 말라고 했다지만, 꼭 필요한 목적으로서의 독서가 아닌 가외로서의 독서라 해도 이 책의 선택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한나절을 투자해 그의 뇌를 들여다본다면 배우자로부터 적어도 ‘당신과의 결혼을 후회해’ 따위의 망발을 듣지 않아도 되리라. 그것만으로도 아내 눈치 보며 중얼대는 그와의 만남이 조금은 기대가 되지 않는가.

21세기에서의 사회란 실로 재미가 없다. 실업대란으로 일컬어지는 일자리 부재로 인한 유휴노동자들과 자본주의의 미덕인 소비지향으로 치닫는 물신주의, 하릴없이 금전과 쾌락을 좆는 법을 교육이 모른 체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한국의 아침형 인간들은 오늘도 바쁘다 바쁘다 하며 자기 계발을 몰두 당한다. 

진정 상향평준화된 삶을 우리는 살고 있을까. 아니라면 과연 왜 그런 건가. 과거와 달리 지식이 기반되는 사회에서 일찍 일어나는 새가 반드시 행복한 것만도 아니며, 진정한 재미가 일상을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그것을 말하며 인간이 적어도 행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서의 쾌락과 배금주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어느 곳을 찔러도 무감한 현대인의 감성에 자극점이 되도록 성적인 코드를 삽입하고 자폭적인 유머를 곁들여 말하고 있다. 유머라는 게 주체의 망가짐을 전제로 청차의 공감 형성이라 할 때 그의 글쓰기는 다분히 효과적일 수 있다.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으로 저자가 가르쳐준 몇 가지 방법을 써두고 마음속에서 억압이 나타날 때마다 한 번씩 들여다보아도 좋을 것 같다.

비록 삶이 머리가 벗겨지고 큰 가슴과 망사 스타킹에 환호하는 지극히 통속적인 남자라 친다면, 한숨만 쉴 게 아니고 그의 부인으로 표상된 일상적이고 뻔한 사고들과 결별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반 년 만에 완독한 소설이다. ‘무진기행’ 과 ‘1964년 겨울’ 등 몇 편은 줄거리는 진작에 알고 있었고, 읽어보기도 대체 몇 번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알려지지 않은 단편들을 묶어 낸 ‘무진기행’은 기실 그리 달갑진 않았었다.
이는 김승옥 소설의 문학사적 의의를 차치하고서도 그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싸그리 책에 실릴 이유는 부족해 보인단 개인적인 편견 때문이었는데, 작품을 확인해 보니 아주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면 지나치게 오만방자할까. 그러나 뭐, 천재적인 감수성을 지닌 작가라도 하나같이 고른 역작을 써 내긴 힘든 법이라 위안해도 좋겠다. 그의 천재성은 일부 노작에서 주머니 속 송곳처럼 푸릇한 빛을 유감 없이 번득이고 있으니.
고백하건대 찔리기도 여러 번 찔렸다. 언제나 읽어봐도 그렇다. 그것은 소스라치게 강렬한 통증은 아닐지라도 소리 없이 번지는 통증에 가까웠다. 아픔이 무언지도 모르게 방치되어온 삶을 그는 언제든 기꺼이 생채기를 내 주었었다. 이쯤에서 ‘무진기행’에 수록된 단편들을 살펴보려 한다. 그것이 비록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격일 것이고, 결국 만져지는 것이 없다 해도 읽은 자로서 무언가를 말하려는 시도는 해 볼 일이다. 

  우선 인물들을 살펴보려 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방관자의 자세를 취한다. ‘무진기행’에서 주인공 나와 ‘1964년 겨울’의 나와 안은 제3자로서 현상을 관찰하기는 하지만 적극적인 개입은 꺼린다. 우연한 계기로 획득한 회사 임원이 되는 ‘무진기행’의 나와 ‘1964년 겨울’의 구청에서 고만고만한 일을 하던 나가 선술집에서 사내들을 만나게 되는 과정을 봐서도 그렇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의 나는 도시로 갔다가 말을 잃어버린 누이를 의아해 하지만 안타까이 바라보기만 하는 나이며, 이 점은 ‘건’의 나 또한 마찬가지다. 관찰자 시점을 수용한 이유는 사건을 좀 더 명료히 보는 데 효과적이며, 방관자적 분위기를 풍김으로써 근대를 거쳐 현대에 불거져 나온 문제 상황에 메스를 들이대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김승옥 소설이 현대 모더니즘의 귀감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이는 지독한 사실주의 작가로도 생각될 수 있는 이유라고 본다. 또한 방관자를 둘러싼 인물군이 보이는데, 이들은 평면적이며 따라서 지나치게 인간 본연의 욕망에 충실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건’에서 형을 비롯한 동네 형들, ‘무진기행’에서 경찰 서장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인물들과 대립하는 인물들 간의 갈등을 통해 작가는 할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던 걸까. 이 부분에서는 텍스트를 읽어나가며 나는 작가가 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는 느낌을 받았다. 현대에 들어와 개인에게 있어 소통은 그만큼 분화되어지고 여러 통로(채널)가 다양해졌으나, 상대적으로 그만큼 그 입지는 상대적으로 얕아지고 작아졌는지 모르겠다. 주인공들은 소통의 방법을 몰라 우왕좌왕하는데, 명료한 말을 내뱉다가도 곧 엉뚱한 말로 불투명하게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1964년 겨울'의 안이 내게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냐고 묻자 나는 버스에서 여자 승객의 복부를 보고 신선한 꿈틀거림을 경험했다는 식의 말을 한다. 독자와 안이 보기엔 나는 우스꽝스러운 답을 한 것처럼 보이나 나의 태도는 사뭇 진지하며, 안과 나는 곧 타협점을 찾고 화해하기도 한다.
또한 ‘무진기행’에서 내가 하인숙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그들은 무진의 따분함에 공감하며 이것을 빌미로 서로에게 좀 더 다가선다. 

"밤엔 정말 멋있는 고장이에요."
여자가 말했다.
"그래요? 다행입니다."
내가 말했다.
"왜 다행이라고 말씀하시는 줄 짐작하겠어요."
여자가 말했다.
"어느 정도까지 짐작하셨어요?"
내가 물었다.
"사실은 멋이 없는 고장이니까요. 제 대답이 맞았어요?"
"거의."
우리는 다리를 다 건넜다. 거리서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그 여자는 냇물을 따라서 뻗어 나간 길로 가야 했고 나는 곧장 난 길로 가야 했다.
"아, 글루 가세요. 그럼..."
내가 말했다.
"조금만 바래다주세요. 이 길은 너무 조용해서 무서워요."
여자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다시 여자와 나란히 서서 걸었다. 나는 갑자기 이 여자와 친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대화를 포함한)이 무의미하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기도 한다. 모든 현상을 보며 주인공들이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갈등(내적이든, 외적이든)으로 인한 괴로움이 시발점이며, 이로 인해 그들은 쉬이 무기력해진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행동과 말을 무진의 농밀한 안개처럼 감추려 그들은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 받았던 것인가. 아니, 우리들은 그러고 있는 것인가. 

"저 오늘 박 선생님께 선생님에 관해서 여러 가지 물어봤어요."
"그래요?"
"무얼 제일 중요하게 물어보았을 것 같아요?"
나는 전연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잠시 동안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선생님의 혈액형을 물어봤어요."
"내 혈액형을요?"
"전 혈액형에 대해서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들이 꼭 자기의 혈액형이 나타내주는... 그, 생물책에 씌어 있지 않아요? 꼭 그 성격대로이기만 했으면 좋겠어요. 그럼 세상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성격밖에 없을게 아니에요?"
"그게 어디 믿음입니까? 희망이지."
"전 제가 바라는 것은 그대로 믿어버리는 성격이에요."
"그건 무슨 혈액형입니까?"
"바보라는 이름의 혈액형이에요."
우리는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괴롭게 웃었다. 

  공범의식이 주는 쾌감은 역설적이게도 괴로움이 아닐까. 편안한 동질감과 그에 반하여 고개를 드는 반대급부의 괴로움이 주는 쾌감으로 주인공들은 유대 된다. ‘건’에서 내가 형들의 불미한 요구를 별 망설임 없이 들어주는 장면이나, ‘무진기행’에서 내가‘전보를 속여 가며’ 하인숙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이 그러하다.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개인주의에 대한 환상과 그와 충돌하는 자아의 모습은 흥미를 자아낸다. 고백하자면 나 또한 주인공의 뒤에서 새끼손가락을 걸었으며, 그로 인해 ‘괴로운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주인공이 무진에서 이방인이었듯이, 우리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며, 때때로 불유쾌한 과거를 되짚어보기도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무진은 내 삶 언저리에서 싸아한 안개처럼 머무르고는 언젠가 또 사라지겠지만 필요할 때마다 회오어린 감정조차도 동조해 줄 아무렇지도 않은 곳일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쯤 무진을 떠나게 될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벚꽃동산 - 체호프 희곡선집, Mr. Know 세계문학 50 Mr. Know 세계문학 5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주문한 책을 받았을 때 언뜻 떠오른 건 봉평의 이효석 전시관에 있던 이효석의 친필 원고인 체홉의 <벚꽃 동산>이었다. 거기서 그가 유진오와 교류했던 편지들을 보며 든 생각은 <메밀꽃 필 무렵>에서 시적 언어를 구사했다는 이효석 역시 한 때 사회주의를 동조한 동반 작가였고 보면 국내에서 1920년대의 사회주의란 혹여 지식인들 사이에 일종의 장식품으로 기능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었다. 체홉은 사회주의라기 작가라기보다 사실주의에 가깝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 심리나 인간이 사회로 인해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가를 내밀히 관찰하는 것이 사실주의라고 한다면 두 사상은 마치 이란성 쌍둥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행에서 파생된. 문학이 사회나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면 체홉의 인물들은 그의 작품을 이야기하는데 더없는 소재가 될 것 같다.

지식인들

단편 소설이나 장편 희곡이나 그의 작품에서 우선 눈에 띄는 캐릭터의 특징은 지적(知的) 계급이란 점이다. 이 책엔 실려 있지 않지만 <세 자매>에서 장교 베르쉬닌이나 <갈매기>의 작가 뜨리고린, 지적인 여배우 아르까지나 그리고 작가 꼬스차 <바냐 아저씨>에서 퇴직 교수인 세례브랴꼬프 등이 그러하다. 그들은 천박한 언행을 경멸하며 예술을 통해 정신을 고양시키려는 인물들이다. 이는 작가가 되려는 꼬스차에게 조언하는 의사 도른의 대사에서도 충분히 드러난다. 체홉 자신이 의사 신분이었으므로 어찌 보면 그는 주변 인물들을 그렸는지 모를 일이다.

 

도른 : 그래요. 중요하고 영원한 것만 그리기 바랍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까지 원하는 대로 잘 지내왔습니다. 만족하지요. 하지만 예술가가 창작을 할 때에 느끼는 것과 같은 그런, 정신이 고양되는 순간을 체험했다면 나는 아마도 이 물질적인 겉껍질과 그것에 속한 모든 것을 경멸하고 지상을 떠나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을 겁니다.
(중략)

도른 : 그리고 한 가지 더. 작품 속에는 반드시 명료한 특정 사상이 담겨야 합니다. 왜 글을 쓰는지를 알고 있어야 하지요. 그렇지않고 일정한 목적도 없이 길을 걷는다면 길을 잃을 것이고 당신의 재능은 오히려 당신을 붕괴시킬 겁니다.

 

희극적인 인물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그는 지적인 인간들의 모순 또한 잘 알고 있었을 법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극히 평범하며 소심하지만 이로 인해 웃기는 캐릭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청혼>에서 지주 추부꼬프의 딸 나딸리아에게 청혼하러 간 로모프가 뜻하지 않게 그녀와 땅 문제로 싸우고 돌아온다는 에피소드가 그러하고 <갈매기>의 꼬스차는 어머니의 권위와 명성에 가려 자신의 입지를 못 찾고 방황하는 인물을, <벚꽃 동산>에서 류보비 안드레예브나가 자신의 아름다운 동산이 경매에 넘어갈 걸 전전긍긍하면서도 없는 돈을 펑펑 써대는 모습, <어쩔 수 없이 비극배우>에서 똘까초프가 일상적인 일로 자살하려 친구에게 권총을 빌려달라는 장면 등에서 볼 수 있다.

 

불우한 사람들

작품에서 인물들은 사소함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려 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사회에 불만을 품는다. 이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몰락한 지주 계급(<벚꽃 동산>)을, 전처의 영지에 사는 무능한 학자(<바냐 아저씨>)를, 모스크바로 돌아가려 하나 가지 못해 좌절하는 사람들(<세 자매>)이다. 이들은 불우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불행은 사적인 성향이라기 보단 사회에 기인하는 듯하다. 작품 배경이 되는 19세기 제정러시아의 모습은 1861년 농노 해방이후 근대화가 이루어졌으나 이론뿐인 열악한 생활 환경과 그에 파생된 외압과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반체제 운동이 이루어졌다. 후에 볼셰비키 혁명 후 사회주의 체제로의 도입은 이러한 썩은 체제를 물갈이하자는 취지였으므로 가진 자들은 자신의 위치를 부여잡기엔 이미 역부족이었을 듯하다. 가난과 상실, 무능함 등을 그려내기에 적합한 사조는 사실주의나 사회주의일 것이며 체홉은 사회 제도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우스꽝스러운 인물들을 통해 그들의 불행을 배가시킨다.

따뜻한 사람들

하지만 또 이러한 인물들은 심성이 본시 따뜻하고 과거를 향수하며 일말의 희망을 담고 사는 인간들이기도 하다. 이는 <벚꽃 동산>의 여주인이 자신의 딸과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나 <세 자매>에서 자매들이 모스크바에를 그리워하는 장면에서 보인다. <세 자매>의 셋째딸 일리나는 약혼자를 잃고서도 혼자서 모스크바를 가겠다고 하며 <갈매기>의 꼬스차는 니나를 받아주려 하는 장면(결국 자살하지만)이 그러하다. 그들은 옛 것을 향수하며 낭만을 즐길 줄 알아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희망 한 가닥을 품는다. 동산이 경매에 넘어가고 별장의 문을 닫게 되면서 자신의 존재를 잊고 떠난 사람들을 향해 하인 피르스가 중얼거리는 대사는 희극적이면서도 마음 허전하게 만든다.


 

피르스 : (문에 다가가서 손잡이를 만져본다) 잠겼군. 다들 떠났어. (소파에 앉는다) 나를 잊었군. 괜찮아. 여기에 좀 앉아야겠어. 나리는 떠날 때 얇은 외투를 입어을지도 몰라. (걱정스러운 듯한숨을 내쉰다) 보살펴 주었어야 하는데 젊은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니까!(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린다) 살긴 살았지만 도무지 산 것 같지 않아.(눕는다) 좀 누워야겠어. 기운이 하나도 없군. 아무 것도 남은 게 없어. 아무 것도.

 

피르스가 중얼거린 말은 사실은 작가가 당시 자신의 조국을 향해 뇌까리고 싶던 말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웠던 옛날을 추억하는 사람들은 현재는 불행하다는 다른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이 모든 인간사를 녹여낼 줄 알았던 그의 희곡(소설 또한) 과연 그답다 감탄하게 만든다. 내게도 생이 짧은 단편보다 더 짧게 느껴지는 때가 온다면 그의 작품을 향수하며 다시 탐독하련다. 그때는 굳이 밑줄을 치며 읽지 않아도 그의 애상적이면서도 재담 어린 언어들이 가슴 가득 들어오리라.

* 열린 책들은 첨 사보는 것 같은데 책의 지질은 별로다.(까끌한 누런 종이) 그리고 대사에도 러시아의 긴 이름들이 그대로 실려 누가 누군지 잘 봐야만 해서 불편했음.(무식한 말인 듯하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