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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야 페터 한트케의 ‘관객 모독’을 관람했다. 보기 전엔 일말의 기대감을 가졌고 보면서는 웃었으며 보고 나서는 작가의 머리통을 열어 보고 싶을 정도로 그가 신기했다. 달리 표현한다면 작품이 일종의 시처럼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굳이 말한다면 서정시라기 보단 무의미시 정도가 되겠지만. 

인간이 가진 오류라면 본질보단 형상 자체를 말하기 좋아한다는 점일 것이다. 천박한 발상이지만 나 또한 물세례를 자행한다는 그의 연극이 궁금해졌고 속사포처럼 객석을 향해 쏟아 놓는 말들이 다름 아닌 언어 자체라는 데 차별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까지가 나를 비롯한 관객이 느낀 신기함의 일차적인 해석이다. 작가는 시종일관 객석으로 웃음을 던졌으나 연극적인 것을, 혹은 더 나아가 인간(사회, 세상) 존재의 본질을 표현하며 조소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우선 등장인물은 무대 위 자리한 의자와도 같은 용도로 쓰인다. 인물은 단지 언어 자체를 설명하는 데 소용되는 도구일 뿐이고 캐릭터의 특성 또한 없다. 그러므로 형상화라는 문학(희곡)의 특성도 애시당초 기대할 수 없다. 연극이라면 있어야하는 희곡이나 배우와 관객의 구분이 모호한 것도 마찬가지다. 준비된 희곡은 없는 것으로 간주하며 그들은 관객이 배우이고 배우가 관객임을 관객에게 여러 차례 주입시킨다. 더구나 연극 중반부에선 관객을 배우로 동참시키기까지 한다. 여기까지 본다면 희곡이 가지는 특성이나 여러 제약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물들은 무엇을 연기하는 것인가. 다름 아니라 인물들은 ‘말’을 가지고 논다. 말 자체를 띄어 쓰거나 붙여서 언어유희를 하기도 하고, 영어 불어, 독어, 일어, 중국어 같은 여러 언어들을 무의미하게 반복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언어의 기본적인 특성인 의미 전달은 배제된다. 그러나 연극에서 나름의 플롯을 전하려는 시도를 보이기는 한다. 그것이 극중극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의 동참이 이루어진다. 관객은 극중 인물을 죽이기도 하고 그 살해 방법을 연출 감독과 상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극중극에서조차 연극은 관객을 배제시킨다. 왜냐하면 연극의 대사와 플롯의 전개는 전혀 합치되지 않으며, 무리하게 연극의 구성 단계를 따르더라도 플롯 자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줄거리 따로 대사 따로다. 연극적인 것을 기대하고 왔다가는 관객들은 우롱당한다. 관객은 등장인물들에 의해 조종당하며(갑작스럽게 지명되어 무대로 올라가 창피를 당하기도 하고 관객 전체를 일으켜 세워 욕을 하라고 요구받기도 한다.) 이에 동조하며 쾌감을 느낀다. 따라서 관객은 이미 철저히 모독당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에 그치지 않고 서슴치 않고 육두문자를 날리며 물세례까지 준비한다. 이유인즉 관객과 인물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다. 적지 않은 물을 털어내고 객석을 나서는 관객들은 받은 모욕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전달 받은 메시지는 모호하지만 뭐 그리 기분이 나쁘진 않다. 그러니 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관객이 받은 또 하나의 모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의미 전달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음에도 관객들이 웃는 이유는 언어유희 외에도 극중극에서 연출 과정에서 느닷없이 끼어드는 연출 감독의 공이 크다. 실은 관객으로선 그가 실제 연출 감독인지 등장인물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인물로 포함시킨다면 그는 연극에서 유일하게 개성적인 캐릭터가 될 것이다. 그는 무식하지만 관객에게 웃음을 유발하고자 인물들에게 욕을 퍼붓고 무리한 연기를 요구하기도 하며 억지로 기승전결의 형식을 유도하고자 한다. 그는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어 세상에 존재하는 엄숙주의와 형식주의를 희화화하는 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온갖 언어와 물세례의 난장판에서 허우적대며 관람당하는 기분은 생각외로 나쁘지 않다. 재치 있는 입담과 세상을 향해 고래고래 내지르는 욕설을 경험하고 싶다면 더욱 더 권한다. 다만 연출가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여러 연기자를 동참시켜 참신함을 시도하는 것은 좋으나 지나치게 흥미 일변도로 내닫지만 말아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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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12-26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지 않은 물을 털어내고 객석을 나서는 관객들은 받은 모욕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 이런 기분이 어떤것인지 상상이 가지 않는군요. 연극을 본지도 참 오랜시간이 지난것 같네요.
오랫만이네요. 잘 지내시죠? ^^

포로롱 2005-12-26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일상에서 시간내서 본다는 것도 힘들지요. 어찌보면 호사같기도 하고요. 잉크냄새님도 잘 지내셨죠?^^
 

어떤 옷을 입든 이 비좁은 지상의 삶에서

나는 여전히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저 놀기만 하기엔 너무 늙었고

소망 없이 살기엔 너무 젊었다

세상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파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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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다면 움직이는 자를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움직이지 않는 자는 하루라도 빨리 죽음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이 바로 살았다는 증거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아니, 정자가 난자에 뛰어들어간 그 순간부터 애당초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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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제목이 대부분 말해주고 있다.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닌데 화장이 火葬이 아니라 化粧이라는 것을 알면 이해하기 쉬워진다. 작품의 광고대로 적절한 반전은 식상한 결말을 벗어나려 하며, 대사 또한 재치 있어 나름의 신선함을 준다. 탁구경기를 보듯 톡톡 받아치는 언어들. 하지만 그런 점들만이 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닐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이 주 전에 본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 쓴다는 것은 대국적인 뼈대만이 추려진다는 좋은 점도 있지만, 동시에 세부적인 심리 묘사나 세세한 무대 장치들은 잊었다는 말도 된다. 아무튼 지금으로선 인물들의 특징적인 표정 등이 간혹 떠오르는 것도 고마울 뿐이다.

무대를 보며 특이하게 느낀 점은 유리문을 통해 비친 인물(여자)의 동작을 통한 상황 표현과 회상 장면에서의 '여자'가 무대 안으로 순간순간 뛰쳐 나와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다는 점이었다. 영화나 드라마로는 회상 장면이 쉽게 연출되겠지만 연극에서의 제약으로 인해 그런 설정이 필요했던 것일까. 혹은 심리 묘사를 표현한 의도였을까.

노통의 소설은 아직 못 읽어 봤지만, 연극에 생략되었을 수많은 유려한 대사들을 확인하기에 필요한 독서는 즐거울 듯 싶다.


김포 공항도 그렇겠지만 공항은 다음 목적지를 향한 이동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배경이 되는 공항은 서로 간 타인임을 설명하기에 아주 좋은 설정인 듯 하다. 이런 공간에서 낯모르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건다고 할 때 우리는 의아심부터 일 것이다.

 ‘저 사람이 내게 무슨 목적으로?’

혼자임이 전제된 상황에서 예기치 않은 타인의 존재는 불안과 함께 오히려 짜증이 나는 법이다. 어쨌든 나리타 공항에서 그들은 그렇게 만난다. 낯선 남자, 즉 ‘적’은 어릴 때부터의 폭행에 관한 일화를 늘어놓기 시작하고 ‘나’는 듣기 싫은 이야기를 강요받는다. 하지만 어릴 때의 사소한 일로 자행되는 살인, 스무 살 무렵의 사랑하는 여자를 향한 살인을 이야기하는 ‘적’을 보며 ‘나’는 경악하고 그 곳을 떠나고자 하나 무의식중에 점점 그의 이야기에 매료된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를 의심하고 반목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가 일방적으로 ‘적’의 공격을 받는 것이다. 그것도 ‘나’에 대해 엄청 빠삭하게 꿰고 있는 야비한 적의 공략을. 게다가 ‘적’은 상황에 따라 거짓을 교묘하게 둘러댈 수도, 살인을 교사(巧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철저히 ‘나’의 관점이다.


이런 가정을 해 보자. 가령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려본 사람이라면 그나 자신을 죽이고 싶다는 말을 무의식중에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상상으로라도.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닌가. 예컨대 우린 현실에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치정극을 벌이고 싶진 않은 거다. 폭력의 미학이라는 말은 충분히 선정적이기는 하나 나는 이 말을 믿지 않는다.

-아까로 되돌아가서- 이토록 인간의 선택이란 극히 미약하고도 현실적인 것이지만 그래도 선택이 불가하다면 내 안의 악마는 이런 질문을 할지 모른다.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한다고 한다면 ‘나’는 그녀를 죽이고 함께 죽는 게 나을까, 그녀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게 나을까. 두 가지 상황에서 우린 갈등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적’은 정신적 쾌감을 위해 후자를 원한다. 이것으로 볼때 내 안의 ‘적’은 굉장히 솔직하지만 위험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반면 모범적이고 소심한 ‘나’는 전자를 선택하게 되고 공황 상태에 빠진다. 왜냐하면 ‘적’을 실컷 조롱하던 ‘나’는 자신의 말에서 무언가 커다란 결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실 살인 충동은 ‘적’이 아닌 ‘나’의 머릿 속에서 수십 번 자행되었고 살인 또한 나의 우발적인 행동에 의한 것이었음을.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애석하게도 '나‘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폭력에 노출되었다는 것은 스스로의(혹은 상대의) 가장 취약한 부위 -가장 무르고 연약한 부위-가 공략되었다는 말일 게다. 폭력의 피해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약한 아킬레스건을 가해자에게 들켰는지 모른다. '나'도 언어로 끊임없이 '적'의 치근거림을 당하며 이 점은 폭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피해자인 ‘그녀’ 또한 순진하게 ‘적’을 따라가다 두 번이나 치욕을 당하게 된다. 어쨌든 무방비상태로 자신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적'으로 인해 '나'는 당황해하며 우왕좌왕한다. 이 점은 '여자'도 마찬가지다. 친구로 오인하고 초대한 남자가 예전 자신을 능욕했던 사람이란 걸 안 순간 여자는 몸서리치게 되지만 두려움에 살인할 용기까진 없다.

이 작품은 폭력성을 통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상상(혹은 현실)을 꿈꾸게 해준다. 인간의 상상(혹은 현실)에서 폭력은 달콤하고, 음울하며 자극적이지만 지극히 사적이며 주관적으로 평가되는지도 모른다.

신문의 사건・ 사고란을 펼쳐 보더라도 본래보다 더 미화되거나 추하게 평가되는 것은 세상의 잣대이고 독자들에겐 결국 가십거리에 불과하다. 한번 찌르면 세상이 열 번 찔러 시체를 토막내 매장해 버리는 식이다. 혹은 자신이 죽이고도 골백번을 죽었는데 사람들은 아예 상대조차 해 주지 않는다.

“당신은 허공을 향해 말을 하고 있군요.” 그런 일을 애초에 없었다는. 뭐 그런 식이다.

“뭐가 이래? 너무나 불공평한 일이 아닌가. ” 피해자인 ‘나’는 이렇게 말하며 결국 공항에 남겨진다.


인간은 '적'과 함께 살아야 하고, 동시에 그대로의 ‘적’을 드러내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지독히 두꺼운 위장술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교묘한 언어든, 기억 상실이든, 시간의 경과든 간에.

‘적’은 ‘나’의 죄책감을 되살리기 위해 살인 이야기를 했음에 틀림 없고 결국 나와 함께 죽게 된다. 악마적 본성은 자아를 잃을 때만 함께 죽는다는 파국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

주위에 널린 '공항'에서 마주치게 될 ‘적’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 하긴 분명 승산 없는 싸움이겠지만 말이다. 싸늘한 시신이 된 나는 사람들 사이에 별 주목을 받지도 못한 채 잊혀지게 될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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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정혜

얼마간의 기대를 하고 본 영화였기에 아쉬움과 반가움이 반반이었다. 소설다운 격한 반전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듯 천천히 일상을 이동하는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이 작품이 영화가 아닌 소설이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싶었다. 그리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들여다보며 다소 불쾌감을 느꼈는데 그것은 나의 삶이고 주위 어느 누군가의 삶이었기 때문이었고 그것들이 새삼 적나라하게 나열되고 이야기된다는 것에 낯설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여자가 되는 이유.

를 떠올렸다. 감독이 말하기를 제목에 붙은 여자, 라는 수식어는 딱히 이유가 없었다지만. 지루하다시피 나열되는 주인공의 행동을 보자니 어떤 경험을 떠올렸다. 빙글빙글 돌다가 멈추면 주위가 반대 방향으로 되었던 기억을 말이다. 달팽이관 같은 전정기관이 우리 몸의 위치 감각이나 평형감각을 담당한다면, 정혜라는 주인공은 어떤 경로로 인해 그게 손상되었을지 모르겠다고. 그리하여 비틀비틀 세상과 소통하려 하지만 그녀에게 진심으로 손 내밀려는 사람은 드물어 보인다. 같이 일하는 우체국 직원들의 관심사는 남편 몰래 피는 담배나 소소한 맥주 안주거리 같은 삶이고, 또한 그에 안주하려는 삶이다. 그래서 옛 연인이나 친척이나 동료들에게 혹은 구둣가게 점원에게 그녀는 ‘이상한 사람’이 돼버린다. 아마 그게 제목에 여자가 들어가는 당위인지도 모르겠다. 감독은 캐릭터에 여성성을 부여하는 것뿐 아니라 지병처럼 늘상 마음 한 언저리가 아픈 사람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진부한 상징이지만.

칼은 본래의 효용도 있지만 상해의 용도로도 쓰인다. 상처에 쉽게 노출되는 인간은 동류의 인간을 쉽게 알아본다. 그것은 정혜가 술집에서 데려온 남자를 위로하는 장면으로 확인된다. 하지만 남자가 과도를 바로 잡지 못해 안타까워하듯 그녀 역시 칼날에 쉽게 베이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일상적이었다가 역시 일상으로 환원된다. 중간 중간 삽입되는 회상 장면은 심리의 원인을 캐내려기보다는 슬쩍 보여주는데 그친다. 아마 그것은 주인공에게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는 게 아니라 의식 깊숙이 있는 떼내지 못하는 또 하나의 그녀이며, 그런 점에서 긍정을 암시하는 듯 보이는 결말도 옛폭행의 앙금을 쉽게 상쇄하진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아마 주인공이 어느 날 사과칼을 들고 다시 삼촌을 찾아가더라도 지금 그녀는 남자를 식사에 초대하고 싶어하고, 홈쇼핑에서 김치를 배달해 먹는 그런 사람일 것이다. 비록 사회의 편견에 적극적으로 맞서지도 못하며, 강한 메시지도 불쑥 내밀지 않지만 삶을 긍정하고 싶어하는 ‘여자, 정혜’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참 착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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