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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제목이 대부분 말해주고 있다.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닌데 화장이 火葬이 아니라 化粧이라는 것을 알면 이해하기 쉬워진다. 작품의 광고대로 적절한 반전은 식상한 결말을 벗어나려 하며, 대사 또한 재치 있어 나름의 신선함을 준다. 탁구경기를 보듯 톡톡 받아치는 언어들. 하지만 그런 점들만이 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닐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이 주 전에 본 것이다. 그런데 이제와 쓴다는 것은 대국적인 뼈대만이 추려진다는 좋은 점도 있지만, 동시에 세부적인 심리 묘사나 세세한 무대 장치들은 잊었다는 말도 된다. 아무튼 지금으로선 인물들의 특징적인 표정 등이 간혹 떠오르는 것도 고마울 뿐이다.
무대를 보며 특이하게 느낀 점은 유리문을 통해 비친 인물(여자)의 동작을 통한 상황 표현과 회상 장면에서의 '여자'가 무대 안으로 순간순간 뛰쳐 나와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다는 점이었다. 영화나 드라마로는 회상 장면이 쉽게 연출되겠지만 연극에서의 제약으로 인해 그런 설정이 필요했던 것일까. 혹은 심리 묘사를 표현한 의도였을까.
노통의 소설은 아직 못 읽어 봤지만, 연극에 생략되었을 수많은 유려한 대사들을 확인하기에 필요한 독서는 즐거울 듯 싶다.
김포 공항도 그렇겠지만 공항은 다음 목적지를 향한 이동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배경이 되는 공항은 서로 간 타인임을 설명하기에 아주 좋은 설정인 듯 하다. 이런 공간에서 낯모르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건다고 할 때 우리는 의아심부터 일 것이다.
‘저 사람이 내게 무슨 목적으로?’
혼자임이 전제된 상황에서 예기치 않은 타인의 존재는 불안과 함께 오히려 짜증이 나는 법이다. 어쨌든 나리타 공항에서 그들은 그렇게 만난다. 낯선 남자, 즉 ‘적’은 어릴 때부터의 폭행에 관한 일화를 늘어놓기 시작하고 ‘나’는 듣기 싫은 이야기를 강요받는다. 하지만 어릴 때의 사소한 일로 자행되는 살인, 스무 살 무렵의 사랑하는 여자를 향한 살인을 이야기하는 ‘적’을 보며 ‘나’는 경악하고 그 곳을 떠나고자 하나 무의식중에 점점 그의 이야기에 매료된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를 의심하고 반목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가 일방적으로 ‘적’의 공격을 받는 것이다. 그것도 ‘나’에 대해 엄청 빠삭하게 꿰고 있는 야비한 적의 공략을. 게다가 ‘적’은 상황에 따라 거짓을 교묘하게 둘러댈 수도, 살인을 교사(巧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철저히 ‘나’의 관점이다.
이런 가정을 해 보자. 가령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려본 사람이라면 그나 자신을 죽이고 싶다는 말을 무의식중에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상상으로라도.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닌가. 예컨대 우린 현실에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치정극을 벌이고 싶진 않은 거다. 폭력의 미학이라는 말은 충분히 선정적이기는 하나 나는 이 말을 믿지 않는다.
-아까로 되돌아가서- 이토록 인간의 선택이란 극히 미약하고도 현실적인 것이지만 그래도 선택이 불가하다면 내 안의 악마는 이런 질문을 할지 모른다.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한다고 한다면 ‘나’는 그녀를 죽이고 함께 죽는 게 나을까, 그녀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게 나을까. 두 가지 상황에서 우린 갈등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적’은 정신적 쾌감을 위해 후자를 원한다. 이것으로 볼때 내 안의 ‘적’은 굉장히 솔직하지만 위험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반면 모범적이고 소심한 ‘나’는 전자를 선택하게 되고 공황 상태에 빠진다. 왜냐하면 ‘적’을 실컷 조롱하던 ‘나’는 자신의 말에서 무언가 커다란 결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실 살인 충동은 ‘적’이 아닌 ‘나’의 머릿 속에서 수십 번 자행되었고 살인 또한 나의 우발적인 행동에 의한 것이었음을.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애석하게도 '나‘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폭력에 노출되었다는 것은 스스로의(혹은 상대의) 가장 취약한 부위 -가장 무르고 연약한 부위-가 공략되었다는 말일 게다. 폭력의 피해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약한 아킬레스건을 가해자에게 들켰는지 모른다. '나'도 언어로 끊임없이 '적'의 치근거림을 당하며 이 점은 폭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피해자인 ‘그녀’ 또한 순진하게 ‘적’을 따라가다 두 번이나 치욕을 당하게 된다. 어쨌든 무방비상태로 자신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적'으로 인해 '나'는 당황해하며 우왕좌왕한다. 이 점은 '여자'도 마찬가지다. 친구로 오인하고 초대한 남자가 예전 자신을 능욕했던 사람이란 걸 안 순간 여자는 몸서리치게 되지만 두려움에 살인할 용기까진 없다.
이 작품은 폭력성을 통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상상(혹은 현실)을 꿈꾸게 해준다. 인간의 상상(혹은 현실)에서 폭력은 달콤하고, 음울하며 자극적이지만 지극히 사적이며 주관적으로 평가되는지도 모른다.
신문의 사건・ 사고란을 펼쳐 보더라도 본래보다 더 미화되거나 추하게 평가되는 것은 세상의 잣대이고 독자들에겐 결국 가십거리에 불과하다. 한번 찌르면 세상이 열 번 찔러 시체를 토막내 매장해 버리는 식이다. 혹은 자신이 죽이고도 골백번을 죽었는데 사람들은 아예 상대조차 해 주지 않는다.
“당신은 허공을 향해 말을 하고 있군요.” 그런 일을 애초에 없었다는. 뭐 그런 식이다.
“뭐가 이래? 너무나 불공평한 일이 아닌가. ” 피해자인 ‘나’는 이렇게 말하며 결국 공항에 남겨진다.
인간은 '적'과 함께 살아야 하고, 동시에 그대로의 ‘적’을 드러내기를 꺼려하기 때문에 지독히 두꺼운 위장술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교묘한 언어든, 기억 상실이든, 시간의 경과든 간에.
‘적’은 ‘나’의 죄책감을 되살리기 위해 살인 이야기를 했음에 틀림 없고 결국 나와 함께 죽게 된다. 악마적 본성은 자아를 잃을 때만 함께 죽는다는 파국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
주위에 널린 '공항'에서 마주치게 될 ‘적’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 하긴 분명 승산 없는 싸움이겠지만 말이다. 싸늘한 시신이 된 나는 사람들 사이에 별 주목을 받지도 못한 채 잊혀지게 될 것이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