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형제의 연인들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다락방과 소공녀 이후, 책에 관한 두 번째 기억.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서점이 편의점으로 바뀌기 전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날마다 새 책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친구들, 그러니까 친구가 몇 다스는 되는 유별난 인복을 가진 우리 엄마의 어린시절을 평가할 자격있는 이모들에 의하면, 내가 책을 좋아하거나 글을 쓰는 건 다 엄마의 피란다. 대체로 소설들, 종종 인문서나 실용서도 보였다. 인터넷 서점이 없던 그때는 학교다녀와서 엄마가 무슨 책 사오는지도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5권짜리 연작인데 3권을 엄마가 읽고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지만. 기억나는 것중에 은희경, 양귀자, 김진명 그리고 퇴마록 시리즈를 읽을 때 나는 고작 열세 살이었다. 누구나 책을 빌려갔고, 책들은 대체로 우리집으로 되돌아오지 못했다. 책은 돈이 아니었고,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 허리를 굽히거나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세상이었다. 두 번 다시 책을 빌려주지 않게 되었다. 책을 잃는 건 사람을 잃는 것만큼 싫었다. 세번째 기억은, 열여섯 살에 지금은 사라져버린 서면의 동보서적 2층에서 선뜻 못 고르고 선 내게 솔출판사 토지 1권을 건네주던 엄마다. 구판이 그 두꺼운 열 권짜리였나 그랬는데 대하소설에 일가견있던 나는 순순히 받아들고 돌아왔다. 

 

그후로도 종종 한국소설을 고르기 위해, 피아노 연주집을 들추러, 시집과 일본소설에 미쳐 들어갔다 문예지를 사들고 나오곤 했다. 친구와의 약속, 꿈을 키우던 곳. 나도 그때는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일하는 게 직업이 되면 둘도없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줄 알았다. 사람은 북적대는데 정작 카운터 앞에는 별로 사람이 없는 것도 서러운데, 나쓰메 소세키의 '소레까라(그후)'에 대한 사연으로 시작하는 '비브리아 고서당의 사건수첩' 보니까 서점이 없어지면서 추억을 순장하게 되는 사연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책 속의 추억도 책을 읽는 이에게나 생기기 마련이니까. 내게 아무리 좋은 책인들 그 마음이 거기까지 닿지 않으면 어쩔 수 없으므로. 학창시절 애달팠던 몇 번의 연애도, 눈물겨운 우정도 곧 아무 것도 아니게 될거란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서점이 화려하고 눈부신 여성복이 진열된 의류매장으로 바뀐 후로, 다시는 그 건물에 들어갈 일이 없게 되었다. 그 아래로 들어가 지하상가 몇 구역을 더 걸으면 알라딘 중고서점이 나온다는 건 안다. 지상에서는 이제 그곳에서 제일 큰 교보문고도.

 

살아온 시대와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예삿일은 아니다. 시간도 그렇지만 보통 사람의 삶이란 게 사실상 청룡열차가 아닌 한 뒤집어지지도 않는다. 소설, 영화, 드라마 속에서 그것도 주인공 한 명에게나 그런 일이 일어날 뿐이지, 그러고보면 또 수많은 이야기들중 상당수가 청룡열차가 뒤집어져 삶이 전복될만한 그런 사연을 갖지도 못한다. 그리 대단한 사랑도 없지만 매순간 사랑이 대단하지 않은 적 없었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사랑이 불안한 게 아니라 세상과 내가 불안하다. 사랑에 결선을 그을 용기가 없다. 시간의 흔적은 날이 갈수록 물러터져 더이상 출렁일 것도 없는 뱃살 속에나 도장찍는다. 흔적은 사람이 남겨놓은 것에 의해 기억된다. 작가가 없는 세상에 등장한 처음 만나는 소설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글은 얼마나 오랫동안 행여 멀리가는가. <그 형제의 연인들>은 서른 여섯의 박경리가 쓴 연애소설로, 1962년 10월 2일부터 1963년 5월 31일까지 대구일보에 연재되었다. 오랜시간 존재가 잊혀졌다가 대구 도서관에 보관된 신문철에 의해 비로소 세상에 나왔다. 옛날 소설은 지루할 것 같은 근거없는 편견을 딛고 보란듯이 문체, 인물, 배경, 구어체 모두 흠잡을 데 없이 향수어린 시절로 돌려놓는다. 어릴 때 딱 한 번 가본 밀양 촌구석 어느 다방이 생각났다. 전혀 상관없는 소설은 급작스럽게 나를 과거로 데려간다. 명절날 오후 차례지낸 후 외갓집으로 이동하던 중, 다툰 부모님이 울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들어간 곳에서 어린 나와 동생에게 사이다를 부어주고는 계속 다투던 캄캄하고 암담한 두려움. 어떤 소설의 이미지는 전혀 낯설게 생성된다.

 

개개인의 주관적 행복보다는 상자 속에 구겨넣어진듯 찌그러진 사랑에 대한 관습과 타성에 젖은 사회를 비판하고, 삶의 행로 즉 행복에 대해 고민하는 이야기의 전형이다. 이루어지느냐마느냐, 허락받느냐마느냐, 결혼하느냐마느냐 하는 티브이 속 흔한 사랑의 통속극이 아니다. 친한 친구의 누나이자 결혼에 실패한 혜원을 사랑하는 주성과 사랑하지 않는 현숙과 결혼해 자포자기한 삶을 살던 인성. 두 형제의 사랑은 온도나 질량의 측면에서는 다르지만, 허황된 사랑의 허무와 욕망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가기 위한 번민과 고뇌에 내비치는 내적갈등이나 심리요인을 되짚으며 인성과 주성 형제는 물론, 형제의 사랑을 받는 혜원과 규희, 그밖의 혜준이나 다른 인물들 감정을 짐작해나가는 재미가 있고, 시대에 걸맞는 독특한 구어체가 읽으면 읽을수록 멋스럽게 달라붙는다. 먼지묻은 옛날 영화 필름을 꺼내 털어보는 기분에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훔친다. 짜릿하고 비밀스럽다. 짧은 시간 꽤 많은 페이지를 읽어내렸다. 사랑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욕망과 질투다. 억척스런 현숙이 부리는 애욕과 기성의 권리가 주축이 된 질투, 생활력 강한 조강지처를 대하는 인성의 야비한 모욕, 행복없는 부부의 서로간 트집잡기, 측은하면서도 정이 붙지 않는 관계를 선뜻 끝내지 못하는 한톨의 책임감과 두려움이 생생히 전해진다. 낮에는 유치원 선생님, 밤에는 요부를 원하는 남자들의 속물근성 같은 욕구를 지켜주기 위해 많은 밤 얼마나 많은 조강지처들이 서러운 울음을 삼켜야 했는가.

 

뒤마의 '춘희'에 나오는 아버지의 역할을 답습한 전통적 아버지상, 희생과 책임을 강요하는 사랑의 사회상이 복합적으로 등장인물을 힘들게 한다. 애정과 세속적 타협 사이의 방황, 육욕과 소유욕을 능가하는 플라토닉적 사랑이란 물흐르듯 흘러 자연스레 서로의 그 어딘가에 닿는 일임을 그들은 모르지 않는다. 사랑이 끝나는 게 아니라 해가 지는 것이다. 함께있지 않는데 매순간 당신을 생각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자신의 세계 그리고 당신의 세계. 무너뜨릴 수 없는 각자의 견고함이 사랑의 강을 만든다면 범할 수 없다고 그들은 믿는다. 설득되고 회유당한다. 혼자 황야에 서있듯 몸서리치게 젖는 열등감, 열렬한 포옹과 뜨거운 키스 뒤에도 멍한 눈으로 응시해야 하는 서로가, 다시 만날 날을 재촉하며 헤어진다. 별빛에 전신이 젖는다. 잊고 싶은 것을 가장 잊고 싶어 술을 마신다. 되돌아온다. 지금이 지나면 지금이 다시 오지 않으므로 결론은 하나다. 찾으러 가거나 잊거나. 마침내 사랑이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연인들은 연인들이고 사랑은 사랑이다. 근데 왜, 맨날 같이 있는 엄마가 더 보고싶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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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3-04-30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이 리뷰를 읽으며 많은 이름을 떠올렸어요.

후겐두벨, 동보서적, 크시옹스카, 리더스 북스토어, 아직도 있는 영광도서와 이제 생긴 중고 서점 같은 이름들이오.

누구와 누구가 함께 섹스하는가가 가장 큰 관심사가 된다는 루이스 브뉴엘의 말도. 소설은 그것이 훌륭하든 훌륭하지 않든 작가는 세련된 거짓말을 영리하게 꾸며내는 사람들이란 생각도 들었어요.

결국 작가 자신일까? 라고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 또한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허구와 진실 사이를, 인물과 플롯 틈새를, 작품과 나 사이의 간격을 독자가 찬찬히 들여다보고 이야기는 진정성을 얻는다는 뜻일테니까요.

아이리시스 2013-05-01 00:44   좋아요 0 | URL
맞다, 여기도 영풍문고 매장이 없어졌죠. 동보서적이 없어지기 전에요. 사실 거기는 정말 아지트같은 곳이었는데. 시대적 특수성을 획득하지만 플롯 자체는 그리 독보적이거나 특별할게 없어져버린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이 소설이 잊혀질뻔했다가 다시 만나게되었다는데에 초점을 두고 봐도 좋아요. 자기 자신일까? 라는 질문은 잊었었는데 서른 여섯이었다니, 관찰과 경험이 적절하게 맞물려 나온 소설이기도 하겠어요.

그런데 쟌님 댓글을 제 서재에서 보다니! 하면서 감격중입니다.. 으흙흙.

blanca 2013-04-30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었어요? 당장 읽어봐야겠습니다.^^

아이리시스 2013-05-01 00:45   좋아요 0 | URL
활자중독 블랑카님의 독서를 응원합니다! 예전에 김약국의 딸들 읽으셨던 것 같은데, 맞죠? :) 가물가물.
(한줄에는 한줄 댓글로!!)

cyrus 2013-04-30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박경리 소설 생소하네요. 뭐 한국소설을 잘 안 읽어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요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3-05-01 00:46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은 인문책을 더 많이 읽으시는 것 같은데요. 한국소설은 꽂히는 시기가 따로있는것 같아요.
(한줄에는 한줄 댓글로2!!)

2013-05-02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02 2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13-05-09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경리 선생님은 토지로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다른 작품도 상당히 유명한 것 같아요. 저는 아직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까지만 봤네요.ㅎ 아끼던 서점들이 사라지는 것은 너무 마음 아프죠. 책 자체가 읽어야 하는 것, 수능용이 아니던 시절에는 문화의 하나였잖아요. 퇴근길에, 하교길에 들려서 책 구경을 하고, 맘에 드는 몇 권을 사면, 정성스럽게 포장까지 해주던 때가 생각나요. 그땐 서점을 운영하시면서 출판사로 확장하시고, 건물도 올리고 그랬던 분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대형서점 조차도 전전긍긍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네요.

아이리시스 2013-05-22 15:44   좋아요 0 | URL
근데 트란님,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 읽은 것만도 대단한 것 같아요. 저는 그걸 다 읽은 기억도 없는데요; 그때도 그랬다면 지금은 다이렉트로 끝까지 볼 가망이 희박해요. 출판사만 그렇겠어요. 이젠 뭘해도 자수성가는 소수의 일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이 시대는, 뭘 하든, 벌기 보다는 현상유지가, 현상유지보다는 까먹기가 더 쉬운 것 같아요--;

잘 지내셨죠? 답글이 너무 늦었지만 답글은 아무리 늦어도 꼭 달 겁니다..(푸핫)

2013-05-11 2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2 15: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0 0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2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