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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ㅣ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죽음 자체나 죽음을 둘러싼 것들에 대해 언제나 말할 수 있다는 믿음은 오만이다. 누구 하나 죽어본 적도 없는 이들이 모여 속닥속닥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에는 죽음을 바라보는 산 자의 입장 외에는 들어있지 않다. 산 자들이 말하는 것에 죽음의 본질이 들어있을 리 없다보니, 그 어떤 말도 공허하고 피상적으로 들릴 뿐이다. 사후세계에 관한 얘기들에도 귀기울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나는 관념으로서의 죽음이 두렵지 않다. 죽으면 저 세상에서도 가족들과 잘 살 것 같다. 심지어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지금 우리 부모님 말고는 다른 가족을 떠올릴 수가 없지만 그래, 철없이 아직도 그런 걸 믿는다. 루크레티우스처럼 내가 '없던' 과거와 내가 '없을' 미래를 나는 받아들인다. 부모님은 내가 '없던' 세상을 살았고, 내 자식은 내가 '없을' 미래를 살테니 거부할 수 없는 진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 파헤치고 논의하고 듣고 싶어하는 심리에는 해보지 못했다는 것과 할 수 없다는 것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죽고나면 어떨지 궁금해서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여기부터 잠시 경건해져야겠다.
지난해 2월, 외할아버지를 시골집 뒷산에 묻을 때, 입관식에 참석한 나는 멀찌감치 지켜보며 서있었다. 대통령 선거직전, 형, 곧 따라갈게, 했던 유난히 사이가 좋으셨다는 작은 외할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예전과 같은 장례식장으로 달려가지 않은 것은 그가 내 직계가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무원 외삼촌을 비롯한 회사원은 직계가 아니라 허용되지 않는 휴가 때문에 퇴근 후 몇 번이고 오갔다. 그때 나는 혼자 집에 있었다. 낮에는 부모님 손잡고 가서 투표했는데, 밤에 부모님은 장례식장에, 나는 집에 덩그러니, 그날은 그랬다. 두손 모아 간절히 기도도 했고,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갑작스런 비고와 생각대로 되지 않던 선거결과에 나는 이성의 초주검 상태를 겪고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 선거결과가 중요하다니. 산 자의 이기심이란, 손녀의 되먹지못한 도리란. 그날 밤 결과를 보지 못하고 장례식장을 지키던 아빠는 취한 탓에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조선팔도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 유명한 세대. 다른 선택이란 이유로 쏟아지는 눈초리. 빨갱이 공산주의자 소리까지. 소수의 정치성향으로 가는 곳마다 어떤 테두리에서 거부당한 부모님. 처음부터 얘기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반대진영 편드는 말도 듣기 싫더란다. 그래서 말해버리면 분위기가 이상해졌다고. 지거나 약한 쪽이 목소리가 큰 법이라 아빠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아빠는 한동안 말을 잃으셨고, 엄마는 참석해야 할 대부분의 송년모임을 접었다. 신경질난다고 탈퇴하라던 카톡의 대화창에는 '박정희 5.18 박근혜 51.8%'의 정보가 동창과 사촌들로부터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엄마는 아직도 카톡에 재가입하지 않았고 친구로부터 오는 전화를 거부하고 계신다. 장난 반 진심 반이지만 지켜보는 일은 더없이 착잡하다.
우린 살아서 선거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반복할 수 있었다. 며칠간 나는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분노와 한탄, 순응과 체념이 순차적으로 혹은 동시에 찾아올 때면 미칠 것 같긴 했어도 살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죽음과 삶의 거리는 정말로 멀게 느껴졌다. 살아있는 자가 말할 수 있는 죽음이란 것은 아마 입관식을 보며 고개를 돌리거나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다만, 살아있음을 통해 죽음을 비추어볼 수 있을 뿐이다. 셸리 케이건이 강연하는 죽음에는 '오직 육체로서의'이란 말이 생략된다. 내가 다치거나 누군가를 잃음으로서 찾아올 고통이 두렵지, 죽고나면 아무 것도 없을텐데, 대체 어떻게 죽음이 두렵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은 '다 있다'는 말인데, 없는 것이 '없는'데 어째서 '다 있'는 거냐던 말장난의 논리같다. 돌고 돌아서 돈이라 하고, 살고 살아서 사람이라 한다던 우스갯소리. 말은 늘 이승에 남은 자의 것이어서 영혼이 실리지 않는다. 내뱉어진 말이 갈 곳을 제대로 찾기란 어렵다. 허공에 떠도는 냄새 없는 말이 때로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가시기 며칠 전을 회상해보면 외할아버지는 죽음을 예감하셨다. 사흘 전에도 정정하시던 외할아버지가 검사차 계시던 병원에서 자꾸만 집으로 가자고 했을 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면, 가족들은 힘든 검사실과 좁은 입원실에 간병인과 눕혀놓는 대신에 고향집으로 모시고 갔을까. 가끔 생각한다. 평생 마주앉아 식사하던 옆지기가 단 사흘 만에 주검으로 돌아온 걸 보고 외할머니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두 분께 죽음은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니었을까. 작은 외할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사고로 가셨다. 갑작스레 쉬어지지 않는 숨, 알아챌 틈도 없이 주무시는 상태에서 그렇게. 나는 죽음에 대해 알 수 없었다. 그들에게 반드시 죽음이 두려움이었을까. 하지만 내게는 두려움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다. 살아있는 내게 죽음은 단지 그것이다. 내가 죽으면 모두와 헤어지는 것, 내가 좋아하던 것을 계속 좋아할 수 없는 것이 두려운 일이 되겠지. 말이 반복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의 죽음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산 자가 말하는 죽음이다. 지독한 슬픔도, 끔찍한 고통도, 실체적 두려움도 모두 반사된다. 죽음은 육체가 소멸하는 것이고, 죽고나서도 한동안은 육체가 존재한다. 이것은 무엇인가. 죽은 후에 영혼이 남는다면, 죽음을 육체가 소멸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게 과연 옳은가.
새로운 주장 하나 없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다각도에서 보는 반론을 추가하여 죽음의 이론을 역설하는 소거법 형태를 띤다. 실제 소거법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죽어보지 못한 자가 죽음을 얘기하려면 한 면에서 볼 수밖에 없고, 다양한 시각에서 시도하더라도 한계를 갖게 된다. 육체의 멈춤이나 사라짐이 죽음이라면 영혼이 떠난 후에도 한동안 남아있는 육체나 뇌사자, 식물인간의 상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육체의 소멸 다음은 영생이다. 영혼이 존재하는 세상에는 죽음이란 게 없는 것인가. 어쩌다보니 영원히 살 수 있는 삶을 획득하게 된 뱀파이어, 늑대인간, 드라큘라는 또 고통이나 회의가 없겠는가.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라던 카프카의 말 속에 든 삶의 유한성과 그 진리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삶이 그렇듯 죽음 또한 반복되지 않는다. 그로인해 누군가의 삶이 더욱 악착같아지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 되기도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얼만큼 살 것인가'보다 중요해지는 지점에서 인간과 동물을 가를 수 있을 것 같다. 매슬로의 욕구단계이론을 착실하게 거치는 것 또한 인간, 주어진 생에 거의 대부분의 선택권을 갖는 것 또한 인간이다. 어떤 인간도 서로 다른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내가 나라는, 내가 하나라는 증명이라고 해도, 살아있는 내가 육체로서의 나인지, 영혼으로서의 나인지 해명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러니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졸지 않고는 이어갈 수 없는 지리한 강의록이다.
죽음에 대한 놀라운 사실 두 가지. 죽음은 미스터리가 아니고,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것과 인간은 모두 홀로 죽는다는 것.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죽음의 본질이 나오고, 이로서 죽음이 곧 나쁘거나 두려운 것으로 인식된다. 이로서 '박탈이론'은 절대성을 갖지만, 에피쿠로스의 입장은 수긍을 이끌며 혼란스런 문제를 제기한다. 죽음은 나쁠 때가 없다는 것. 죽기 전의 인간은 모두 존재하여서 비존재하는 순간이 없는가라는 역질문. 그렇다면 이 세상을 절망으로 살거나 죽지 못해 산다고 말하는 이들의 속내를 어떻게 읽어내야 하나. 내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은 태어나기 전이나 죽고난 이후가 같은데, 어째서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은 전혀 아쉬워하거나 기억하지 않으면서 무작정 죽음은 나쁜 것으로 매도하고 두려워하는가. 현대철학자 토머스 네이글은 말한다. 1944년에 태어나는 것보다 1954년에 태어나는 것이 내게 더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더 일찍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나쁜 것인가?"
그러므로 가장 끔찍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p.306)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의 주인공 걸리버는 영원히 죽지 않는 나라에 들어간다. 처음에는 아주 환상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가 나이를 먹는 동안 서서히 노화하고 쇠약해져서 정신은 희미하고 몸은 허약하고 정신은 병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스위프트는 영생을 끔찍한 형벌로 묘사한다. 몽테뉴 역시 노년의 고통과 비참함에 종지부 찍어주는 죽음을 축복이라고 말했다. 태국음식을 아무리 좋아하더라도 수천, 수백만, 수십억, 수조 년간 매일 먹어야 한다면 그건 고통이다. 노는 것이라고 다를 바 없고, 퀴즈풀이나 영화감상과 독서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수십억 년간 매일 같은 것만 해야 한다면 그건 차라리 죽음보다 끔찍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미스 USA 대회의 한 참가자가 남겼다는 이 말에 동의한다.
영원히 살지는 않을 거예요. 그럴 수 없기 때문이죠. 만약 영원히 살 수 있다면 그것을 택할 테죠. 하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죽을 수 있는 거예요. (p.351)
삶에 있어 행복(쾌락)과 고통의 지수를 산출할 수 있을 것이다. 낙관론자, 비관론자, 중간론자나 쾌락주의자, 도덕주의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도 있지만 그로인해 삶의 질을 매길 수 있다. 쾌락의 지수가 높다면 살만하다고 여기는 반면, 고통의 지수가 높으면 자살에 닿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스스로를 죽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오죽하면이라든가 웬만하면이라는 말 속에 담긴 끔찍한 일회성 충고를 나는 거부한다. 내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살하려는 사람을 막아야 하는 건 살아있는 자의 의무이자 책임으로 여기지만, 이미 죽은 사람을 향해 이런저런 말들이 떠도는 세상이 끔찍하다. 자살의 도덕성과 합리성을 논하기에는 우리 모두 삶의 비참함과 고통을 너무도 잘 알지 않은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는 계속 살겠다는 의미이다. 헤어질 걸 알기에 사랑하고, 다 나올 걸 알지만 일단 먹고, 죽을 걸 알기에 더 의미있고 보람차게 살아가는 것. 죽음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죽음을 곁에 두어야 한다. 유한한 시간을 무한히 사용하기 위해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셸리 케이건의 강의에는 강요와 주장이 없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입장을 모두 대변한다. 철학자와 문학가, 작품과 주장을 적절히 사용하여 가만히 죽음 곁으로 우리를 데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