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해졌다. 가을이라 그런 건 아니다. 청량한 가을을 좋아하는 그녀와는 달리, 나는 가을에만 한없이 깊은 곳으로 침잠한다. 한때는 떠오르지 못할까봐 두렵던 날들도 있었다. 읽을 때마다 스펀지 같은 뇌가 튀어나온다. 온 감각을 건드린다. 흡수력이 자각된다. 숨겨져 있던 알싸한 감정이 무심코 밀려올 때가 있다. 피해서도 안 되고 피할 수도 없다. 주로 환절기에 환각처럼 몽롱한 상태에서 당신에게 피해입히는 것도 모르고 끙끙 앓는다.
어째서, 이런 하늘인가. 이토록 탄성을 자아내는 초가을 하늘은 파랑이 섞인 잿빛이다. 때로 너무 파래서 곧 쏟아져내릴 것만 같다. 어떤 하늘 아래 죽고 싶으냐 물어오면 지금처럼 이런 색이면 좋겠다고 대답할 그런 빛깔의 하늘이 수채화처럼 펼쳐지는 이 계절. 당신이 그런 것처럼 나도, 많은 호사를 누리지는 못한다.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의 가을하늘 사진)
분량이 적어 만만해하다가 가볍게 보지말란 듯 문장에 사로잡혔다. 내밀한 고백록으로, 간절함의 시어로 쓰였다.
기다림을 실현하는 간절이다.
뭐가됐든 앉은 자리에서 끝장내려고 하는 나에게는 대체로 어려운 일.
다혈의 기질로는 미처 쓸 수 없을 풍경들. 숨이멎는 독백들. 흩어지는 시간들. 스며드는 뭉클함.
굿바이, 산양의 왕.
서로가 서로에 대해 주어진 어떤 시간이 째.깍.째.깍. 걸어온다. 나에게로.
영화 <네 번>을 보면서는 숨을 참았었다. 헉- 무심결에 목구멍에서 이런 탄성이 나왔다. 경이로웠다. 이탈리아 산골마을에서 촬영되었다는, 소리와 배경과 이미지, 그외의 모든 것을 제거하고도 여전히 모든 것이 남아있는 벅찬 감동. 어떤 문화도 알지 못한다. 오래 전에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영화를 보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경 해왔다. 그곳에 대한 동경은 한 줄기가 아니라 수많은 줄기라, 벅찰 때가 많았다. 쓰일 곳 없을 언어를 잘할 수 있길 소망했다.
이제 나는, 내 것을 더 세심히 빚어내자는 마음 뿐이다. 내 언어를 갈고 닦자는 다짐 뿐이다, 그래, 내 언어.
당신의 것 말고 내 것. 소유.
눈부신 자연의 숭고함.
생사를 가로지르는 생명의 진실.
팔딱거리는 생동과 고요 속에 매몰된 신비.
끌어안음 또 끌어안음.
화해와 용서.
유감없음.
어째서, 어릴 적 본 수많은 쓸쓸한 풍경들이 떠올랐을까.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비릿한 질감이 경이와 고요를 흘러넘치게 한다. 간혹, 아무 것 없을 때, 세상이 싫어질 때, 사람이 두려울 때, 아프고 괴로울 때, 그리울 때, 쓸쓸할 때, 희망할 때. 어떤 영화는 모든 걸 내어주기도 한다.
산속을, 산길을 걸어보지 않은 자, 오롯이 혼자가 되어보지 않은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산길은 산길을 걷는 자만이 주인이다.
산양의 왕과 평생 그를 좇는 한 남자 사냥꾼의 얘기다. 뭉클한 것이 금새 텅빈 마음을 촉촉히 채운다. 고백은 무겁고 공기는 뜨겁다. 삶과 죽음, 쫓김과 당함, 자연과 속세, 거대한 자연의 룰이 생생히 살아숨쉰다. 산양은 늙어 죽어가고, 사냥꾼은 오래 전부터 열의를 다해 쫓으면서 삶을 보낸다. 산양은 제 자리를 내어주고 땅과 흙으로 돌아갈 때임을 직감하면서 사냥꾼을 조롱한다. 사냥꾼은 산양의 조롱에 번번이 당하면서도 다시 또 다시 산양의 왕을 잡아 주머니 채우고 배불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찾아헤맨다. 살기 위해, 살아있기 위함이므로 모두 이 이상 열렬할 수 없다. 도망하는 자와 도망치는 자를 쫓는 자는 간혹 전복된다. 삶과 죽음이 그러하듯, 이 세계의 룰이 그러하듯.
혼자가 아님에도 둘은 처절하게 독자적이다. 어릴 때 사냥꾼의 총에 어머니를, 독수리의 탐욕에 누이를 잃고 외롭고 절박하게 획득한 이 자리를 퍼질러놓은 자식들 중 하나에게 내어주어야 하는 산양의 왕이 처한 운명은 울음을 머금고 있다. 산양에게는 해가 없다. 내리막이 보인다. 그의 절정이 언제였는지, 만개한 꽃처럼 화사한 시절이 언제였는지 짐작하지 못한다. 소리없이 뒤에서 치는 독수리 보다 차라리 발소리와 냄새가 흔적을 속삭여주는 인간이 낫다는 산양의 목소리는 짐짓 으스스하다. 낫다면 뭐가 더 낫고, 나쁘다면 뭐가 더 나쁜가.
에리 데 루카는 '일생에 한 번은 보고 죽으라'는 항구도시 나폴리 출신으로 이탈리아 중견작가다. 고산지대 등반가로서의 경험을 살려 철학적 고제인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 무거움과 가벼움의 한 뼘 차이를 인간의 팔에 올라타도 느껴지지조차 않는 나비의 무게에 비유한다. 인간의 육체에서 갓 빠져나온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던 미국의사 맥두걸 박사의 이론만큼이나 중의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하다. 헤밍웨이 문학의 정점 '노인과 바다'에 비견되는 소재의 무거움을 갖지만, 언어는 훨씬 더 시적인 풍부함으로 씌어졌다. 시종일관 폐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움이 느껴져, 살아있음이 성스럽다. 산양이 아닌 것도 사냥꾼이 아닌 것도 차라리 축복이지만 세상은, 세상을 지켜주는 건 따로 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뭐 그런 얘기가 아니다.
살아온 만큼 살아갈 것이라 믿는 이들은 없다. 양보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삶이지만 되돌려줄 수는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얼마되지 않는다. 오만불손한 마음가짐들이 모욕과 굴욕으로 한 차례 스쳐가고나서, 비로소 내가 주인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살기 위해 죽을 걸 알면서도 결투하는, 산양의 왕과 사냥꾼의 대면은 차라리 희열이었다. 막을 수만 있다면 막아주고픈 재앙이고 슬픔이었다.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더라도 나는 수평을 맞추기 위해 손을 뻗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다. 마주해야 한다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의 어떤 무게. 하지만 마지막이 마지막이 아니라면 더이상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떤 일을 더 할 수 있을까.
산양의 왕과 사냥꾼이 어떻게 되었는 지는 말하지 않는 게 옳겠다. 중요한 건 산양의 왕과 사냥꾼이 떠난 자리에 나비가 가만히 내려앉았다는 사실이다. 나비의 무게에 심장이 멈추고, 나비의 무게에 세상이 끝나고, 나비의 무게가 생사의 경계에서 오만한 인간을 지켜주었더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에리 데 루카가 과연 어디있다 이제 나타났을까를 물어야 한다. 그는 스무살에 미장이로 일하며 쓴 소설을 마흔에 출판할 정도로 열성적인 작가였다. 작가라는 타이틀 앞에 그에게 붙는 직업적 수식어는 많고, 과거에는 더 많았던 것 같다. 온전히 우리 것이 아닌 문학, 온전히 우리 것이 아닌 이 세상, 온전히 내 것도 아니고 당신 것도 아닌 시간과 공간. 빌려온 것을 소중히 내어놓는 것이야말로 삶과 죽음 앞에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다.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제목으로 쓰면서 영원한 재귀를 꿈꾸는 니체가 말한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인간은 깃털처럼 가벼운 존재라 언제 어디서든 부재하고, 내일이면 부존재할 수 있음을 역설하며 존재의 무거움에 대해 말했다. 에리 데 루카는 심장에 내려앉는 나비의 무게로 존재의 숭고함에 대해 역설한다. 두 작가가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클리셰는 결국 같은 셈이다.
다시 질문. 존재는, 자연은, 인간은,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어버린 모든 것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것인가, 혹은 무거운 것인가. 누군가를 돕는다고 믿는 많은 순간이 민폐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나을텐데. 답을 알려고 한다면 이미 죽은 후여야 하겠지. 살아있는 한, 인간은 삶과 죽음 모두를 알 수가 없는 거겠지. 다만, 살아온 날들의 순간 위에 생의 마지막 순간을 포개 죽어서도 기억해보려 안간힘 쓸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갈고 닦아, 새로이 보고 느끼고 쓸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