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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94
프란츠 카프카 지음, 김재혁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평점 :
반드시 이달이어야 했다. 영화 [아메리칸 크라임]을 경악하면서 보고 난 이후 법정 스릴러의 대가 존 그리샴을 닥치는 대로 읽고 영화를 봤다. 그리고 마지막은 카프카로 끝내기로 결심했다. 그 정도의 상처는 없지만 법을 믿지 않는다. 아니, 법이 법정에서 진실을 밝혀줄거란 달콤한 희망을 더이상은 믿지 않는다. 법정 범죄물과 카프카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의식의 흐름처럼 떠밀려온 독서기가 중요할 뿐. 존 그리샴의 소설은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The firm, 1991)>에서 시작한다. 그의 출세작이면서 1993년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야망의 함정]을 낳았다. 10년 후의 이야기를 담은 동명 드라마가 제작되었는데 이 드라마는 정확히 영화의 결말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만하면 텍스트의 무한확장을 제대로 체험했대도 과언 아니다. 이전에 <타임 투 킬(A Time To Kill, 1989)>은 그의 처녀작, 이후 <펠리칸 브리프(The Pelican Brife, 1992)>는 줄리아 로버츠와 덴젤 워싱턴 주연으로 1993년에 영화가 되었다. 물론 전작의 영화화는 좀 더 훗날 1996년도. 이후 <의뢰인(The Client, 1994)>, <가스실(The CHAMBER, 1996)>, <사라진 배심원(The Runaway Jury, 1996)>, <레인메이커(The Rainmaker, 1997> 등이 영화화 되었고, 작년에는 소설 <고백(The Confession, 2010)>이, 올해는 소설 <소송사냥꾼(THE LITIGATORS, 2011)>의 번역본이 출간됐다. 그는 법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10년여간의 변호사 생활로 얻은 다양한 체험을 법정 스릴러에 녹여내며 출간되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책이 아니면 영화를 달라, 우스갯소리가 통할 만큼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도 많다.
우리나라 법정 드라마는 많지 않다. 재미로 다루기에 사법부가 지나치게 기득권을 갖기 때문에 미국보다 많이 만들어지지 않는 듯하다. 배심원제가 자리잡은 미국과 아직은 법전에 기댄 법관의 의견을 더 중시하는 한국의 사법제도의 차이를 모르지 않지만 범죄 스릴러가 경찰 수사물로만 그려지는 점은 많이 아쉽다. 물론 배심원제 탓만은 아니고 이 제도의 헛점 또한 없지 않다. 정확하기 위해 제3자의 일반인들을 통해 죄의 유무를 따지자는 건데 이게 어디까지 객관성을 획득할지 알 수가 없다. [Law & Order]는 대형 시리즈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범죄 전담반]으로 더 익숙하지만 사실 이건 스핀오프 시리즈 중 하나다. SVU, CI, LA, UK는 전부 스핀오프 시리즈지만 오리지널 시리즈는 시즌 20으로 2010년 종료된 [범죄전담반]이다. 이후 [저스티스], [보스턴 리갈], [해리스 로우], [페어리 리갈], [데미지스] 등이 나왔지만 늘 첫 정을 따라잡지 못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영화 [의뢰인]과 [부러진 화살] 같은 법정물은 나올 때마다 뜨거운 감자이며, 숨겨져 있는 사법재판 과정과 진실 규명에 기대를 갖게 한다. 발로 뛰는 경찰 위에 검찰이 있다면, 상명하복 관계를 최대한 이용하는 행정부 소속 검찰에 대응하는 사법부가 있다. 진실 규명과 다수 국민과 소수 억울한 자들의 보호가 목적인 점에서 소속 다른 두 기관이 동등한 역할을 해야 하지만 예를 들어, 개인의 자유와 다수의 행복을 논할 때 법조인은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한다. 카프카 또한 법 앞에서의 인간의 부조리, 심판자의 자리에 있다고 믿는 인간이 심판 당하는 자의 위치에 서도록 묘사하면서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의 구속과 억압에 한없이 무력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보편적 물음표로 승화시키며 관습과 체제 앞에 진실이란 무엇이며, 인간이란 한낱 보잘 것 없는 개에 불과하지 않냐고 묻는다.
그는 마흔 살에 악화된 폐결핵으로 죽었다. 카프카는 당시 체코에서 소수민족이었던 유대인이었고 아버지와도 갈등을 빚었으며 글을 쓰고 싶어했으면서 공부를 관두지 못해 법학 박사학위를 땄다. 너무 일찍 죽었기에 그가 남긴 어떤 작품에 대해서도 그의 입을 통해 듣지 못했다. <소송> 또한 그의 사후에 출간된 소설이며, 그가 남긴 세 편의 장편소설 중 하나다. 실존철학에 대해서만큼은 사르트르와 카뮈가 그에게 빚지고 있다. 그가 조금만 더 번듯한 작품을 많이 내고 조금만 더 번듯하게 긴 인생을 살았다면 실존과 부조리의 수사 앞에는 카프카라는 이름이 가장 먼저 놓였을 것이다. 체코 출신이면서 독일어 사용을 강요당한 유대인 카프카가 아니라. 그는 장남을 번듯하게 키워내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강압에 의해 독일인 학교에 다녔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의 공용어는 독일어였고, 체코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 중이었으므로 학교에서 그는 아웃사이더였다. 여기와 저기에 속했지만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했던 그의 이방인적 고독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붙박혀있다. 완벽한 독일어를 쓰기 위한 피나는 편승과 자국민(체코인)들이 느끼는 배신감 사이에서 방황하면서도 그는 결국 독일어로 써내는 작품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 없었다. 그 경계에서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한 채 행간 사이를 빙빙 도는 의미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내가 상상이나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가 쓴 많은 문서들은 유언에 따라 소각되었다. 우린 그의 실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최소한에 기댄 유추조차 할 수 없다. 떠도는 의미들을 붙잡고 유령처럼 상상한다. 카프카적으로. 카프카답게 카프카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어렵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만 그것들이 옳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만큼 난해하다. 사회적 모순 한 번 겪지 않고 자라나는 청춘이, 꿈나무가 어디 있으며, 어른은 완전하게 땅에 붙박은 존재인가. 아니다. 카프카의 고민은 여전히 그만의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한 <소송>은 읽혀야 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의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며 이토록 준수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 어째서 자기만의 방에 틀어박혀 글을 썼을까 하는 의문에 시달렸다. 그는 희생자였을까, 승리자였을까. 항간에 그가 남긴 문학사적 자취가 웬만한 독일 작가를 능가한다고도 한다. 카프카를 독일인으로 처음 아는 사람도 적지 않으니 그는 성공한 셈일까. 스스로는 행복하다 여겼을까. 대답은 들을 수 없지만 그는 여전히 궁금하게 한다. 우리에게 늘 카프카적인 생각을 하도록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가 되었으니. 대단하다. 릴케-카프카-쿤데라로 이어지는 체코 현대문학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1918년에 해체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후 탄생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경계에 세 문인이 나란히 연대기순으로 존재한다. 언젠가 동유럽에 가게 될 날이 온다면 세 명의 작가를 마음에 담고 카를교를 열 번쯤 건너야겠다. 동양의 작은 여자아이에게 프라하는 붉은 눈물을 흘린다고, 미치도록 슬프다고, 내 딸에게도 그렇게 가르칠 거라고 말해야겠다. 오늘은 어제와 다를 거란 기대와 희망 속에 산다. 기대와 희망이 한순간에 후회와 절망으로 바뀔지라도 변화를 희망하는 건 보편적 진리다.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죽어가며 K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죽는 순서는 어째서 악의 계수가 클수록 먼저이지 않는지를 원망했을까. 형태 없는 제도와 체제, 권위주의 속에 희생되는 자기를 반성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차례가 온 것이 자랑스러웠을까. 이유 없이 심판자가 되고 이유 없이 심판을 당하는 인간들은 누구나 이중 지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실체 없는 경계에 있다. 오늘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로 존재를 확인하고 검사 받는다. 일련의 절차에는 오류가 없을 거란 믿음으로. 강력하게 존재의 존재와 삶의 삶을 가만히 놓는다. 여전히 정확하게 놓여야 할 위도와 경도를 알 수도 없고 알 수 있으리란 희망도 없지만 모든 삶이 부서지기 전에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 카프카다. 변신이 간절하지만 그럴 수도 없고, 좁은 성 안에 갇혀 누군가를 심판하려 하지만 되려 심판 당하는 어리석은 존재를 인간으로 규정한 것은. 이 순간 카프카적으로 사고를 전환하라고 강요하는 건 카프카가 아니라 실존이다. 나는 살아있고 살아있는 이는 생각해야 하므로. 그게 옳다는 걸 미래의 딸에게 전해줘야 하기에. 그는 죽어버림으로서 작품과 말에 더 큰 가치를 부여했지만 나는 살아서 더 많은 말을 하고 더 많은 뜻을 전해야겠다. 가능하다면. 그러면 이 리뷰는 대체 정체가 뭘까. 나는 요제프 K의 대변인인가, 카프카의 대변인인가, 그것도 아니면 여전히 모르면서 말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걸까. 세계는 상상하는 대로 가고 상상하는 만큼 움직인다. 왜 죄인이 됐는지, 왜 죄인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무엇이 죄고 또한 죄가 아닌지 카프카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가 말하지 않아서 우린 몰라야 할까. 짧고 쉽고 간결한 문장 행간에 든 엄청난 활자들의 의미가 밤잠 자는 도중 나를 덮칠까봐 겁난다. 오늘밤 나는 혼자 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