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에 죄책감이 있다. 읽히려면 간결하고 정확해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더군다나 프로도 아니라 누군가에게 끝까지 읽힌다는 욕심을 오래 전에 버렸다. 담아야 해서 좀 길다. 평소 쓰던 것보다 더 길다. 이 페이퍼는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 몇 편에 관한 얘기고, 오랜만에 찾아보니 밥 먹으면서 읽어도 시간이 모자랄 엄청난 양의 단편이 있더라는 것과, 이제부터는 일부러라도 종종 읽겠다는 다짐이자, 어쨌든 이런 생각으로 글이 시작되었다는 뭐 그런 얘기.

 

단막극을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목적이 뚜렷했으나 단막극을 본다고 대본을 쓸 수 있을 리 없었고, 영화대본을 들여다본다고 시나리오가 뚝딱 써지는 것도 아니었고, 주구장창 연극을 봐도 희곡이 짠하고 나타날 리 없었다. 왜냐면 그것들은 고스란히 내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법인데 나에게는 하나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패션잡지 에디터가 되기 위해 수 십통의 이력서와 자소서를 우편과 멜로 뿌린 동기는 비로소 연락을 받고 뛸듯이 기뻐하며 간 면접자리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하도 간절히 이력서를 보내기에 얼굴이라도 꼭 한 번 보고 싶었어요. 궁금했거든요. 결과는 낙방. 간절한 것이 곧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서 만난 그는 나를 두고 '쓰잘데기 없는 학과'에 다닌다고도 했었다. 푸핫. 옆에 있던 건축학도 친구가 웃었고 공대를 나온 그도 웃었고 나도 웃었다. 그래, 21세기에 글로만 먹고 살겠다는 건 얼마나 가시방석인가. 부모님에게 못할 짓인가. 자책하진 않았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어쨌거나 글은 실재 혹은 실존과 비교하면 정말 안드로메다다. 이 왜곡 많은 (글자의)이미지가 나와 당신 사이에 저질러 놓은 섬은 또 얼마나 넓은가. 사랑한다는 고백이 날아가는 속도는 얼마나 덧없으며 또 불가능한가. 나는 수줍은 대신 말을 잘했다. 글이 되기도 전에 생각이 말로 먼저 튀어나왔다. 지금은 (반만 진심인데)말보다 글을 더 잘썼으면 좋겠다. 글보다는 말이 더 먹히니까 완전히 진심은 아니다. 확신이 들지 않는다. orz

 

어쨌거나 아주 오랜만의 한국문학. 밤새워 읽고 보고서를 작성하던 여러 밤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때의 숭고했던 자세는 앞으로 영영 없을 듯해서 서운하고 서글픈 마음. 스물 셋 커피숍에서 데이트 약속을 기다리며 핫초코를 시켜놓고 전자사전을 펴 뜻을 찾아가며 읽던 <혼불>하며(과제였다), 온갖 문예지들 그리고 수상 단편들을 날마다 읽던 추억이 아련하다. 누리는 시간과 해야 할 일들이 당연히 내 것이 아니란 걸, 그땐 왜 몰랐을까.  

 

 

2011년 단 며칠, 부활한 TV문학관 속에 이 작품이 있었다. 광염+소나타=광기 어린 음악을 만드는 예술가 얘기다.

 

 

 

 

 

 

 

 

 

 

 

 

 

 

 

역시 C샤프 단음계로서, 제일곡은 뽑아 먹고, 아다지오에서 시작되는데,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 수평선 위로 넘어가려는 저녁 해, 이러한 온화한 것이 차차 스케르초로 들어가서는 소낙비, 풍랑, 번개질, 무서운 바람 소리, 우레질, 전복되는 배, 곤해서 물에 떨어지는 갈매기, 한번 뒤집어지면서 해일에 쓸려 나가는 동네 사람의 부르짖음-흥분에서 흥분, 광포에서 광포, 야성에서 야성, 온갖 공포와 포학한 광격이 눈앞에 어릿거리는데, 이 늙은 내가 그만 흥분에 못 견디어, 뜻하지 않고 '그만두어 달라'고 고함친 것만으로도 짐작하시겠지요.

 

이 대목은 어떻게 하면 알아들을 수 있지? 음대 갔었다면? C샤프 단음계에서부터 머리에 쥐나기 시작. 피아노를 들으며 이런 감상이 나올 수 있다면 글이 아니라 음악을 해야 마땅하다고 고개 끄덕끄덕. K선생도 좀 멋있는 사람 같다. 여튼 '성난 파도''피의 선율'은 백성수의 비상한 광기와 열정으로 '우연히' 지어진 곡조다. 방화와 살인. 무너져내리는 잿더미와 이름 없는 자를 갈갈이 찢는 것에서 이 세상 모든 영혼을 울리는 음보가 태어났다면, 천재 작곡가(음악가)가 났다고 칭송할 수 있을까. 김동인의 <광염소나타>는 천재성을 지닌 한 남자가 계통적 훈련 아닌 광기로 뽑아낸 음악으로 인해 짙은 예술성을 획득하지만 존재로서의 파멸을 촉진하며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예술품과 예술가의 반비례 관계를 포착하여 진정한 예술가의 위치를 묻는 동시에, 예술은 어디까지 타당화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그의 방화는 어머니의 병환 중 지극히 가난해서 병원에 가지 못하자, 약국 카운터에 약사는 없고 돈이 올려져있는 것을 우연히 보고는 그 돈을 훔친 것이 발단이다. 주인에게 잡혀 감방에 6개월을 있을 때 어머니는 아들을 부르며 기어나와 거리에서 죽었다. 아무리 애원해도 외면했던 당시 주인집에 홧김에 불을 지르고 도망친 성당에서 광기에 휩싸여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K선생의 눈에 띈다. K선생의 백성수 두둔은 사실상 용인될 수 없다. 어떤 가치로도 방화, 시체 강간, 살인 등을 용인할 수 없는 것이 오늘 날의 시각이기도 하지만, 그로인해 설명할 수 없는 흥분과 광기를 갖고 천재적 예술성을 발휘해 어떤 창작물을 만들었더라도, 심지어 살아숨쉬는 예술품을 창조했다고 하더라도 이 예술품과 예술가를 동일시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가치판단 혹은 문제는 남는다. K선생은 윤리와 도덕의 잣대로 예술가의 천재적 기질을 억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작가의 미적 세계관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런 지독한 탐미주의는 자칫 시대/현실 동떨어짐을 반영할 수밖에 없으며,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거나, 꿈에서는 가능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절대 허용될 수 없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희곡 시나리오 수업 중 쌤이 제일 많이 언급한 플롯은 공지영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윤대녕의 <천지간>이었다. 가장 많이 읽히는 본보기를 들었던 쌤과 하도 들어서 읽지 않아도 익숙한 느낌이 팽배한 나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독서 미완결 상태로 기억 속에 묻혀있는 두 편이다. 워낙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고 작품이 좋을 것 같기도 했지만 그 섬세한 결이 역시 좋아서 당시 무슨 얘길 하시며 어떤 식으로 언급됐었나 궁금했지만 저질 기억력이 그걸 알려줄 리가 없지. 시험공부의 후유증은 오래 남아 디오니소스(술의 신 바커스)를 위한 제천의식(종교적 행사)에서 시작되었다는 희곡(연극)의 기원만이 엄하게 떠오른다. 나는 연극이란 매체를 아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건 지리적 영향일 가능성이 없지 않고, 연극을 보러가면 언제나 좋았다. 살아 움직이는 배우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과 호흡하는 배우와 관객의 거리가 늘 가슴뛰었다. 그러니까 이론을 기억하고 있는 건 당시 신나게 공부했었음을 반추하는 거라서, 오랜만에 연극관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작가의 자전적 경향이 강하게 표출된다. 사랑관도 그렇고, 문학에의 열정과 좌절 같은 것들이 그렇다. 하나하나 읽다 나도 모르게 전체를 읽었고, 표제작에 대해서만 말한다.

 

이미지도 없이 이름만 강요하는 것 같네요, 내가.. 어떻게 말이라는 것으로 그를 설명할 수가 있을까요.

 

어느 날 킬리만자로의 눈 덮인 봉우리가 바라다보이는 한 사파리에서 야영 중 불현듯 깨달은 바 있어 다시 돌아왔다는 그녀의 이력. 어떤 방랑과 초월, 실현에 대한 호기심이 그녀의 이국생활과 경력 그리고 다시 돌아온 지금을 궁금하게 했기에 찾아갔다. 원래는 1970년대 초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주모자였던 권오규란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 했었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대치되던 시절, 진리를 한 번 알아버린 사람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벗어나지 못한 채 여기저기를 떠돈다. 이십대의 팔팔한 젊은이가 오십이 넘은 나이에 출소하여 집에 돌아와서도 방문을 두드리는 일련의 세월에 덕지덕지 묻은 상처는 아무리 벗기려 해도 지울 수가 없는 거였다. 아직, 여전히, 이 세상과 저 세상처럼 나와 당신 사이에는 벽이, 섬이 견고하게 둘러쳐진 것일까. 그 집엔 강아지가 있었거든.. 그 강아지는 하루 종일 연못가에 놓인 돌에 코를 박고 가만히 앉아 있어. 내가 강아지가 왜저러느냐고 물었더니 이민자 화백이 대답하데. 강아지요? 아아.. 강아지는 명상을 하는 중이에요. (중략) 무슨 명상이오.. (중략) 글쎄요, 이런 거겠죠. 물속에 고기가 있네..

 

팔십년대의 아들딸들은 달랐다. 감옥에서 이십년 동안 그저 앉아 있던 권오규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난한 가방을 달랑 들고 그림공부를 하러 뉴욕으로 떠나는 이민자의 모습도 보였다. 비밀결사를 다 결성하기도 전에 체포되는 권오규. 그 무렵 뉴욕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민자. 감옥에 앉아 있는 권오규. 인도를 맨발로 방랑하는 이민자. 감옥에서 일곱 걸음 걷다가 뒤돌아서서 다시 일곱 걸음 걷는 권오규. 아프리카의 눈 엎인 킬리만자로가 보이는 사파리에서 불현듯 그 무엇인가 깨닫는 이민자. 그래도 감옥에 앉아 있는 권오규. 지겹도록 이십년 동안 앉아만 있는 권오규. 무엇을 견디려고, 무엇을 기다리려고 그저 앉아 있는 권오규. 화염병을 들고 뛰던 강선배, 휴지뭉치를 들고 코를 풀며 따라가던 나..

 

여기, 시대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던 한 사람이 있다. 나는 누구보다 더 이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십대, 팔십년대가 무섭도록 감흥이 없을 만큼 나도 나이를 먹고 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소설집을 펴면 제일 처음으로 만나는 작품이다. 샤갈과 눈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초자연적 현상은 분위기를 지배한다. 눈이 내린다고 꼭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 것인가. 상대적인 모멸감 때문이 아니라, 저마다 키워온 스스로의 환상에 기만당한 것 같다는 자괴감 때문에 우리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현실과 환상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다를 수 있는 것일까. 지난 연대 내내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환상에 뜨겁게 사로잡혀 있었고, 이제 그것은 빈틈없이 깨져버린 것이었다. 라는 대사로 둘러처지는 연대라는 환상과 허무, 정치에의 혐오, 그것들은 무기인 듯 보였으나 무력감이었다. '이제는'이라는 회의론과 '그래도'라는 명분론 끝에 술 테이블을 뒤집는 싸움. 그날 그 말을 듣고 어째서 명분론 쪽에서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질 않았는지, 그 뒤로도 우리는 오랫동안 그 이유를 감지할 수 없었다. 명분론 쪽에 서 있던 당사자마저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으니까, 나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거기에 일종의 심리적 동조의식, 다시 말해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어쩔 수 없이 상반되는 견해를 취했지만, 명분론의 이면에도 역시 회의론적인 요소가 다분히 내재돼 있었으리라는 짐작만 어렴풋이 해나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짐작은 당사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통해 분명한 사실로 확인되었다.

 

연대에는 이탈이 없어야 하나. 이 허무의 술자리가 파장한 다음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 한 가지. 상실된 대화와 깊은 단절감. 이후 모임에서 계속되는 잡담 또 잡담 그리고 잡담. 의미없는 말만 통용되는 시간. 의미있는 말이 철저하게 통제당하는 공간. 거기에는 연대와 열정, 기대감과 설렘 따위는 없었다. 술자리에서 절반이 돌아간 다음에야 비로소 남은 사람들에게는 결속감과 새로운 공감대와 은밀한 연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 여자를 만나 '샤갈의 마을'에 가게 된다.

 

'흩어졌다'는 결과보다 '흩어져가고 있다'는 과정 때문에 괴로운가. 결국은 '둘'도 남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지. 여자의 목소리가 슬프게 들려온다. 우린 모두 누구를 기다리고 누구와 자고 누구의 손을 잡고 그렇게 한걸음씩 나아가는 존재인가 보다. 함께 있을 땐 고독을 꿈꾸고, 혼자일 땐 누군가와의 연대를 꿈꾸는.

 

 

 

 

 

 

 

 

 

 

 

 

 

 

 

<신라의 푸른 길>은 신경숙의 <부석사>가 그랬듯 문학기행을 떠나고 싶게 한다. 대학 때부터 경로와 목적을 적어내려간 기행노트가 몇 권이고, 그 중 아직 떠나지 못한 장소, 여전히 느끼지 못한 정취가 또 얼만지. 내가 절 탐방을 좋아하고, 불상도 좋아하고 탑도 좋아하고 고요를 좋아하고(애들 말에 의하면 내가 제일 말이 많다는데!) 무엇보다 얼마 전 친구들끼리 모였다가 나온 템플스테이는 로망인데, '새벽부터 일어나서' 부분에서 약간 좌절(침묵과 수양도 약간 힘들 것 같지만). 하지만 나는 이성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보통사람이니 맘먹으면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닌데 언젠가,로 약속했지만 지금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진 상태임. 석굴암 본존불상 아미타불과 경주에서 강릉까지 가는 7번 국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와 같은 문장에서 시작부터 발이 푹 하고 빠지면 더이상 집중이 되지 않고 안절부절못한다. 경주에서 포항을 거쳐 강릉까지 바다를 끼고 가는 7번 국도. 우왓. 남쪽 항구도시에 사는 나는 이 국도가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진 전용도로 같다. 어릴 때 임진각 자유의 다리, 통일전망대 가면서 아빠가 달렸던 길과 몇 해 전 여름, 가는 길에 진탕 싸우긴 했어도 나름 신나게 떠났던 여행도 그 국도였나. 김연수의 소설 제목. 나는 운전을 못하니까 모른다.

 

내일은 일찍 움직여야 하고 차를 타고 이 책을 읽을까 한다. 내가 갈 길이 7번 국도도 아니고 여행가는 것도 답사가는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해야 할 일을 든든히 챙겨서 차를 타는 기분이 기다려진달까. 어디 갈 땐 무거운 거 싫어서 책 잘 챙기지 않는데 이 책이 전자책에..전자책에.. 내일 할 일 만들어둔다고 페이퍼에 구멍을 만들었다. 뭐 가끔 이럴 때도 있어야 재밌지! 빈틈도 있고 구멍도 나고 앞뒤 말도 안맞고 간혹 그래야.. 그래서 안녕. 윤대녕 작가를 엄청 좋아하는데 하필이면 여기 이 책에 구멍을 내다니 다시 와서 이어쓰겠음. 꼬옥 쓰겠음.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은 겨우 찾았다. 이 작품집에 실린 구효서의 <카프카를 읽는 밤>은 비 오는 날의 삼거리에 서 있던 밝은 핑크빛 원피스를 입은 그녀로부터 시작한다. 그녀의 상처 그리고 나의 상처. 그녀는 재일 한국인 그리고 나는 그냥 한국인. 그녀가 내 눈에 띈 까닭도 어쩌면 그녀가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 내 행보에 특별한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적 시적 걷다 보면 시선마저 느긋해져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 일일이 보아낼 수 있는 거니까. 그녀는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 하고 있었고 나는 일부러 그녀 곁을 천천히 걸으며 질문해오길 기다리다 그녀를 안내한다. 다시 만날 줄 몰랐던 그녀와 몇 번 마주치고, 드러나는 그녀의 삶과 나의 삶, 그녀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 아주 짧지만 강렬하다. 무엇에 대해? 카프카에 대해. 하지만 저지 코진스키를 언급하는 부분이 더 강렬하다.

 

유태인에 관한 거라면 나는 저지 코진스키의 <더 페인티드 버드>를 잊지 못한다. 매 장마다 소름이 끼치는 그 소설 9장에는, 집단학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알아버린 유태인들이 어린 자식들을 달리는 열차 밖으로 내던진다. 열차가 지나간 마을엔 바퀴에 찢긴 아이들의 사지가 건초 더미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요행히 목숨이 붙은 아이들은 가난한 마을 사람들한테 신발과 옷을 빼앗기고 얼어죽거나, 여자 아이일 경우엔 거기에다 강간까지 당한다.

 

자신에게 그 소설과 같은 내용의 쓰라린 고통만을 안겨주고 나중에는 정치적으로 억압하기까지 한 조국을 탈출해 저지 코진스키는 미국에서 전혀 새로운 언어로 소설을 썼다. 전혀 새로운 언어로. 그러나 선배 유태인인 카프카는, 프라하에 끝까지 웅크리고 앉아, 저 독일인의 언어로 <변신> <실종자> <심판> <성>과 같은 소설들을 써낼 수밖에 없었다.

 

재일 한국인 그녀와 유태인 저지 코진스키 혹은 카프카. 나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을 것 같다. 영토와 국토를 잃고 방황하는 그들의 상실과 절망과 소외감을 온전히는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있는 지금 이 자리는 내 것이라 믿고 살아가는 것만이 견딜 수 있는 일일 것 같다.

 

 

 

 

 

 

 

 

 

 

 

 

 

 

 

 

김인숙의 소설 중 <소현>이 시대와 문체를 통해 왜 그녀가 써야 했는지 알 수 있었다면(당시 나는 그 문체를 말투로 따라하면서 다녔음), <미칠 수 있겠니>는 발리라는 이국적 공간과 지진이라는 자연재해, 상처와 배신으로 얼룩진 사랑을 치유하려는 한 여자와 한 남자의 내면을 슬프지만 절망적이지는 않게 그리려는 느낌을 주었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고, 과거와 현재가 버무려지는 느낌 또한 그랬다. 결과적으로 아주 애틋하고 완전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때로 아득해져서 손에서 놓아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었고, 좋았다. 여류 소설가들이 외국 체류나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닌데다 나와 다르지도 않아서 좋았는데(물론 그들의 여행기는 별도로 하고)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니 반가운 기분(와락). <먼 길>은 작가가 1993년부터 1년 6개월을 시드니에서 보낸 경험을 살려 쓴 소설로 1995년 한국일보 작품상을 수상했다. 시기로 보면 거의 20년 전인데, 젊은이들의 방황과 정착이라는 코드가 어제오늘 일이 아닌 걸 보면, 사는 일의 본연적 고민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만은 않은 듯하다.

 

...내 기억 속에는 아직도 청년인 당신... 그래서 서글픈 기억... 나는 그것을 붙들고 있을 힘이 없습니다.. 로 요약되는, 한때, 당신을 사랑했었노라고.. 잊지 않는 이상 서글픔이 사라질 수도 없다는 서연의 편지로부터 시작한다. 누가 이, 절절한 기억 속 주인공일지 가슴이 콩닥거리며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포트 멕콰리로 떠나기로 한 날, 서연의 편지를 받았다는 이는 한영이다. 그리고 한영의 세상에는 낚싯배를 모는 형 한림과 명우가 있다. 8년 전 사랑했던 서연만이 없다. 명우를 처음 만난 날은 이해할 수 없다. 네가 아직도 혼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게 왜 희망처럼 여겨졌는지. 관계를 맺는 모든 일에 실패만을 거듭해왔던 지나간 내 삶이, 왜 그렇게 느닷없이 축복처럼 여겨졌는지... 라는 편지를 띄우고 그녀의 답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교민잡지사에서 한국인으로서 난민비자로 영주권을 취득한 명우를 취재하기로 한 건 그것이 도저히 통용될 수 없는 특수한 사례였기 때문이었다.

 

이민.. 이것을 끝내고 저것을 선택하는 일. 모든 것의 시작. 그들은 이 시작 앞에, 걸어가야 할 먼 길 앞에 흔들리고 좌절한다. 과거를 버리지 못하고 단절하지도 못한 채, 울컥하는 심정으로 받아들어야 하는 모든 것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 한영에게는 그 과거 속에 서연이 존재했다. 한림에게는 노래하지 못한 채 헛도는 자유와 그로인해 실패한 결혼생활이 그랬고, 명우에게는 학생 점거농성으로 받은 1년 반의 징역생활이 그랬다. 모두에게 신열같은 열병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방인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서연의 그리움을 토로하는 한영에게 명우는 말한다. 사랑이란 건 비로소 그리움으로 확인되는 감정이 아니던가요. 자조적 웃음을 날리면서도 형(한림)의 방랑벽과 속박된 자유, 명우의 내가 헛살아왔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 결코 아닙니다. 내 길은 헛되지 않았는데 내 삶이 헛되어졌다는 것, 그걸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라는 얼치기 고백에도 그만 마음이 사방으로 철렁하는 몰골이 되어버린 자신이 소외감에 몸서리친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생존의 행렬. 한영은 몰랐고 서연은 직관으로 알았던 바로 그것. 언젠가 세월이 뒤틀릴 것이라는 사실. 가족병력이 있던 서연과의 교제를 반대한 아버지를 당신이라 칭하며 맞섰지만, 미칠 것 같은 소유욕에도 불구하고 병신 자식의 아비가 되고싶지 않았던 비열함이 그를 이민자로 내몰았다. 서연 대신 창녀를 안으면서, 여자의 배에 지폐를 뿌려대면서도 잊지 않고 싶은 것, 포기할 수 없었던 것, 집착했던 것, 비열함도 아니고 좌절도 아닌 어떤 신념과 계획. 한영은 그것을 다시 갖고 싶었다. 그녀의 손을 부여잡고 떠나자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풍선처럼 가볍게 살자고 말하던 그는 몰랐고 서연은 알았던 것. 그것.

 

상처를 기억하고 간직하는 것, 그리하여 그 상처에 온 가슴이 전부 문대질 때까지, 끝끝내 버티는 것. 현주소에조차 온전히 머물지 못함을 아프게 상기하며 그가 내린 결론이라면 저마다의 이유로 남을 여기 이 자리, 현주소에 온전히 머무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 이 페이퍼의 박스글이나 색깔글은 모두 소설 속에서 가져온 인용문 입니다.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댈러웨이 2012-06-0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이님. 나 아이님을 아주 미치게 사랑하고 싶다, 이 한 마디만 하고 갈께요.

아이리시스 2012-06-03 21:53   좋아요 0 | URL
세상에, 너무 격하게 애정하는 댓글 쓰심 댈러웨이님 오해 삽니다ㅋㅋㅋ
제가 여기저기 사랑을 좀 많이 받긴 하지만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돌아왔어요. 댈러웨이님 서재에 제 댓글 확인해요. 오랜만에 비밀이에요ㅋㅋㅋ

이진 2012-06-03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아이님 디게 오랜만이다.
아이님 비밀은 뭘까. 아참 그리고 댈러웨이님보다 내가 더 아이님 사랑하는거 알죠?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이님 단편 극도로 싫어한다며요, 언젠가 본적 있는거 같은데. 몰입하면 끝난다구 ㅎㅎㅎ 저도 그랬는데, 요샌 단편이 더 좋아요.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지만 간단하게 읽고 읽고 난 후의 그 짧지만 아릿한(?) 여운. 그런게 좋더라구요. 문장도 단편이 더 좋은거 같구.

내 친구도 <혼불> 도저히 읽을게 못된다고 해서 물어봤더니 옆에 사전두고 봐야한다고 ㅋㅋ

아이리시스 2012-06-03 23:10   좋아요 0 | URL
아악, 소이진님 보면 저 꼬마아이 얼굴 떠오르고 소이진님 겹쳐지고 그러면서 막 머리 쓰다듬고 싶어요.(나 나쁜누나 아님-.-) 또 사랑고백 받다니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아람~(지금 음표 찾을라고 다 해봤는데 어딨는지 모르겠음. 여튼 나는 노래중)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응응, 그래요! 난 예전에도 단편을 싫어했어요. 근데 그게 맞아요. 소이진님은 현명한 문학소년^^
국문과 수업 듣는데 시험 쳤었어요. 거기 나오는 어휘의 뜻. 나는 하나하나 읽으며 정리했는데(!) 그거 어휘집이 따로 있더라고요. 덕분에 책은 열심히 읽었는데 쪽지시험은 망했어요. 시험은 역시 꼼수와 요령이 있어야 해요(!!!) 수능 끝나면 소이진님도 꼭 읽어요.(응?) 수능치고나서.

ㅎㅎㅎㅎㅎㅎㅎㅎㅎ사랑해요, 소이진님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잘자요.. 안녕.

티티카카 2012-06-04 14:37   좋아요 0 | URL
와우, 굉장히 귀여우시네요 ㅋㅋㅋ두 분 다!

저는 최명희 작가님이 원고를 쓸 때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 같다는 말이 잊혀지지 않더군요. 그저 읽기만 해도 힘든데 그런 깊고 무거운 책을 오랜 시간 풀어내려고 애썼던 작가님을 생각하니 끝없는 존경이...!

아이리시스 2012-06-04 16:19   좋아요 0 | URL
히히히 티티카카님 안녕?

소이진님이 귀여운 거예요ㅋㅋㅋ 진짜 귀엽^^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멋지다.. 사실 내용은 잘 기억도 안나는데 책 펴면 적어도 5권까지는 단어마다 뜻이 빽빽하게 적혀있어요. 며느리의 비애.. 저는 그것만 지독하게 떠올라요. 한 권씩 사서 읽었는데 어느새 10권을 사서 모았을 때 뿌듯한 느낌과.. 이제 저 책 다시 뺄 때 티티카카님도 함께 떠오를 것 같아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6-04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댓글 달러 왔어요..ㅎㅎㅎ 나 매일 서재에 들어와요. 그런데 맨날 빈 화면 앞에 두고 망설여요.
자꾸 말을 고르는거죠. 뭔가 막힘이 있나봐요. 내 안에.

7번 국도 말예요. 우리는 강원도에서 경주갈 때 그 길로 갔었어요. 진짜 좋았어요. 해가 지는게 아쉬울 정도로...
그리고 대학교 때 남동생하고 둘이서는 기차를 타고 그 해안선을 타고 내려갔었어요. 서울에서 출발해서 강릉에서 하루 묵고 부산에서 하루 묵는 그때 나름으론 꽤 먼 거리의 여행이었죠. 남동생 대학입학 기념 여행. (솔직히 걔는 뭐가 좋았겠어요. 누나랑 단 둘이..ㅋㅋㅋ)
그때 가 본 부산. 고분고분한 서울 말씨 쓰는 저와 남동생은 지하철 안에서도 남포동 떡볶이 집 안에서도 시선을 자주 받았던 기억이, 그래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막 나네요. 여행가고 싶다.

우리 7번 국도 중간 어디쯤에서 만나요. 지금 당장!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ㅋㅋㅋㅋㅋㅋㅋ
(막 이러면서 전 자러 갑니다. 언젠가는...)

아이리시스 2012-06-04 16:25   좋아요 0 | URL
그 길이 그 길 맞나봐요. 그럼 저는 그 국도에서 대판 싸운 기억이........ㅠㅠ 7번 국도.. 리스본 28번 트램 뭐 그런 기분이 들어서 좋아요. 김연수의 [7번 국도] 그 책 안 읽었는데 보고 싶어지네요. 책은커녕 윤대녕은커녕 차 타고 잠만 잤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계속 미완성일 것 같아요.

남동생과 여행이라니 저희는 상상할 수도 없는데요ㅋㅋㅋ 오, 고분고분한..그게 바로 제가 부러운 거예요! 서울 가면 저도 시선 자주 받는데ㅋㅋㅋ 다른 이유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7번 국도 중간에서 만나야 합니까?! 제가 운전 못하니까 데릴러 와요. 데릴러 와요! (막 이런다)ㅋㅋㅋ

댈러웨이 2012-06-04 21:04   좋아요 0 | URL
윤대녕은 커녕...요? --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ㅠ.ㅠ

아이리시스 2012-06-08 00:1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 읽긴 읽었어요, 짧으니까요, 댈러웨이님ㅎㅎ
근데 별로 재미가 없..신라와 경주와 여자가 왔다갔다하다가 가버렸어요ㅠㅠ

2012-06-04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4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티티카카 2012-06-04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밤에 이 글을 쓰셨군요 :) 시간의 무게가 더해진 그 밤의 글이 저의 추억까지 환기하네요.
저도 단막극 참 좋아해요. 진부한 드라마들 사이에서 신인 작가만의 톡톡 튀는 전개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죠. 그런데 이제는 그런 재미가 모두 날아가버렸어요. 말씀하신대로 무얼 보더라도 아웃풋이 있어야 하는데, 허무맹랑한 감정의 편린들만 남게되는 것 같아 일체 손을 못 대겠어요. 순수한 재미마저 잃어버린 건 아닐까 두렵기도 하구요ㅠ;;
파리에서 있었던 사연은 씁쓸하네요. 남들에게는 '쓰잘데기 없는 학과'라고 불려지는 데다 수많은 글쟁이들 앞에 한없이 무력해지게 만드는 학과!!

근데,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아이리시스가 무슨 뜻이죠? 검색해보니까 소설 제목으로 있네요? 아닌감? ㅎㅎ....

아이리시스 2012-06-04 16:31   좋아요 0 | URL
그게..그분 여동생도 같은 학과였어요. 그런데 잡지에디터여서 글과 여행 사이를 하염없이 방황하는 분. 아마 그래서였을 거예요. 잘 아니까! 아님 기분이 나빴겠죠..저도..^^

요즘도 단막극 하는데 자꾸 연속이에요, 4부작 8부작 이렇게요..

irisis 'i'과 'r'과 's'의 조합이 좋아서 창작해낸 거. 뜻은 없어요.하하. 티티카카님이 뜻 만들어주시길^^ 우왓, 소설을 발견하셨어요? 그건 무슨 뜻일까요?!

티티카카 2012-06-04 19:23   좋아요 0 | URL
http://en.wikipedia.org/wiki/The_Well_of_Echoes

소설 제목이 아니라 주인공 이름이었네요. 영어라 막눈이 도졌나보군요 줴길...ㅋ

아이리시스 2012-06-08 00:19   좋아요 0 | URL
위키피디아 가서 봤어요, 티티카카님. 아..두번째 주인공! 주인공의 라이벌이라는데요..저 해석했어요. 너무 신기했거든요. 나 처음 봤어(ㅋㅋㅋ)

2012-06-06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8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