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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무의 일기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 지음, 이재형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리뷰에 나는 없다. 대신 나무가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그? 그녀일 수도 있지 않냐고? 아니다. 이 나무는 남자가 맞다. 여자나무는 따로 있다. 계속 읽다보면 나온다. 그녀의 이름은 '이졸데'다. 그는 당연히 '트리스탕'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다. 오, 차라리 애증이라면 모를까. 트리스탕, 그러니까 나(나무)는 이졸데를 사랑하지 않았다. 내게 쏟아져야 마땅한 스포트라이트와 내가 받아야 할 눈부신 태양의 햇살을 가린 몹쓸 그녀였을 뿐이다. 나는 이졸데에 대해 말할 생각이 거의 없다. 그녀 보다는 '란 박사'가 내게 더 소중하다. 그리고 나로 인해, 나를 향해 비춰질 모든 이야기들이 중요하다. 일단 내 소개부터 하자.
내 이름은 트리스탕, 삼백 살이 조금 못 되었으며, 란 박사가 키우는 배나무 두 그루 중 하나다. (p.8)
이 나무가 배나무라는 게 이 소설에 영향을 미칠 지는 모르지만 이 나무가 남자라는 것은 대단히 영향을 미친다. 어느 날 강한 돌풍을 맞고는 트리스탕이 쓰러진다. 혼자만 희생되었다.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지만 중요한 것들은 아니다. 트리스탕이 쓰러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쓰러진 트리스탕이 자신의 일기를 쓴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가 들어야 할 모든 것, 우리의 모든 것, 나무의 모든 것이 트리스탕의 독백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단지 나무, 오로지 나무,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크고 놀랍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
나무는 누군가 자신에게 토로하는 감정이 아닌 다른 감정은 갖지 않는다. 자신이 지각하는 감정이 아닌 다른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태풍이 불고, 화제가 일어나고, 가뭄이 닥치고, 나무꾼이 나타나리라는 예감 외에 다른 불안은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동물들도 느낄 수 있는 이 같은 불안감은 인간들이 느끼는 불안과는 다른 데 기원을 두고 있다. 우리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아니다. 조화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pp.13-14)
나(나무)는 그렇다. 인간들은 제 눈(기준과 잣대)으로 나를 봐서는 안된다. 내 불안을 재단하려 해서도 안된다.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 정도면 내가 하려는 얘기가 어떤 것인지 짐작할 만도 한데, 그래도 모르겠다면 귀찮지만 계속 이야기해보자.
나는 죽어가고 있다. 쓰러진 건 처음이지만 이미 뿌리가 하나 밖에 남지 않았고, 이대로라면 내 주인 조르주 란 씨가 돌아오자마자 장작이 될 것이다. 나는 루이 15세 치하에 태어났다. 1727년생. 나는 당신들이 모르는 300년 가까이의 역사를 살았으며 그중 몇몇은 실제로 겪기도 했고, 당신들이 아는 나 외에도 나만이 가진 '인간화 된' 추억들이 있다. 아, 물론 내가 죽는다는 것이 내게 무척 슬플 거라고 슬프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자유지만, 그건 내 뜻이 아니다. [죽음=슬픔]의 등식은 인간들의 의식일 뿐 내게는 아니니까.
마을에서 나는 평판이 나빴다. 마을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은 나를 이 외진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연루시키더니, 결국은 그 책임자로 만들고 말았다. 나는 한 마녀를 불태워 죽였고, 신부들을 목매달았으며, 한 시인을 자살로 몰아갔고, 한 영국인을 불구자로 만들었으며, 아이 하나를 총살시켰다... 게다가 가지 치는 일꾼이 머리를 땅으로 향한 채 곤두박질치게 했다. (pp.21-22)
내 몸에는 '자크'의 두개골을 박살 낸 총알이 박혀있다. 프랑스에서 제일 작았던 레지스탕스 '자크'는 내 주인 조르주 란 씨의 아들이다. 그는 총알의 추억으로 나를 사랑한다. 조르주 란의 도움을 받아 나(트리스탕)에 대한 책을 쓰려던 야니스, 내 이름을 붙여주었던 조르주 란의 오페라 가수 아내 자클린, 옆 집에 살며 나의 일부로 새로운 나(나무의 꿈)를 만들어준 꼬마 마농. 많은 식구들이 있지만 일단 여기까지. 다음 얘기는 열세 살 마농을 훌쩍 키워 아리따운 숙녀로 만들어준다. 15년 후.
갑작스런 차사고로 부모를 잃은 마농은 조르주 란 부부에게 입양되어 자랐지만 양부모의 죽음 이후 그들의 자식과 손자들에 의해 쫓겨난다. 하지만 나(나무의 꿈)만은 항상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녀의 조각실력과 사랑하는 남자 야니스를 찾아주었으니 대체 내가 행운의 나무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둘은 만나 불꽃같은 사랑을 나눈다. 게다가 그보다 더 중요한 일마저도 해치우기로 한다.
그들의 추억과 꿈이 담긴 나(트리스탕)의 역사와 세월과 이야기가 담긴 영화와 책을 만들기로. 제작의 기회는 마농(이제 트리스탄)의 능력으로 붙잡고, 야니스는 글(시나리오와 책)을 쓰기로 한다. 아참, 트리스탄은 트리스탕의 여성단어로 마농의 자작 닉네임이기도 하다. 사랑스런 나의 트리스탄.
그 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해요. 게다가 등장인물도 다들 쟁쟁하잖아요. 루이 15세, 발자크, 나폴레옹 2세, 드레퓌스 대위, 파블로 피카소... (p.113)
사실은 이와는 많이 다르고 훨씬 사소한 주인공들이 등장해야 하지만 알다시피 영화와 책은 허구일 수록, 저 너머 세상을 다룰 수록 더더욱 부풀어 가는 성질의 것이라서. 그러던 중 일이 터졌다. 그들의 아이가 생긴 것이다. 야니스는 바라지 않고 마농(트리스탄)은 죽도록 원하는 바로 그 아기. 그녀는 몰래 낳으러 가고 그는 오로지 나(트리스탕)에 대해서만 골몰한다. 그리고 이야기들이 별처럼 쏟아진다. 내가 가진 이야기들은 아는 것부터 모르는 것까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흘러넘친다.
그들이 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거두지 않아서 기쁘다. 물론 그것들이 거의 사라져버려 헛간 구석이나 집안 난로의 장작으로만 멀뚱히 지내야 한 적도 꽤 오래 있었지만 슬프지 않다. 나는 그들에게 추억을 되찾아주는 소중한 기억이자, 과거 300년 역사를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존재다. 기죽을 필요 없어. 기죽지 마.
들어봐, 이제부터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지는지. 사실 나는 내 이야기가 마음에 들거든. 때때로 야니스가 꾸며낸 이야기마저도. 그 시작은 클래런스 해트클리프 경이 조르주 란(그러니까 내 주인)의 지붕 위에 불시착하게 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게 나의 모든 것에 대해 가르쳐준 사람.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사람. 그는 레지스탕스(제2차 대전 때 독일점령하에 놓인 국가들의 지역에서 일어난 저항운동)를 피해 -사실은 영국으로 밀려드는 레지스탕스들을 피해 망령한 것- 공군을 꼬드셔 기어이 낙하산으로 날다가 떨어진 잉글리쉬(영국인)였다. 내가 나의 기능과 인간의 정신에 대해 탐구할 수 있게 해준 것도 그였다. 그는 기발하고 무모하고 열정적이면서도 무질서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의 종식을 내 주인의 초가집 지붕 아래에서 지켜보았다. 당연히 나도 그를 지켜볼 수 있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트리스탄, 야니스, 그들의 아들 토에, 나를 훔쳐 달아났던 샤픽 그리고 트리스탄이 죽은 후 야니스에게 생긴 애인 오드리, 토에를 키워낸 아마존 부족, 환경과 나무를 파괴하려는 이들과 싸우는 과정, 서로의 존재를 알 수 없던 야니스와 토에가 한 경매장에서 기적적으로 서로를 알아보는 모습 등 아주 크고 긴 이야기다. 트리스탄이 자신을 떠나 죽어버린 후 삶의 끈을 놓으려 했던 야니스의 부활기이기도 하며, 야니스가 나(트리스탕)에 대해 쓰기 위해 내 과거, 현재, 미래를 탐험하는 동안 나 또한 동시에 나의 모든 것과 이들의 모든 것,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오래 전부터 내게만 들리는 두 아이의 목소리, 드레퓌스 사건, 히틀러의 출생, 비시 정부 등의 오브제를 좇아 낚으러 간다. 탄생과 소멸까지 내 위대한 비밀들이 드디어 풀리는 순간은 직접 경험해봐야만 그 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망각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진 인간의 학살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지구는 스스로를 제어하고, 땅은 피를 마시고, 나무들은 그대로 머무른다. 종교라는 말이 지성이라는 말과 같은 유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말고 누가 기억하겠는가? 관계를 만들어내고, 다양한 삶의 형태들이 상호작용을 하도록 강조하는 것... (p.199)
아, 나는 인간의 비루함, 낭비, 실수, 오욕을 너무나 많이 또 정확히 보고 있다. 인간들은 자신들 뿐 아니라 우리도, 모든 자연(환경 혹은 생태계) 또한 조정하고 진화하고 발전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은 늘 불평할 뿐이다.
21세기 말 인간 전문가들이 예언하는 기후온난화와 핵겨울 대신 이루어질 인간 재고 정리는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많은 수의 인간들이 갑작스레 자살 충동을 일으키는 우울증에 저항하는 유전자를 발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생명 형태가 지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공감을 통한 인식의 확대이고, 이 같은 기능은 증오와 무분별한 이기주의와 절망 속에서는 완수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p.239)
시간이 흐르고 야니스는 어느새 백발이 되었다. 더이상 사랑을 나누지 못하게 된 그가 몰두하는 것은 과거다. 그가 나이를 먹고 더욱 더 현재나 미래에서 등 돌릴 수록 과거에 집착하게 되었고, 나는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루이 15세 통치 하, 생메다르 묘지의 얀센파 광신자 사건과 왕의 두 아이에 대한 은밀한 살인. 그 아이들의 손에 들려있던 "루이 14세가 좋아해서 매일 아침 먹었고, 모든 귀족에게 하사했던 품종인 빌구테 배"(p.250). 배의 씨까지 남김 없이 먹다 경련을 일으켜 숨을 거두어 매장된 아이들. 쌍둥이의 위 속에서 싹을 틔워 자라난 배나무 두 그루가 바로 나(트리스탕)과 이졸데였다. 이후 내게 생긴 모든 비극적 사건들과 내 아래에서 죽어간 사람들, 내가 흡수한 피들은 모두 쌍둥이의 저주 때문이었나.
하지만 나는 달라지고 있다. 상시 전시 박물관에 안착된 유일한 나(나무의 꿈)는 이미 사람들에게서 잊혀진지 오래다. 설상가상 야니스가 죽어버린 이후로 나에 대한 책, 그러니까 내 자서전은 그다지 인기도서가 되지 못했다. 이제 나는 없다. 나는 폐기되는 걸까. 이토록 오랜시간 동안 내가 뿌리고 흩어놓은 기억들을 따라 이리저리 시간여행과 공간여행을 했던 나는 나에 대해 생애 처음으로 가장 많이 알게 된 지금, 이 세상을 떠나야 할까.
아니었다. 나는 70년 전 어린 마농이 뱉어놓은 한 알의 씨로 다시 부활하고 있었다. 느껴졌다. 나는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껏 나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었고, 가고 싶은 모든 곳들에 갈 수 있었고, 다른 모든 이들의 의식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휴면 중이지만 곧 깨어날 것이다.
나는 그 씨앗에서 내 존재의 향기가 풍기는 것을, 그리고 내가 그 사실을 인지한 것을 알고 놀랐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깐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할 순간이 다가왔다. 나는 새로운 성장에 나 자신을 맡겼다. 내 기억은 멈췄다. 그리고 다시 삶의 침묵이 시작되었다. (p.256)
나는 부활했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전생을 잊게 될까 기억하게 될까. 기억해도 좋겠고 잊어도 좋겠지. 하지만 더이상 인간의 의식과 정서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싶다. 나는 나무니까 그들과는 다르니까. 나는 내가 느끼는 대로 느끼고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는, 인간보다 훨씬 더 오래 살고 많은 것을 기억하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 즉, 역사를 담고 있는 나무니까. 나는 다시 태어나도 나무로 태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