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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피부 - The skin I live in
영화
평점 :
현재상영
알모도바르 감독의 열렬한 팬이고, 그로 인해 알지 못하는 스페인에 대해 우호적이며, 그를 알기에 이 영화는 지나치게 실험적일 거란 우려를 떨칠 수 없었다. 영화 [페이스 오프]를 오래 전에 학습했다면 예상 가능한 일이 벌어질 것. 감독의 역량에 비추어 볼 때 충격적 혹은 자극적 장면이 있을 수 있지만 시도 자체가 신선한 반면, 스토리는 빈약할 가능성이 있을 것.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텍스트 파악 능력 하나는 지나치게 뛰어나다. 시리즈는 첫 회, 영화는 초반 10분, 어쩔땐 포스트와 시놉만으로도 핵심을 꿰뚫을 수 있다. 타인에게 적용 불가능하지만 내게는 안성맞춤인 분별력이다. 그때그때 갈증에 화답하는 무언가를 취사선택하는 데에 스스로도 놀랄 만큼 대견한 능력을 지닌 나는 솔직히 큰 기대가 없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 겉모습의 변화가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있는가. 당연히, 없다. 영화 [비밀애]에서는 윤진서가 쌍둥이란 걸 몰랐던, 사랑한 남자와 그 남자의 형(동생)을 동일시 하여 두 남자 모두를 파국으로 몰고가던데, 행여 착각할까봐 말하는데, 밝히자면 이 영화는 본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한 남자의 복수와 집착에 관한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한 남자의 복수와 집착이 불러온 비극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눈치 빠른 관객에게는 너무 뻔하다. 시종일관 긴장되지만, 스토리텔링도 가능한 내게는 일찌감치 결말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고등학교 때 사진부는 학예제 기간에 그 해 휴일마다 각자 또는 모여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오래된 필카로 조리개와 피사체 조절을 해가며 찍은 각자의 사진을 걸었다. 새까만 천으로 교실 전체를 도배하고 단체 액자에 통과된 사진들을 넣고 보기좋게 배열해 걸어놓는다. 밤 늦게까지 꾸미고 또 달아서 블링블링하게 보이도록 애를 썼다. 감시 다니는 선생님들이 껄껄 웃으며, 공부를 그토록 골몰히 했으면 서울대 갔겠다, 하실 때까지. 그러나 우리의 꿈은 서울대가 아니었다. 파노라마. 사진필름과 폴라로이드 즉석사진이 사진부 기념선물이었는데, 그런 파노라마 말이다. 한 장씩 뜯어내도 이어붙이면 그건 분명 우리 필름이었다. 기억에 잊히지 않는, 우리만의 것. 일상에 주렁주렁 매달린 추억. 내 사진에는 무궁화꽃도 있었고, 시골집 마당에 말려놓은 대추를 그러모으는 외할아버지가 있었다. 학예제가 끝나면 뒤풀이를 갖고 집으로 돌아가서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학교에 오면 모든 것들이 조용히 제자리를 찾는다. 특별함 뒤의 일상은 그 전의 것과 성질이나 질량이 조금은 다르다. 그것들이 그 시절을 견디게 했었다. 착각이었나. 정성들여 붙였던 천을 모두 뜯어내면 이전의 숨통 막히는 교실이 돌아오는 것이다. 다시 입시전쟁. 잠시 딴 길로 샜었다.
[내가 사는 피부]가 다루는 소재가 아무리 신선하다 해도 내게 이 텍스트는 충분히 예상가능하고, 너무도 뻔하게 막을 내려버린다. 반전은 경악할 만큼 짜릿하지 않았고, 전율은 제작자의 의도만큼만 일어났다. 아쉬운 영화다. 우라질, 눈치 빠른 관객, 나. 하지만, 당신도 눈치 빠를 필요는 없다. 그는 자동차 화재사고로 아내를 잃었다. 사고에서 살아남은 아내는 거울 보기도 힘들만큼의 화상을 입었고 어느 날 창문 밖으로 떨어졌다. 딸은 다른 이유로 엄마와 같은 방법으로 아빠의 곁을 떠났다. 아내와 딸을 한꺼번에 잃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예의 아내와 딸. 그의 사투가 아내와 딸을 찾기 위해 시작되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가 아내와 딸을 비로소 찾았다는 것. 그러나 방법이 잘못 되었다는 것. 인간은 종종 어떤 일을 하기 위해 방법과 절차의 기로에 선다. 그의 선택은 비교적 간단했는데, 그것이 엄청난 비극적 결말을 불러온다. 돌이켜보면 비극은 이미 예고된 일인데 관객은 놀랍게도 그 순간, 윤리선택을 강요당한다. 너라면, 당신이라면, 그러지 않았을까. 관객은 대답이 없다. "선택의 문제이지 이치의 문제, 나아가 윤리의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라고 말하는 나는 감히 질문의 화살을 당신에게 돌린다. 영리하다. 감독이 영리하니 덩달아 나도.
비극인 줄 알면서 계속 걷는 길이 있다. 세상의 모든 드라마는 그렇게 탄생한다. 나라면 가지 않을 길, 그들은 기어이 간다. 부딪치고 깨지고 울고 아파하면서, 오해의 지난한 시간을 견딘 후, 끝내 희극이 되기도 하더라. 하지만 비극으로 시작된 길은 어렵다. 그저께 TV에서 [동행]이라는 현장르포를 보면서 가난은 되물림 되지만, 가난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를테니, 같은 가난이라도(같은 어려움이라도) 걷는 방향은 각자 다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TV 속 엄마는 알콜 의존증 보다 약간 나은 상태였다. 스무살 아들부터 공부하고 싶어하는 딸, 지체 장애로 시설에 있는 아들, 열 살의 귀여운 딸까지 네 자매를 감당해야 할, 남편을 보낸 엄마였는데, 엄마가 엄마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니 대학은 엄두도 못 내고 공장에 취직해 밤낮없이 일하는 큰 아들은 물론, 한창 어리광 부리며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야 할 막내 딸에게도 엄청난 짐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큰 딸은 매일 밤 술을 찾는 엄마를 보며 엄마가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눈물 지었다. 나로서는 엄마가 없어야 아이들의 짐이 덜어질 것 같았다. [내가 사는 피부]를 보며 떠올린 건 하나의 잣대로 무언가를 재단하는 것은 나쁘다는 것과 과학윤리는 실효성을 넘어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의 발전이 생명윤리를 짓밟는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쉽게 정답을 강요할 수 없는 것이 현실적 과제다. 영화 [네버 렛 미 고]는 둘의 가치충돌을 근본적으로 묻는 영화지만 멜로로 풀어내면서 충격을 완화시킨다.
섹스는 아내, 권위와 주도권은 딸에게 통한다. 지독히 불편하지만 그것을 한 사람에게 투영하면 끝은 비극이다. 남자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싶어했기에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었다. 분노의 끝이 자멸이라면 분노를 멈추는 것이 낫다. 단순한 과정의 진리를 몰라서 많은 사람들이 분노로 파멸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지나치게 극화된 분노는 타당성과 인내심을 잃는다. 내 안에서 [내가 사는 피부]가 좇는 지점이 뻔하게 느껴졌던 것도 많은 이야기들이 분노와 복수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 부재하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실재의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자체가 비교적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아직은. 그래서 충격적이지만 슬프다. 아내와 딸을 잃고 절망하는 그의 모습에 나를 동일시할 수가 없었다. 그것 뿐이다. 그게 이해됐다면 이 영화를 다 이해했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있어서는 안될 일. 그래서 내가 하는 말. 제발 부탁인데, 내가 아닌 것들은 부디, 내 안에 살지 말아요, 제발. 나는 정말로 일주일만 지나면 한 살 더 먹는다. 내가 아닌 것들은 나가, 얼른 나가버려. 난 내 편만 가지런히 모아 줄세워서 같이 다음 세월로 건너가게. 일주일 시간준다, 얼른 나가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