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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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쟁쟁. 민통선 너머 자등령, 가지런히 보존된 수목원의 깊은 숲에서 이제서야 비로소 꽃과 나무들이 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책을 덮고 한참을 귀기울이니 뜻모를 고요함에 섬뜩한 두려움마저 느껴진다. 말한지도 오래지만 들은지는 더 까마득해 가늠이 되지 않았다. 우린 저마다 제 속을 얼마만큼이나 들여다보고 사나 싶어 불안했던 것이리라. 제 잘난 맛에 쏘다니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저만의 목소리를 내지 못해 안달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소리는 늘어났지만 정작 알맹이는 듣지 못하는 시간이 늘었다. 말은 흐르고 소리는 고였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 연주는 타인은커녕 자신의 삶도 제대로 들여다볼 줄 모르는 현대인을 닮았다. 사람들은 종종 말수가 적은 사람을 할 말이 없는 사람으로 규정짓는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수록 되려 입을 꽁꽁 닫고, 말없는 사람일 수록 그 안에 불꽃같은 무언가를 품고 있다는 사실쯤은 누구나 아는 세상임에도. 안에 든 것이 열정이든 분노든 체념이든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사람이, 시대가, 세상이 아무 소리 듣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여기, 숲에서는 들린다. 연주가 다니던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교도소에 있는 아버지와 굳이 서울에 남겠다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거주지를 옮겨 시작한 일, 즉 수목원 숲에서의 꽃과 나무에 대한 세밀화 작업이 이뤄지는 이곳에서는 모든 소리가 들리더란 말이다. 들리긴 들리되 들으려고 해야 들리는 소리라 제 말만 지껄이는 어떤 사람에게도 들릴지 말지는 장담할 수 없고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지만. 특가법상의 뇌물죄, 알선수재, 업무상 배임으로 징역 3년형을 받고 복역중인 아버지의 생애나 수목원의 직속 상사 안요한 실장과 그의 아들 신우, 올해 말 제대를 기다리는 김민수 중위를 비롯, 전방 사단의 부사관 생활 삼십 년, 잔반 배달업 십오 년, 숲 해설사 십여 년의 약력을 가진 이나모나 해바라기 미술학원 선생으로 자살한 이옥영의 쟁쟁한 삶 같은 건 처음부터 연주에게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인즉, 애초에 그들의 삶과 연주의 삶에 다리가 놓여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숲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사람의 소리보다 꽃과 나무와 풀, 때로 숲과 곤충과 자연이 내는 소리를 먼저 듣게 되니 노력 아닌 본능은 어떤 것에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소리없이 강한 것이리라. 주인공들은 모두 크게 움직이는 법이 없다. 이 소설은 간혹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 주인공 같다. 보이는 것보다 들리는 것에 귀기울이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보다는 사람 자체에 주목하게 된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보다 꽃과 나무와 곤충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하나하나 관찰하다보니 모든 것이 모여 숲을 이루는 것이란 명제도 얻게 된다. 더불어 나도 단지 풍경화의 부속품일 뿐이다. 어디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삶의 이치다. 그것은 제자리 즉 생긴 대로 또는 그대로 또는 본능이라는 단어로 귀결된다. 연주는 부모님을 떠나 비로소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아버지가 왜 그랬을까, 어머니는 왜 저러실까가 아니라 그냥 그들의 삶을 이런 거라고 담담히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가족 안에 머물러서는 절대 가족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마냥. 그것이 진실인 양.  

풍경과 풍경, 풍경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다리가 놓이는 것은 아니다. 민통선 너머 최전방 군인들에게 50년도 더 지난 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 그것은 세월과 세월 사이에도, 세월과 사람 사이에도 다리가 놓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이자 김민수 중위가 부탁한 뼈 그리기 작업 또한 그 연장선일 터. 50년도 더 지난 전쟁의 부수물인 유해복구작업은 한층 더 그 의미가 짙다. 삶이 여러 번 흘러갔다. 죽은 이는 죽어서도 나이를 먹었다. 그건 추려낸 뼈를 보고 느낀 사실이 아니라 발굴한 뼈 세트가 스스로 말해준 사실이었다. 아내와 이혼한 안요한 실장의 아들 신우의 그림그리기를 지도하는 일이나 김중위의 부탁인 뼈 그리기 작업에 대답이랄 만한 소리조차 못내고도 그렇게 흘러가버린 사실과 비슷했다. 모든 것에는 다리가 있어 저절로 건너고 저절로 흘렀다. 그게 삶이었다. 할아버지의 폐마 좆내논은 그야말로 온갖 다리를 건널 수 있는 존재인 셈이었다. 만주에서 할아버지가 타고 온 좆내논은 엄마의 꿈 속에도, 아버지가 저세상으로 건너가는 중에도 존재했다. 한마디로 좆내논은 앞서 말한 바로 그 다리였다.  

좆내논은 또 올 것이다. 생이 다하지 않았음으로, 사람이 사람이 아닌 게 아니므로, 소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꽃과 나무는 언제까지나 존재할 것이므로 좆내논은 또 와야 한다. 겨울 즈음 시작해 그 해 이른 겨울까지, 연주는 숲으로 들어가 모든 이들의 젊은 날을 또 숲을 알아챘다. 신우가 안실장을 떠나 엄마의 손을 잡고 돌아가버린 것이나 김중위가 부대를 떠나는 것, 이나모나 이옥영의 죽음, 그리고 아빠의 죽음까지 모든 것은 소리로 연결되어 있을 터였다.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숲의 소리를 듣는 것도 중요하다. 꽃을 바라본다 해서 꽃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 터, 그건 꽃과 나무, 곤충 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에 딱 들어맞는 이치가 아닌가. 때로 당신의 진심을 오해했다. 간혹 내 진심을 보여주면 당신도 그럴 거라 착각했다. 세상 모든 것이 공평하리라 믿었던 순수함은 어린 날의 치기일지도 모른다. 불공평이 오히려 세상의 비뚤어진 균형을 켜켜이 맞춰간다는 걸 그땐 몰랐다. 사람이 그럴 때에도 자연은 늘 곁에 있었다. 누군가는 오고 누군가는 떠날 때에도 숲은 늘 제자리에 존재했다. 떠난다고 생각한 건 다만 곤충이나 나무, 꽃의 순환일 따름이었다. 전부라고 생각했던 곤충이나 나무, 꽃은 숲의 일부였다. 내가 잘나 떠들어댄 모든 소리들은 결국 나와 누군가의 사이에 기거했다. 나는 결국 일부다. 그저 세상의 일부인 나는 어떤 것도 결론지을 수 없다. 다만 좆내논은 늘 우리 곁에 소리없이 존재할 것이며, 제각각 어떤 결핍이 있든 소설 속 모든 인물들, 나아가 우리는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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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2-29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살이 나서 머리가 너무 멍해요. 이런 날은
나에 대해 너무 침울해지지 않나요? 손가락 끝이 쑤시고. ㅠㅠ

이런 날은 말이죠...... 나의 숲은 너무나 멀어 보여여.

아이리시스 2010-12-29 19:08   좋아요 0 | URL
몸살이 나신 거라구요?
흑흑흑, 그래도 글 봤어요. 링겔투혼 그런 거군요.
방법은 땀 빼고 먹고 자는 것밖에 없어요. 얼른 나으세요~~~
좋은 글, 재밌는 글 보여주셔야죠, 그죠?

나의 숲.
아, 이번 김훈 소설은 진도가 잘 나가여.
수목원에 가고 싶게 하는 문장들이예요.
꽃과 나무, 곤충을 관찰하고 싶게 해요.
부산에도 수목원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0-12-29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 오늘 이 책 빌려왔는데....
그래서 아이리시스님 리뷰 안 읽었어요.
읽기 시작하면 와서 다시 읽을께요..
괜히 반갑네요..ㅋㅋ 우리 통했나봐요!!

아이리시스 2010-12-29 22:10   좋아요 0 | URL
숲에 반하실 거예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
좀 약한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재밌어요.

아하하, 우리 통했어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