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폭설경보가 내리는 제주에 다녀왔어. 제주공항 활주로가 복잡해서 비행기는 공항 주위를 한참 선회했어. 눈 내리는 날 하늘은 이렇구나, 싶었어. 구름은 두텁고 빽빽하게 몰려서 구름의 바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어. 구름이 어떻게 눈이 될까? 구름이 제 스스로를 떼어내서 눈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구름은 미동도 없었어. 가만히 있는데 어떻게 눈을 내릴까? 두툼해서 뛰어내려도 될 것 같지만 비행기가 구름을 지나면 아무 저항도 없이 안개가 돼. 구름을 연구하는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올라와 이렇게 쳐다보진 않겠지? 연구실에서 어떻게 연구를 할까? 구름이 눈이 되고, 비가 되는 걸 어떻게 재현해 낼까? 인공구름도 있다니까.

 

그렇지만 나는 모르겠어. 그것이 구름을 이해하는 것인지는. 살아갈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지는 느낌이야. 너는 스무 살이었는데 모르는 것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걸까? 넌 불가지론자 같았어. 그때마다 나는 누가 확실히 다 알 수 있겠냐고, 우리가 아는 아주 조금의 일에 대해 얘기하는 거니까 뭐라도 말해보라고 했지. 그러나 그 아는 조금의 느낌마저 더 작아지고 나면 모른다는 것이 압도하는 느낌이 들어.

 

하얀 구름에서는 눈이 뚝뚝 떨어지지 않았어. 하얀 구름은 숙소에서 검은 구름이 되어 눈을 뿌렸고. 아침이면 흐르는 검은 구름 같은 까마귀떼도 눈발에 흩어졌는지 몇 마리만 보였어. 김현승의 플라타너스에서처럼 마른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어. 굶주린 걸까? 아침에 거대한 무리가 의식을 치르던 모습에서 굶주림을 연상할 수 없었듯이 홀로 가지에 앉은 까마귀에서도 허기가 느껴지진 않았는데.

 

모르겠어. 다른 까마귀들은 다 어디로 가고 그 까마귀만 눈 위를 걸었는지. 평화롭던 구름이 왜 검은 빛으로 물들고 광풍과 폭설을 몰고 오는지. 누군가의 불편이나 심지어 생명에도 아무 관심이 없는 구름. 그런데도 구름을 사랑해, 라고 말하고 싶어. 구름에 대해 이토록 무지하면서 그렇게 말해도 될까? 안다는 건 뭘까? 나는 내가 사랑했던 이들을 정말 이해했을까?

 

헤세는 [페터 카멘친트](문학과지성사, 2013)에서 페터의 입을 통해 자신보다 구름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했어. 양치기가 바라보는 하늘. 그렇게 구름을 사랑한 페터는 구름을 이해했을까? 페터의 이야기를 들어 봐.

 

나는 아무도 자연을 이해한다고 할 수 없으며, 사람들이 아무리 찾고 구해도 거기서 오직 수수께끼만을 발견하고 슬퍼질 뿐이라고 대답했다. 햇빛 속에 서 있는 나무, 풍화된 돌, 동물, -그들은 각자가 하나의 인생과 하나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들은 살고, 고통 받고, 반항하고, 즐기고, 죽어가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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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매일 편지를 쓰던 때가 있었어. 중학교 2학년 때 나와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K가 복도에서 쪽지를 주는 거야.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교실 앞쪽에 앉은 그 아이와 뒤쪽에 앉은 나는 특별한 노력 없이 친해질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어. 친구하고 싶다는 쪽지 같은 건 그때 처음 받아봤어. 마치 러브레터처럼 가슴이 뛰었지. 나도 답장을 하고, 다시 답장이 오고. 쪽지가 편지가 되었지. 미용실에서도 가로등이 켜진 길에서도 나는 K에게 할 얘기들을 떠올렸어. 어린왕자 이야기는 늘 편지 몇 줄을  차지했고.

 

일요일에 학교에서 따로 만난 적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만나서는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어. K의 친한 친구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았거든. 아마도 그 애들이 싫어하는 아이를 싫어하지 않아서였을 거야. 나는 지금도 까닭을 알 수 없는데 반 친구들이 한 아이를 싫어했어. 사실 나는 별 관심이 없었어. 그런데도 따돌림 받던 아이는 다음해 자기 생일 때 나를 집으로 초대했어. 정원이 있는 커다란 집이었는데 그 아이의 부가 친구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어. 어쨌든 K와 나는 같은 반이면서 펜팔 친구였어. 학년이 바뀌고도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K의 어머니가 공부에 방해된다고 편지를 못 쓰게 하면서 편지는 끊겼어. 지금도 K를 생각하면 그 아이의 얼굴보다 편지지에 적혀 있던 가늘고 단정한 글자가 생각 나.

 

편지가 쓰고 싶어졌어. 왜 너냐고? 못 본 지 20년이 훌쩍 지났지만 간혹 꿈에서 너를 만나. 왜 그런지 꿈속에서 아주 짧게 만나는데 늘 어색해. 크게 말이 없는 네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던 모모 같은 때가 있어서일까? 나는 그때의 너를 불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강소천의 [꿈을 찍는 사진관]에서 꿈을 찍은 사진 속에 어른이 된 화자와 어린 순이가 있었던 것처럼 마흔 몇 살의 내가 스무 살의 네게 말을 걸어보는 거지. 어쩌면 나에겐 넌 꿈속에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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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억한다. 더러운 용수철을 서로 갖겠다고 서로 당기다 꽈당 넘어지면서 손바닥이 피로 물들었던 것을. 닦아도 피는 멈추지 않고 손에는 피가 떨어졌다. 5살이었던 나를 업고 7살 오빠가 집까지 왔다. 엄마는 집에 없었다. 옆집 아주머니가 피를 닦아주셨다. 다 닦아내고 보니 상처는 엄지손가락에만 났는데 퐁퐁 샘솟듯 그곳에서 피가 나왔다. 손이 피로 물들었을 때는 공포 때문에 입을 벌리고 울어댔는데 상처를 보고나니 더 이상 그렇게 큰소리로 울지는 않았다.

 

서울에서 일할 때 송년회를 마치고 술을 마시러 2차를 가는 대신 야간 개장한 롯데월드에 갔다. 평소 놀이기구 타는 걸 즐기지 않는데 우리 부서사람들이 모두 함께 타기에 나도 탔다. 긴 의자처럼 생긴 곳에 바를 내리고 앉으면 막대 같은 그 의자가 아래로 위로 요동을 친다. 처음엔 무서워서 눈을 꼭 감았다. 그러다 눈을 뜨니 무섭지 않았다. 눈을 뜨니까 안 무섭다고 옆에 있는 동료에게도 눈을 뜨라고 소리 질렀다.

 

두려움이란 알지 못하는 데서 온다. 뱀이라고 무서워 소리쳤지만 그게 뱀이 아니고 그냥 끈이라는 걸 알면 웃게 된다.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고.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건 뭘까? 그것이 알고 보면 작은 상처이고, 눈만 뜨면 아무것도 아닌 일은 아닐까. 오랜 질병 같은 답답함도 내가 눈을 감고 있어서 보지 못하는 무엇 때문일까? 피를 다 닦아내기 전에는, 눈을 뜨기 전에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 수가 없다.

 

대선 후보들을 보면 자기 견해를 말한다. 소신 있게 말하기도 하고, 눈치를 보기도 한다. 나는 소신 있게 살고 싶지만 삶 전체가 엉성한 느낌이다. 하나하나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한 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눈치를 보게 된다. 대선후보들처럼 저런 토론의 자리에 앉으면 나는 얼마나 어설플까.

 

티벳에서는 수행자끼리 계속해서 큰소리로 문답을 한다. 선문답 같은 게 아니고 교리에 맞게 자기 생각에 맞춰서 얘기를 한다. 그렇게 두려움이란 것에 대해 소리쳐 몇 시간이고 문답해 보고 싶다. 피를 다 닦아내듯이 내가 두려워하는 갖가지 얘기들을 목이 터져라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다 보면 조그만 두려움이 얼마나 얇게 퍼져서 내 삶을 흐리고 있는지 분명하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두려운 것에 대해 말해보자. 두렵다, 두렵다, 두렵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불안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의 실체를 보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을까봐 두렵다. 엄마 역할이란 게 뭘까? 엄마로서, 딸로서, 아내로서, 나 자신으로서 문득 모든 걸 팽개치고 싶을 정도로 지친다. 무언가 억지로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진실하게 살지 못할까 봐 두렵다. 그러나 진실이란 뭘까? 누군가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이 진실일까? 내 사랑이 두렵고, 불쑥 튀어나오는 우울이 두렵고, 작은 고통조차 두렵다. 억지를 쓰면서라도 내 두려움에 대해 오래고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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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5-12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언가 등잔 밑 어두운 곳(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오늘 제 머릿속에서 등불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네요. 어제 오늘 알라딘에서 불을 당겨주는 글들을 연이어 발견하네요.

2017-12-23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날
_이성복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占 치는 노인과 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市內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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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어느 청년 구직자의 하루


누구나 갈 수 있는 화려한 세상 여기 있다
가벼운 터치로 매끄럽게 빛나지만
검색한 평균의 삶은 닿을 수 없는 신기루

무음의 면접장에 홀로 서 있으면
꽉 낀 정장 안에는 초조한 심장의 진동
이번엔 들을 수 있을까 합격의 벨소리

적막으로 변해 버린 기다림을 등지고
네모난 고시원방, 엄지가 바쁘다
무선(無線)을 타고 달리는 단선(斷線)의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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