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한다. 더러운 용수철을 서로 갖겠다고 서로 당기다 꽈당 넘어지면서 손바닥이 피로 물들었던 것을. 닦아도 피는 멈추지 않고 손에는 피가 떨어졌다. 5살이었던 나를 업고 7살 오빠가 집까지 왔다. 엄마는 집에 없었다. 옆집 아주머니가 피를 닦아주셨다. 다 닦아내고 보니 상처는 엄지손가락에만 났는데 퐁퐁 샘솟듯 그곳에서 피가 나왔다. 손이 피로 물들었을 때는 공포 때문에 입을 벌리고 울어댔는데 상처를 보고나니 더 이상 그렇게 큰소리로 울지는 않았다.
서울에서 일할 때 송년회를 마치고 술을 마시러 2차를 가는 대신 야간 개장한 롯데월드에 갔다. 평소 놀이기구 타는 걸 즐기지 않는데 우리 부서사람들이 모두 함께 타기에 나도 탔다. 긴 의자처럼 생긴 곳에 바를 내리고 앉으면 막대 같은 그 의자가 아래로 위로 요동을 친다. 처음엔 무서워서 눈을 꼭 감았다. 그러다 눈을 뜨니 무섭지 않았다. 눈을 뜨니까 안 무섭다고 옆에 있는 동료에게도 눈을 뜨라고 소리 질렀다.
두려움이란 알지 못하는 데서 온다. 뱀이라고 무서워 소리쳤지만 그게 뱀이 아니고 그냥 끈이라는 걸 알면 웃게 된다.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고.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건 뭘까? 그것이 알고 보면 작은 상처이고, 눈만 뜨면 아무것도 아닌 일은 아닐까. 오랜 질병 같은 답답함도 내가 눈을 감고 있어서 보지 못하는 무엇 때문일까? 피를 다 닦아내기 전에는, 눈을 뜨기 전에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 수가 없다.
대선 후보들을 보면 자기 견해를 말한다. 소신 있게 말하기도 하고, 눈치를 보기도 한다. 나는 소신 있게 살고 싶지만 삶 전체가 엉성한 느낌이다. 하나하나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한 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눈치를 보게 된다. 대선후보들처럼 저런 토론의 자리에 앉으면 나는 얼마나 어설플까.
티벳에서는 수행자끼리 계속해서 큰소리로 문답을 한다. 선문답 같은 게 아니고 교리에 맞게 자기 생각에 맞춰서 얘기를 한다. 그렇게 두려움이란 것에 대해 소리쳐 몇 시간이고 문답해 보고 싶다. 피를 다 닦아내듯이 내가 두려워하는 갖가지 얘기들을 목이 터져라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다 보면 조그만 두려움이 얼마나 얇게 퍼져서 내 삶을 흐리고 있는지 분명하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두려운 것에 대해 말해보자. 두렵다, 두렵다, 두렵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불안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의 실체를 보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을까봐 두렵다. 엄마 역할이란 게 뭘까? 엄마로서, 딸로서, 아내로서, 나 자신으로서 문득 모든 걸 팽개치고 싶을 정도로 지친다. 무언가 억지로 하고 있는 걸까? 내가 진실하게 살지 못할까 봐 두렵다. 그러나 진실이란 뭘까? 누군가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이 진실일까? 내 사랑이 두렵고, 불쑥 튀어나오는 우울이 두렵고, 작은 고통조차 두렵다. 억지를 쓰면서라도 내 두려움에 대해 오래고 얘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