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슬픔 
_김일연


끊임없이 값어치를 무게로 재고 있는 
도살당한 고기들과 일용하는 양식들 
먹기를 삼백 예순 닷새 거른 날 하루 없네 

생각하면 뜨거움만으로 사는 것은 아닌 것 
온몸으로 부는 바람 온몸으로 지는 꽃잎 
잎 다진 목숨들 안고 인내하는 겨울山 

헐벗은 무얼 다해 가고 있나, 너의 허울 
끊임없이 값어치를 맑기로 재고 있는 
새벽녘 생수 한 잔이 뼈 속에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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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보려면 
 _정호승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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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보문단지 밤길에 하트 모양 등들이 시시각각 빛깔을 바꾸며 길을 밝히고 있다. 여기저기 연인들이 셀카를 찍고, 팔짱을 끼고 다정히 걷는다. 흐뭇하게 그들을 본다. 그때 나와 걷던 언니가 그들을 보면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애를 낳고 그렇게 그렇게 살아갈 무거운 삶이 보인다고. 언니를 본다. 무겁구나, 언니야. 커다란 연을 만들어 언니를 태워 날리고 싶다. 괴성을 지르며 무서워하다 이내 함박 웃으며 구름이 누리는 가벼움에 익숙해지겠지.

혹시나 이 길이 생각나면 줄을 당겨. 사랑이 무거운지 가벼운지 알 수 없지만 언제나 그 길 어딘가 서 있는 우리들 속에 사뿐히 내려 앉도록 바람이 데려다 줄거야. 그러니 걱정말고 가볍게 떠올라 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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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밤나무 2019-03-21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가벼워졌단다^^
 

밤 열한 시의 치킨샐러드
_나희덕


더블린의 밤, 불 켜진 집이라고는
취객들을 상대로 한 패스트푸드점뿐이었다
커다란 체스판 무늬의 바닥은
방금 물청소를 끝낸 듯 반짝거렸고
나는 지친 말처럼 검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체스판 저쪽의 한 남자,
리본 달린 머리띠를 둘러 여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창밖을 바라보며
치킨샐러드를 천천히 되새김질했다
잠시 후 한 남자가 들어왔고
치킨샐러드를 먹던 남자는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울다 웃다 울다 웃다
두 남자는 마침내 끌어안고 키스를 길게 나누었다
남자의 혀와 남자의 혀가 엉기는 동안
침과 침이 섞여드는 동안
그들의 입속에서 밀려다니고 있을
닭가슴살과 양상추와 파프리카와 콘후레이크,
누르스름한 머스터드 소스,
서로의 혀와 팔에서 풀려난 그들은
남은 치킨샐러드를 먹어치웠고
정작 먹먹해진 것은 체스판 이쪽의 관찰자였다
주문한 햄버거가 나왔지만
한두 번 베어먹다 내려놓고 말았다
벽시계의 분침과 시침이 11시에서 잠시 겹쳤다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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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아침
_강현덕 


열쇠를 찾아 들고 신발을 신는다 
현관을 나서기도 전 먼지들이 일어나고 
저 문을 열기만 하면 난 이제 내가 아니다 
듣다만 칸타타도 이제는 그들의 몫 
지폐 몇 장의 낡은 지갑만이 유일한 내 얼굴이다 
하루를 써버리기 위해 저 문을 열기만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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