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목소리

 

 

기슭아, 뭐가 즐거운지 웃어대는 아이들을 윽박질러 겨우 재워놓고 혼자 맥주를 마셔. 맥주는 술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남편이 냉장고에 넣어둬. 나름의 애교야. 딱 한 캔이 남아 있네. 남편은 제사에 갔어. 증조부 제사. 설날이 얼마 남지 않아 이 제사는 남편만 참석해. 큰집이 경기도라 어머님, 아버님 제사만 가족 모두 가. 보통 때도 남편은 술을 전혀 못해서 집에서는 간혹 혼자 마셔. 아주 조금.

 

우리 처음 술 마신 날 기억해?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고? 그러게. 네가 나한테 밥 사달라고 했는데 내가 술을 사겠다고 했어. 그래서 마셨지. 술집 이름을 잊어버렸네. 맥주를 파는 아주 좁은 지하 술집이었는데. 부부가 함께하는. 사장이 26살이었나? 별 게 다 기억나네.

 

너는 아빠가 장로님이라고 했어. 처음 같이 술을 마시는데 그 말을 했던 것 같아. 장로님 자녀들은 교회에 나가야 한다고. 그때 넌 대구에서는 안 나갔던 것 같아. 네 고향에 가면 교회를 나가고. 지금은 교회 나가?

 

나도 교회에 다닌 적 있어. 5학년 때였는데 어떤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와서 아이들에게 교회에 나가자는 거야. 우리 집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없었어. 난 안 간다고 했는데 그 사람들이 승합차를 가져와서 친구들을 데리고 가버렸어. 놀 사람이 없어서 결국 나도 따라 갔어.

 

그 교회는 개척 교회였고, 교회 선생님은 상업고등학교에 다니는 언니들이었어. 한 언니는 영적인 사람 같이 보였어. 나도 저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 누가 봐도 기도하는 사람처럼 살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 성경 암송도 하고, 동전을 모아 헌금도 했어. 타고 갔던 승합차를 다시 타고 집에 와야 해서 하루 종일 교회에 있었어. 산기도도 따라 간 적 있었는데 참 이상했어. 왜 막 소리치면서 기도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 나는 바위 위에 앉아 다리를 달랑달랑 거리면서 사람들이 기도하는 걸 구경했어.

 

크리스마스가 왔어. 고등학생 선생님들이 초등학생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합창을 할 거래. 친구들과 다함께 노래를 부르는데 내 음이 다른 아이들보다 낮대. 저절로 화음을 넣는 것처럼 됐으니 그냥 부르면 되겠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난 그게 몹시 창피하게 느껴져서 교회를 안 나갔어. 신앙심과 아무 상관없이. 정말 하찮은 이유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는 때가 있어. 교회를 안 나가는 이유는 오래도록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었어.

 

이따금 그 고등학생 언니가 생각나. 지금도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느꼈던 영적인 얼굴을 하고 있을까? 영적인 얼굴이 어떤 얼굴이냐고? 모르겠어. 느낌이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얼굴보다 음성이었을까?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였어. 그렇게 닮고 싶은 사람을 두고 찬송가 음정을 못 맞춰서 교회를 나온 내가 문득 안쓰럽네.

 

벌써 11시가 넘었어. 맥주는 겨우 한 캔이라 벌써 다 마셨어. 술과 교회 이야기가 별로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우리 첫 술자리에서 교회 이야기를 했구나. 아마도 교회가 네 삶의 큰 부분이어서 너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인가 싶어. 시계소리가 커지네. 오늘은 혼자 마신 게 아니라 너와 함께 마신 것 같아. 진짜로 그런 건 아니지만. 양치하고 자야겠어. 기슭아, 잘 자.

 

 

 

낮은 목소리

_황인찬

 

 

성가대에 들어간 것은 중학교 때였다

일요일 오후엔 찬양 연습했다

끌어내리듯 부르는 것이 나의 문제라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무로 된 긴 의자와 거기 울리는 소리가 좋았다

 

말씀을 처음 배운 것은 말을 익히기 전의 일이었다

그것을 배우며

하나님의 목소리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연습이 진행되는 동안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공간이 울고 있었다

 

낮은 곳에 임하시는 소리가 있어

계속

눈앞에서 타오르는 푸른 나무만 바라보았다

 

끌어내리듯 부르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마음이 어려서 신을 믿지 못했다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민음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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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1-24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두 주님을 열심으로 섬깁니다.

주님은 사랑입니다.

이누아 2019-01-24 14:57   좋아요 0 | URL
두 주님^^
 

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한강, 소년이 온다(창비, 2014), p.85

 

 

허기를 느끼는 것에 치욕을 느껴본 적이 있니? 가족을 잃었을 때 배고프지 않았어. 먹는 게 구차하게 느껴졌어. 그러나 장례가 끝나고, 49재가 끝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니까 결국 허기를 느꼈어. 이상했어. 몸은 살고 싶다는 의지 따위가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뭘 먹으려고 해. 그게 살아있는 것의 속성일까.

 

소년이 온다에서 80년 광주를 겪은 은숙은 허기에 치욕을 느껴. 그녀는 5년이 지나도 아직 그때 죽은 이들의 장례를 끝내지 못했나 봐. 아픔을 말할 입이 봉해져 진정으로 통곡하지 못한 채 그 시간에 그대로 멈춰 있었던 걸까.

 

록산 게이는 헝거(사이행성, 2018)에서 또 다른 허기에 대해 말해. 그녀의 몸은 200킬로그램에 가까워. 그녀는 어릴 때 강간을 당했어.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마음이 공허해서였을까? 그녀는 참을 수 없는 허기를 느껴. 배고프고, 먹고, 먹은 자신을 혐오했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과거를 지고 다니는 그녀도 허기 앞에서 치욕을 느껴. 허기를 못 참고 정신없이 먹고는 다 토해내기도 하면서. 은수는 그때 죽은 이들을, 록산 게이는 그날의 어린 자신을 매일 마주하고 있는 걸까.

 

지금도 과거가 몸에 새겨져 있는 사람들이 있어. 과거를 데리고 다니며 자신이 짓지 않은 죄에 대한 죄책감으로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죄책감을 벗으려면 은수도 그때 죽었어야 했을까, 록산 게이도 그날 사라졌어야 했을까. 아니지! 죄책감은 그들이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들이 느껴야 하는 거 아닌가.

 

텔레비전을 틀면 뉴스에서 아직도 얼굴만 다른 은수가, 록산 게이가 나와. 이런 일은 늘 있어 왔다는 듯이. 언제쯤 그들이 무거운 과거의 짐을 내려놓고, 맛있게 밥 한 그릇 먹을 수 있을까. 죄 지은 자들이 죄책감을 느끼는  세상이 될 때까지는 우리에게도 허기는 치욕이 아닐까.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싶다. 나 자신을 보호하고 싶다. 내 과거는 내 소유이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 과거를 깊은 곳에 묻어두고 그 과거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살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30년이나 흘렀는데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헝거,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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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의 주둥이 부분이 조금 깨어졌어. 엄마는 깨진 그릇은 재수가 없다고 하셔. 오래 전에 남경에서 지냈는데 거긴 흠 있는 그릇이 많았어. 심지어 살짝 깨진 그릇이 재수 있다는 말도 들었어. 똑같이 깨져도 여기서는 재수 없는 일이 중국에 가면 재수가 있는 걸까. 같은 손이지만 인도에서는 왼손으로 악수도, 식사도 안 하잖아. 왼손은 뒤를 씻는 손이니까 위생 때문이었겠지만 나중엔 오른쪽은 신성해지고 왼쪽은 무례해졌지. 어떤 필요 때문에 생겨난 행동이 관습이나 관념이 되기까지 얼마만한 시간이 필요할까?

 

난 결혼하고 일곱 번쯤 이사했어. 한 번은 어머님이 그해 우리 집 이사가 불길하다는 도사의 말 때문에 전전긍긍하다 부적을 주셨어. 부적을 싱크대 아래 붙여 두고 이사를 했어. 별 일 없었어.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다시 이사하는 날, 달력을 봤어. 어머님은 손 없는 날을 고집하셨을 테지만 난 그날을 피했어. 손 없는 날은 이삿짐센터 예약도 어렵고, 가격도 비싸거든. 그렇게 이사를 해도 역시 별 일 없었어.

 

어쩌다 손 없는 날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그것도 인도의 왼손처럼 어떤 이유로 생겨났다 관습처럼 돼 버린 게 아닐까? 행운과 불길을 세기 시작하면 마음은 불안해져. 징크스가 그런 것 같아. 번거로운 동작을 수십 번 반복하는 야구선수를 보면 불안이 그의 몸 안에서 출렁거리는 것처럼 보여.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부모님이 죽는다는 속설 알지? 나는 그 말을 믿고 어렸을 때 빨간색으로 이름을 안 썼어. 어쩌다 빨간색으로 쓰면 놀라서 검정으로 덮어버렸지. 근데 이 이야기의 시작은 진시황 때 황제만이 붉은색으로 이름을 적을 수 있고, 평민이 사용하면 큰 벌을 준 거라네. 2천 년도 더 지나서 이국에서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안 된다고 조심했던 거지.

 

빨간색 하니 빨간 머리 앤이 생각나. 앤이 숲의 도깨비를 상상하고서 자신의 상상 때문에 무서워서 밤에 그 숲을 지나지 못한 거 기억나? 우리가 지어낸 허상이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 안에서 두려움에 떠는 건 아닐까?  

 

빨간색으로 이름을 써도 괜찮다는 걸 아는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속설과 편견에 휘둘려. 마음속에선 불안과 두려움이 까만 눈을 반짝이고 있고. 나보다 늘 담담해보였던 너도 그럴 때가 있겠지. 나보다 덜 자주, 옅게 지나가겠지만. 근데 깨진 그릇은 불운일까 행운일까? 깨진 그릇일 뿐이지! 그 외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매순간 알아차리고 싶어.

 

 

 

지나친 상상을 한 것을 후회했다. 자신의 상상이 낳은 요사스러운 괴물들이 여기저기 어두운 그늘에 숨어 싸늘한 뼈뿐인 손을 뻗어 자기들을 만들어낸 여자 아이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루시 모드 몽고메리,ANNE1 만남(동서문화사, 2004),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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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22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22 16: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방금 청도에서 돌아왔어. 아이들이 친구들이랑 놀러 가고 싶다고 해서 어제 갑자기 짐을 챙겨 갔어. 청도에 집이 있거든. 방 한 칸에 거실이 있는 작은 집이지만 나름 별장이야. 여름 별장.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거기 가서 잔 적은 없어. 이번이 처음이었어. 덜덜 떨어도 재미있었는지 하루 더 자고 가자는 걸 2월에 한 번 더 오자고 하고 왔어.

 

눈썰매를 타러 갈까 하다 뒷산에 올라갔어. 거긴 여름에 자주 가는 비밀 계곡이 있어. 갈 때마다 우리밖에 없어서 우리만 아는 계곡이라 생각해. 얼음이 꽝꽝 얼어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돌과 막대기로 얼음을 깨기 시작했어. 남자아이 4명이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분업까지 해가면서 열심히! 하나가 돌을 던지면 돌 던져 약해진 부분을 나머지가 가서 막대로 치고 손으로 얼음을 빼내고.

 

그런다고 계곡에 물이 흐를까, 했는데 한 시간을 그러고 있으니까 계곡의 한 부분이 완전히 얼음이 깨져서 물이 콸콸 흘렀어. 아이들은 봄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계곡을 흐르게 할 수 있구나. 이런다고 이 얼음을 다 깨겠어, 짐작했다면 깨지 못했을 얼음이었지.

 

대학 다닐 때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시위가 많았던 거, 기억나? 우연히 같이 점심을 먹었던 법대생 선배가 그런다고 그 사람들이 감옥에 가겠어, 안 가. 우리나라는 안 돼!” 하더라고. 근데 그 대통령들은 모두 감옥에 갔어. 그래 봐야 헛수고라고 했던 선배 같은 사람들이 가득했으면 안 갔겠지. 그 선배도 뭔가 애썼는데 좌절했던 경험이 있었는지 몰라. 그러나 이것저것 재지 않고, 하고픈 말을 하고 행동했던 사람들 덕에 변화가 오는 게 아닌가 싶어.

 

요즘 나는 그 선배처럼 그렇게 해서 될 일인가 아닌가 짐작하는 경우가 많아졌어. 체력과 시간과 돈을 다 고려해서 뭔가 결정하는데, 사실 그 조건이 온전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도 있는데 움츠리게 돼. 지금처럼 약간 지친 느낌도 어떤 일을 할 때 지나치게 애쓰지 않게 하는 것 같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으니 아이들이 앞뒤 없이 얼음을 깨는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올라. 활기란 그런 거지.

 

기슭아, 나는 너무 일찍 활기를 잃은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깨고 싶어, 그러니 깨 보자!’ 아이들이 그 무모한 활기를 오래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걸 보니 내게도 그 활기가 영 죽지는 않은 걸까? 겨울나무처럼 뿌리에 간직하고 있을까? 아주 오래 전 너는 헤아림 없이 행동하는 우리 아이들 같았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내가 돌을 던지면 네가 막대를 내리쳐, 이러면서 우리 한번 놀면 좋겠다.

 

 

 

열등생

_자크 프레베르

 

 

그는 머리로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가슴으로는 그렇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는 그렇다고 말하지만

선생님에게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선생님이 질문을 한다

온갖 질문이 쏟아졌지만

갑자기 그는 폭소를 터뜨린다

그러고는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숫자도 단어도

날짜도 이름도

문장도 질문의 함정도

교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우등생 아이들의 야유를 받으면서도

온갖 색깔의 분필을 들고

불행의 검은색 칠판 위에

행복의 얼굴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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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도 더 된 얘기야. 큰언니가 포항에서 주택 2층에 세를 살았어. 2층 마당에 햇살이 비치고 아이들 신발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데 언니는 그 평화가 깨어질까 두려웠다고 했어. 그때 돈도 별로 없고, 시댁과의 관계로 마음고생도 심했는데 언니는 그 순간의 소중함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순간을 기적이라고 부르면 지나친 걸까?

 

알라딘 서재지인 중에 혜덕화 님이 있어. 그분과 딸이 기적에 관해 얘기하는 글을 본 적이 있어. 딸이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하자 혜덕화님이 "엄마가 아파서 기적적으로 낫는게 좋겠니? 그냥 안 아프고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사는 게 좋겠니? 우리가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것이 기적이란다" 라고 말하셨어. 생사를 오가다 살아나는 것보다 아무 일 없이 살아 있는 게 훨씬 더 큰 기적이야. 인상적인 글이어서 자주 생각나. (http://blog.aladin.co.kr/777032133/4330843)

 

중국에 유명한 의사 편작(扁鵲)이라고 들어봤지? 편작의 형제들은 모두 의사였어. 편작의 명성이 가장 높았지만 편작은 형들이 훨씬 훌륭한 명의라고 했어. 큰형은 환자의 병세가 나타나기 전에 원인을 없애버리고, 둘째형은 병의 초기에 치료를 하는데 치료가 간단하게 보여 사람들이 그들의 의술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대. 반면에 편작은 병세가 위중해지고 난 뒤에야 치료하기 때문에 세상이 자신을 명의로 생각한다는 거야. 기적이 그런 것 같아.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누리는 삶에 대해선 무심하고, 사고가 난 후의 삶에는 경탄을 보내고.

 

동네 한의사가 환자 두 사람에게 똑같이 침을 한 번 놓고 아픈 다리를 낫게 했는데 한 사람은 고마워하고, 한 사람은 전혀 고마워하지 않았대. 고마워한 사람은 다른 병원을 전전하다 그곳에서 겨우 나았던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곳에 처음 가서 바로 치료가 된 거였어. 쉽게 주어지면 그 가치를 알기 어려워. 건강이나 공기처럼.

  

큰애가 아람단 활동으로 제주도에 다녀왔어. 가족끼리 여러 번 제주에 갔었는데 한 번은 태풍이 와서 34일이 67일이 되었고, 또 한 번은 눈에 갇혀서 숙소에만 있었어. 여러 병원 전전한 환자처럼 제주에서 사고 없이 돌아온 아이를 보니 얼마나 감사한지. 건물이 무너지고 태풍을 만나고 건강을 잃기 전에 이 일상의 평온함이 기적이라는 걸 매순간 깨닫고 싶어.

 

물론 무조건 지금에 만족하라는 식의 얘기는 아니야. 무너진 건물에서는 일단 뛰쳐나와야지. 그건 이미 사고가 난 거니까 수습을 해야지. 아픈 다리를 낫게 하듯이. 부당하고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면 편작의 수술이 필요할 거야.

 

큰애는 아직도 자고 있어. 작은애는 큰애가 따온 귤을 먹으며 만화를 보고. 그때의 언니처럼 나도 이 순간이 아주 소중하게 느껴져. 기슭아, 너도 햇살 속에 있기를 기도해.

 

    

   

내 말 잘 들어, 친구. 인생은 지금 이대로가 전부야. 자네가 현재의 처지를 싫어하면, 결국 모든 걸 잃게 돼. 내가 장담하는데 자네가 지금 가진 걸 모두 잃게 된다면 아마도 필사적으로 되찾고 싶을 거야. 세상 일이란 게 늘 그러니까.”-더글라스 케네디, 빅 픽처(밝은 세상, 2010), p.159

 

 

 

   

기적

_심재휘

 

 

병실 창밖의 먼 노을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저녁이 되니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네

 

그후로 노을이 몇 번 더 졌을 뿐인데

나는 그의 이른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간다

 

하루하루가 거푸집으로 찍어내는 것 같아도

눈물로 기운 상복의 늘어진 주머니 속에는

불씨를 살리듯 후후 불어볼 노을이 있어서

 

나는 그와 함께 소주를 마시던 술집을 지나

닭갈비 타는 냄새를 지나

그의 사라진 말들을 지나 집으로 간다

 

집집마다 불이 들어오고

점자를 읽듯

아직 불빛을 만질 수 있는 사람들이

한집으로 모여든다

 

-심재휘,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문학동네, 2018),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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